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羅城 6세기 초 쌓아.. 부여는 '계획 도시'였다

부여/허윤희 기자 2015. 6. 1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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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현장 가보니] 무령왕릉에서 나온 묘전과 똑같은 연화무늬 전돌 출토.. 나성, 6C 초 축조됐단 단서 철제 모루도 같이 발굴돼 군사시설물일 가능성 커져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코앞에 두고 경사가 났어요."

12일 충남 부여 나성(羅城) 청산성 구간 발굴 현장. 심상육 백제고도문화재단 책임연구원이 들뜬 목소리로 안내했다.

"여기, 경사면의 기와가 쌓인 층에서 연화무늬 전돌(전통 벽돌)이 나왔고, 저쪽 아래 퇴적층에선 철제 모루(금속판 등을 올려놓고 두드릴 때 사용하는 받침)가 출토됐어요. 그동안 모호했던 축조 시기와 유적의 성격을 알려주는 유물이죠."

◇세계유산 등재 앞두고 관심 뜨거워

부여 나성은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던 사비의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성. 28일부터 7월 8일까지 독일 본에서 열리는 제39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유산 등재를 앞두고 있다.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가 유네스코에 제출한 '백제역사유적지구' 평가 보고서에서 '등재 권고' 판정을 받았다.

ICOMOS가 등재 권고한 유적이 세계유산이 되지 못한 사례는 극히 드물다. 부여 나성을 비롯해 부여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부여 능산리 고분군, 부여 정림사지, 공주 공산성, 공주 송산리 고분군, 익산 왕궁리 유적, 익산 미륵사지가 포함된다. 11일 열린 현장 설명회 때는 백제사 연구자와 전공 학생뿐 아니라 지역 주민들이 몰려올 정도로 관심이 뜨거웠다.

◇"나성은 사비 천도 이전, 6세기 초에 축조"

부여 나성은 부소산성의 북문지를 기점으로 청산성을 거쳐 백마강변까지 약 6.6㎞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다. 백제고도문화재단은 이 가운데 북(北)나성 청산성 구간을 지난 2011년부터 7차에 걸쳐 발굴 조사 중이다.

특히 이번 7차 발굴에서 공주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묘전(무덤을 건축할 때 쓰였던 벽돌)과 똑같은 연화무늬 전돌이 출토돼 주목된다. 절대 연대가 분명한 무령왕릉 벽돌(525년 이전 생산)과 똑같은 전돌이 나왔기 때문에 나성은 6세기 초에 축조됐음을 알 수 있다는 것. 무령왕릉 입구에 놓인 지석(誌石)에는 "무령왕은 523년 5월에 사망해 525년 8월 왕릉에 안치됐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가 538년(성왕 16년)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하기 이전, 이미 나성이 축조됐다는 것이다. 백제의 마지막 수도인 부여는 철저한 계획 도시였다는 의미가 된다.

심 연구원은 "'삼국유사'에 동성왕(재위 479~501년)이 여러 차례 사비로 사냥을 나갔다는 기록이 있는데 당시 사냥은 새로운 수도를 찾기 위한 탐색 과정이기도 했다"며 "사비로 천도할 당시에는 도시 계획이 끝나고 주요 국가 시설물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고 했다.

◇"주변 정세 파악하는 군사시설물"

함께 출토된 철제 모루는 높이 18.5㎝, 무게 32.3㎏에 달한다. 모루는 농기구나 병장기(兵仗器)를 벼릴 때 쓰는 도구. 배병선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은 "그동안 청산성 유적의 성격을 두고 중요 건물의 창고나 제사 유적, 연못지 등 여러 견해가 엇갈렸으나 이번 철제 모루 발굴로 장대(將臺·장수가 주변 정세를 파악해 지휘하던 성내의 시설) 같은 군사시설물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고 말했다.

그는 "부여를 대표하는 건축유산이기 때문에 앞으로 시민과 관광객들이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정비와 복원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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