[기독역사 바로 세우자-(9) 치열했던 해외 독립운동] 목회자는 나라 되찾기 앞장

2010. 2. 21.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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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해외의 독립운동이라는 주제를 논할 때 기독교의 역할은 결코 무시될 수 없다. 당시 해외 한인사회 구성원과 주변 환경이 기독교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경우가 많았다. 독립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한 연구에 따르면 20세기 초 하와이 전체 한인 가운데 50%가 기독교로 개종했다. 1907년 3월 말 '공립신보'가 북미지역 거주 한인 500여명 중 40%가 장로교와 감리교 소속의 기독교 신자였다고 보도한 것으로 보아도 기독교와 미주사회와의 관련성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중국 만주지역의 서간도와 북간도 거주 한인도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다.

미주에서 한인사회의 권익보호와 독립운동을 위해 가장 폭넓게 활동했던 단체는 안창호가 주도했던 대한인국민회(Korean National Association)라고 할 수 있다. 1912년 중앙총회 및 지방총회 조직과 함께 범 재외한인 정치공동체로 발전한 대한인국민회에서 미주 기독교인들이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예를 들어 평양숭실학교를 졸업하고 1913년 한국인 최초로 US버클리대학교를 졸업한 이대위(David Lee) 목사는 1911년부터 상항한국인감리교회의 담임교역자였다. 그는 미주한인교회와 사회, 독립운동에 모든 열정을 바쳤다. 그는 1913∼1919년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부 총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미국 정치권으로부터 한인사회의 자치권을 받아내기도 했다. 신한민보 주필로서 정론을 폈고 '인터타입' '국문신식활자' 등을 발명, 인쇄술 발전에도 기여했다.

이 목사 외에도 미주 독립운동가가 적지 않았다.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각각 소년병학교와 대조선국민군단을 설립하고 무장독립투쟁을 지도했던 박용만, 공립협회와 대한인국민회를 창설하고 미주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던 안창호, 하와이에서 한인기독학원과 동지회를 창설해 외교적 노력을 펼쳤던 이승만, 친일망언을 내뱉던 미국인 조선정부고문관 스티븐스를 샌프란시스코 페리부두 앞에서 저격한 장인환, 캘리포니아에서 대동보국회의 창립에 관여했던 열혈여성 차(김)미리사, 그리고 독립신문 독립협회를 설립하고 미국의 정치권을 겨냥한 운동을 주도했던 서재필 등은 민족애와 신앙을 융합해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기독교들이었다.

또한 1905년 8월 이승만과 함께 테오도르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 독립청원서를 전달하였던 윤병구 목사, 임정에 관여해 미주와 중국에서 활동한 현순 목사, 대한인국민회의 임정구 목사, 청년혈성회를 주도하고 장인환 의사 보석운동에 나섰던 황사선 목사, 국민회를 대표해 멕시코를 방문했던 황사용 목사, 동지회에 깊이 관여했던 민찬호 목사 등은 동포들의 삶을 선도하고, 결사단체 및 교회를 통해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성직자들이었다.

미주 한인교회들은 국어학교를 설립하고 소학교를 지원해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민족의 언어와 혼을 전해주고 의식계몽운동에도 힘썼다. 또한 교회지도자들은 십자가와 부활 등 기독교신앙의 핵심사상을 민족주의적으로, 사회복음적인 의미에서 해석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중국의 만주지역, 특히 용정촌을 중심으로 하는 북간도와 삼원포를 중심으로 하는 서간도는 을사조약과 경술국치를 목격하면서 해외의 거점 독립운동 기지로 성장했다. 북간도에서는 간민회가 조직돼 한인사회를 보호하고 항일운동을 펼쳤다. 국민회군과 북로군정서 등의 다양한 독립군단은 조선의 영토 회복을 꿈꿨다. 백두산 서쪽의 압록강 대안에 위치한 서간도에서는 1910년대 후 신민회 관련 애국지사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경학사 신흥무관학교 부민회 한족회 서로군정서 등은 각 시기마다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서북간도의 기독교인들은 위에서 언급한 주요 독립운동 단체를 주도하거나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06년 용정촌에서 항일민족교육기관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열었던 이상설, 신민회 관련의 이동휘, 명동학교 김약연과 정재면 목사는 북간도의 대표적인 기독교 독립운동가들이었다. 민족시인 윤동주와 훗날 통일운동에 헌신한 문익환 목사가 바로 이 명동학교에서 배출됐다. 서간도에서는 안동식 등 기독교인이 독립운동단체에서 활동했다. 한경희 목사는 동명학교 등을 설립, 한인사회와 민족교육기관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다. 1921년 서간도 지역에 조선예수교장로교회 남만노회가 설치되었는데, 4년 만에 12개의 학교를 운영하면서 사회와 민족운동에 기여했다.

만주에서 3·1만세운동은 과연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이는 아마도 3월 7일 또는 12일에 서간도 삼원포에 있는 한 교회에서 촉발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직후에 북간도와 다른 지역들에서도 이 운동은 들불처럼 일어났고 향후 독립운동을 한층 발전시켰다. 3·1운동 직후 수많은 한인을 학살하고 건물을 파괴한 경신참변에서 기독교계는 가장 처절한 피해를 입었다. 이는 일제가 독립운동의 모판이 기독교계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박형신 남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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