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도시락 폭탄, 우리 작은 할아버지 작품이에요"

뉴욕=글·사진 강주화 기자 2015. 8. 15.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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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김홍일 장군 從孫 김명화 권사가 전하는 3대 가족史
김홍일(오른쪽 위)과 백범 김구. 국가보훈처 제공
1952년 강릉 공군 전투비행단에 근무하던 김홍일의 조카인 애국지사 김영재와 그 아내 이신길. 김명화 권사 제공
김명화 권사가 최근 미국 뉴욕 한 식당에서 독립운동가 종조부 김홍일과 애국지사 부친 김영재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종조부 김홍일(앞줄 왼쪽)의 생일에 모친 이신길(앞줄 가운데)과 부친 김영재(앞줄 오른쪽)가 그 자녀인 일곱 자매와 기념사진을 찍었다. 김명화 권사(뒷줄 왼쪽 두 번째)는 일곱 자매 중 둘째다. 김명화 제공

“참 기쁘구나 삼월 하루/ 독립의 빛을 비춰보라/ 금수강산의 삼월 하루/ 대한의 독립이 비친다.” 일제 강점기 임시정부 요인들은 1945년 3월 즈음, 중국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에서 열린 3·1운동 기념식에서 이 가사로 노래를 불렀다. 독립운동가 김홍일(1898∼1980)의 종손(從孫)이자 애국지사 김영재(1911∼1965)의 차녀인 김명화(75·뉴욕장로교회)권사로부터 국민일보가 이 노래를 채록했다.

김 권사는 14일까지 진행된 이메일 문답과 현지 인터뷰에서 “내가 네다섯 살 때 중국 충칭의 임시정부 분들이 삼일절 즈음 주일이면 ‘양황즈’에 모여 이 노래를 불렀다. 평상시에도 자주 불렀다”고 전했다. 가족들은 당시 임시정부 청사를 양옥집의 중국어 발음인 ‘양황즈’로 불렀다고 한다. 그는 “이 노래를 부를 때 염원하던 독립은 이뤄졌으니 이젠 통일을 위해 노래하고 기도하자”고 했다.

종조부 김홍일, 윤봉길 의사에 폭탄 제공

김 권사는 광복군 총사령부 소속이었던 부친과 어머니 이신길 사이에 1940년 중국 쿤밍에서 태어났고 충칭에서 광복을 맞았다. 부산에서 약사로 일하다 1976년 도미했다. 최근 뉴욕의 한 식당에서 만난 그는 이 노래를 경쾌하게 불렀다. “내가 어린 시절 부르던 이 노래를 뉴욕에서 다시 부르게 될 줄은 몰랐네요.” 아이처럼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김 권사는 손자와 손녀 다섯을 둔 할머니다.

그는 충칭의 임시정부 청사 근처에서 소꿉놀이하던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어릴 때 부르던 노래라 그런지 이 나이가 돼도 잘 잊혀지지 않네요. 원래 저희 증조부 김진건은 평북 용천 양시의 부농이었다고 합니다.” 독립협회 일원이었던 김진건은 ‘풍곡제’라는 집안의 서당에서 ‘월남망국사’ ‘미국독립사’ 등과 같은 교재로 독립정신을 고취했다.

김진건의 삼남 김홍일은 1915년 남강 이승훈이 세운 평북 정주 오산학교에 진학했다. 이승훈은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다. 김홍일은 1918년 오산학교 졸업식에서 부친의 부고를 받는다. 교사였던 고당 조만식은 그를 위해 기도회를 연다. “일찍이 하나님은 야곱에게 ‘너는 두려워 말라 너는 내 것이라’ 하셨습니다. … 야곱에게 하신 약속이 김군에 대한 약속이 되게 하소서”라고 고당은 기도했다.

그는 오산학교에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투철한 민족 독립정신을 경험했다. 김홍일의 한 학년 위에 주기철, 그 아래에 한경직 목사가 있었다. 경신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중 일제로부터 비밀결사 조직 혐의를 받아 고문을 받았다. 1918년 신의주를 거쳐 상하이로 망명한 그는 중국 육군강무학교에 입학한다. 중국군에 입대한 김홍일은 1931년부터 상하이에서 무기를 보관하는 병공창에 근무했다.

임시정부 주석이던 백범 김구는 같은 해 일본 요인 암살을 위해 한인애국단을 조직했다. 김홍일은 임정 초기부터 백범과 친분이 있었다. “종조할아버지(김홍일)가 백범 선생의 부탁으로 이봉창 의사에게 수류탄 던지는 법을 가르쳐주셨다고 해요. 윤봉길 의사가 던졌던 ‘도시락 폭탄’도 종조할아버지가 제조해서 백범을 통해 전해드렸답니다.”

1932년 1월 이봉창의 일왕 저격 사건 후 중국 신문들은 ‘한인 이봉창 저격, 일왕 불행부중(不幸不中)’이라고 일제히 보도했다. 불행히도 맞히지 못했다는 것이다. 일제에 대한 중국의 적개심이 드러난다. 윤봉길이 같은 해 4월 상하이에서 해군 총사령관 노무라 중장 등에게 폭탄을 투척했다. 장제스는 “중국 백만대군도 못한 일을 조선 청년 한 명이 해냈다”며 감격했다.

장제스는 임정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고 1934년 중국 육군중앙군관학교에 한인 특별반을 설치했다. 김홍일은 이 군관학교에서 독립군 장교를 양성했다. 그는 1939년 중국군에서 소장으로 진급, 참모처장으로 임명됐고 이태 뒤 사단장이 됐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이 가까워올 무렵 김구 선생이 그를 찾아왔다. “장군이 광복군으로 와줘야겠소.” 김구는 종전에 대비, 김홍일이 광복군 지휘를 맡아 참전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할아버지가 중국군에서 광복군으로 가게 될 때 김구 선생이 장제스 총통에게 양해를 구했다고 해요.”

백범, 부모 김영재와 이신길 중매 서

그의 가족은 한국과 중국의 독립운동을 지도한 김구나 장제스와 모두 가까웠다. “저희 부모님은 김구 선생 중매로 37년 상하이에서 결혼을 하셨어요. 아버지는 숙부인 김홍일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중국군에서 교육받고 항일운동을 하셨던 것 같아요.” 김영재는 김홍일의 큰형인 김홍익의 아들이다. 중국 비행학교에서 훈련받은 김영재는 1935년 중국 공군에 입대, 기계사 직책으로 중일전쟁에 참가했다. 1938년 조선의용대 대장으로 있다 1940년 창설된 광복군에서 활동했다.

“아버지는 장제스 총통이 타는 비행기에서 일하다 나중엔 김구 선생이 있는 충칭으로 와서 일하셨어요.” 국가보훈처는 공훈록에서 김영재가 광복군 총사령부 소속으로 충칭 임시정부에서 요인 경호 등을 맡았고 1945년 미군과 합작해 한국항공대를 창설하려 했으나 광복으로 실현하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그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김홍일은 1948년 귀국 후 국군에 입대해 6·25전쟁 발발 직후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을 맡았다. 그는 후퇴하던 국군을 결집, 3개의 혼성사단을 편성해 한강 이남에 24㎞ 방어선을 구축했다. 맥아더, 김홍일의 지휘로 1주일간 한강 방어선이 유지돼 미 지상군 참전 등 차후 작전이 용이해졌다.

“종조할아버지와는 중국에서 같이 살았고, 저희 가족이 생일축하를 해드리곤 했어요. 할아버지의 세 아들 중 두 분은 소천하고 삼남만 미국에 계십니다. 저희 집안은 조부때부터 모두 신앙을 갖게 돼 아버지도 유아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서울지방보훈청이 올해 6월 말 연 제1회 6·25전쟁 한강 방어선 전투 기념식에서 서울에 거주하는 김씨의 여동생 동화씨가 대신 상패를 받았다.

김홍일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국군에서 그의 별칭은 ‘오성 장군’이다. 중국군 2성과 한국군 3성 계급을 합친 것이다. 자유중국 대사(51), 외무부 장관(61), 신민당 대표(71) 등을 역임했다.

김 권사는 만남 후 이메일에서도 통일을 염원했다. “한국의 발전이 훌륭하고 자랑스럽습니다. 생전에 저희 가족이 염원해온 남북통일을 꼭 보길 기도합니다. 독립처럼 통일도 그렇게 ‘비치리라’ 믿습니다. 통일이 되면 한국이 더 보람된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 교회에 희망이 있습니다. 뉴욕에서의 만남에서 제가 감격스러워 너무 수다스러웠던 것 같네요. 저는 미국에서 한국을 위해 기도하는 한 사람일 뿐입니다.”

뉴욕=글·사진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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