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변호사의 담안에서 만난 사람들 (11)―조세형 ①] '대도'의 도벽은 범죄 이전에 질병

2008. 3. 6.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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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형이 일본의 감옥에서 복역한 지 3년쯤 지났을 때였다. 조세형의 장물애비로 젊은 시절을 지냈던 정모가 사무실로 찾아왔기에 내가 물었다.

"조세형이 자기는 절대로 절도를 하지 않았다, 억울하다고 했다던데, 진짜 안한 거 아닐까요?"

그건 내 잠재의식 속에 있던 희망사항이었다. 그가 자신 있다는 듯이 대답했다.

"저하고 일본으로 면회 한번 가볼까요? 다른 사람은 속여도 저는 속이지 못할 걸요."

앞으로 내가 조세형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물어봤다.

"도와주지 마세요. 도움을 이용하려고만 들겁니다. 일본 수감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올 쯤엔 더 비참해져 있긴 할테지만 아직 아닙니다. 그리고 나이 일흔쯤 되면 좀도둑으로 변할 겁니다. 힘이 없을 테니까. 그때쯤이나 도와주시죠."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도벽은 정말로 치유가 불가능한 것인가.

"이렇게 말한다고 제가 조세형을 욕하는 게 아닙니다. 세상 누구보다도 그 친구를 좋아하고 오랜 세월을 같이 보냈어요. 예를 들어드릴까요? 젊을 때 그와 인사동 한 여관 2층에 묵은 적이 있어요. 방에 예쁜 선풍기가 있었지요. 그걸 훔치겠다고 하더군요. 그의 주머니엔 몇백만원이 들어 있었어요. 그런데도 값싼 선풍기 하나를 훔치는 쾌감이 필요했던 거죠. 결국 점퍼 안에 선풍기를 넣고 계단이 아니고 창문을 통해 내려가더군요. 그에게 절도는 탐욕도 아니고, 본능이 돼 버린 거죠."

조세형이 일본에서 귀국했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부인이 무당집 같은 걸 차려놓았다는 얘기도 들려왔다. 다시 1년이 지난 어느 날, TV뉴스에 조세형이 나오고 있었다. 마포 부근에서 좀도둑질을 하다가 검거됐다는 뉴스였다. 기자들이 "조세형씨 맞죠?"하고 그에게 물었다.

"저, 그런 사람 아니에요. 그냥 노숙자예요."

점퍼로 얼굴을 가린 채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며칠 후 기자 한 사람이 찾아와 "앞으로도 또 조세형을 도와주실 생각이냐"고 물었다.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성경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했다.

"지금은 자신 없습니다. 그럴 마음이 생기도록 기도해 보겠습니다."

조세형이 저지르는 모든 범죄에 대한 책임이 나에게 돌아왔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가 왜 다시 도둑질을 했느냐고 따지듯 물었다. 다시 몇년이 흘렀다. 교도소마다 설교하러 다니는 담안선교회 임석근 목사가 사무실로 찾아왔다. 그는 조세형의 변호를 내게 최초로 부탁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다른 수감자들은 다 예배 보러 나와도 조세형만은 나오질 않아요. 다시 참회하고 도와달라고 하면 저나 엄 변호사님이 도와 줄텐데요. 그 자존심이 뭔지 모르겠다니까요."

문득 조세형을 처음 만났을 때 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자기 소명은 감옥 안에서 이렇게 비참하게 살다가 간 사람도 있구나 하는 반면교사의 모델이 되는 것이라고 했었다. 진짜 그렇게 되는지도 몰랐다. 악마는 그를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조세형 사건을 통해 나는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어렴풋이 알게 됐다. 끝없이 범죄를 저지르고 참회하지 못하는 인간을 위해 진 예수의 십자가의 의미를….

25년 전. 감옥에서 조세형이 쓴 탄원서는 문둥이 시인 한하운의 시 '나는 문둥이로소이다'라는 시를 인용하면서 시작하고 있었다.

"…제 나이 마흔입니다. 유년기엔 전국의 보육원 27곳을 전전했고, 소년기에는 서울 소년원을 20회 왕래했습니다. 성년이 돼서 실형 전과 9범으로 교도소에서 보낸 세월만 16년입니다. 감옥에서 보낸 세월을 빼면 깡통 들고 밥을 얻어먹고, 골목길에서 가마니를 덮고 자던 시절이 제겐 가장 길게 자유로운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깡통 없이도 배를 채울 수 있는 기술을 가르쳐 주는 친구들을 만나 소년원을 자주 왕래하게 됐고, 그곳에서 만난 선배들에게 더 전문적인 기술을 배웠습니다."

5·16 정부가 부랑아들을 모아 목포 앞바다의 외딴 섬으로 보냈다. 그는 거기서 탈출해 다시 서울로 올라왔고, 스무살 무렵에는 진짜 프로도둑이 돼 있었다. 그는 유명인사와 부호들의 집을 털기 시작했다. 1975년 검거되면서 그는 언론에 의해 스타 도둑, 대도 조세형이 됐다.

당시 서울지검 박희태 검사는 절도행위 최고의 형량인 징역 25년을 구형했다. 박 검사는 조세형을 생존형 절도가 아닌 축재와 향락을 위해 도둑질을 기업화한 도둑이라고 정의했다.

8년의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고 나온 후 그는 몇달 만에 또 도둑질을 하다가 총에 맞고 검거됐다. 그는 다시 징역 15년에 보호감호 10년을 선고 받았다.

그는 밀폐된 특별감방에 수용됐다. 빛 한점 들어오지 않았다. 바깥의 공기라고는 변기 밑으로 뚫려 있는 작은 통풍구를 통해 들어오는 게 전부였다. CCTV가 24시간 그를 감시했다. 그가 반항을 할 때면 한 단계 더 지옥으로 떨어졌다. 등 뒤로 손발을 꺾은 채 묶어서 더 시커먼 방으로 던져넣었다. 대소변도 그 자리에서 해결해야 했고, 밥도 입술과 혀로 핥아먹어야 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목격한 임 목사를 통해 조세형을 처음 만나게 됐다. 절도범들의 변호를 맡으면서 나는 도벽은 범죄 이전에 질병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해서는 안 되는 짓인 줄 모두 안다. 그러나 절도하는 순간의 쾌락 때문에 훔치는 버릇을 못 고치는 병자들이었다. 도벽이 있는 한 어리석은 여자는 평생을 절도에 성공 한번 못한 채 미수범으로 감옥을 드나들기도 했다.

프랑스 작가 장 주네가 쓴 '도둑일기'는 도둑들의 눈으로 인간사회를 형상화한 고전이었다. 작가는 사회에서 거부된 사람들이 다시 사회를 거부하는 행위가 바로 범죄라고 했다. 하나님은 내 앞에 '대도 조세형'이라는 거물을 내가 해야 할 숙제로 보내셨다. 나는 고민하고 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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