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무덤은 시간의 단면을 보여주는 '역사의 지문'

송은아 2015. 3. 31.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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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의 만史설문] <55> 큰 무덤 총

"무엇이 보이는가?" 하워드 카터는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눈이 뒤집혔다. 먼지를 뒤집어쓴 채 쌓인 것들은 상상도 못할 큰 보물일 터였다. 1909년 시작한 이 발굴사업의 스폰서 캐너번 경(卿)이 좁은 묘실(墓室)의 문을 밀고 있던 카터에게 소리를 질러댔다. 1922년 이집트 나일강 중류의 역사도시 룩소르 부근 왕가의 계곡은 이렇게 세계의 눈과 귀를 모았다.

도굴꾼의 손을 타지 않은, 고대 이집트의 왕이며 신(神)인 파라오의 무덤이 후대의 인류에게 처음 공개된 순간이었다. 클레오파트라, 람세스 2세와 함께 가장 유명한 파라오인 투탕카멘의 무덤이 싸구려 화가이자 골동품 발굴업자인 영국인 카터에 의해 열렸다. 후원자인 영국 귀족 캐너번이 '돈만 먹지 성과는 없다'며 그날 아침에도 짜증을 내던 터였다.

투탕카멘은 정복왕으로 알려진 잘 나갔던 람세스보다 앞선 시대의 파라오다.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더 대왕이 이집트를 정복하고 세운 그리스계(系) 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이면서 이집트 역사의 마지막 파라오였다. 미인계까지 써가며 거대한 역사의 제국을 지키고자 한 그의 이야기는 여러 갈래의 해석을 통해 널리 회자되고 있다.

이집트고고학박물관 자료 중의 투탕카멘 묘실 한 부분. 석관의 황금가면 안에 파라오 투탕카멘의 미라가 있다. 파라오의 이름은 벽면에 적힌 것처럼 따로 타원형 안에 쓴다.

투탕카멘은 열 살쯤에 즉위하여 다른 왕족과 신관(神官)들에게 휘둘리다 스무살이 채 못돼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럴싸한 사연이나 람세스와 같은 무용담(武勇談)도 없다. 그냥 '살다가 죽은' 투탕카멘이 이리도 유명한 것은 황금가면을 비롯한, 그 무덤에서 나온 유물 때문이다. 물론 그 안에는 마른 송장인 그의 미라(포르투갈어 mirra, 영어로 mummy)도 있었다.

카이로의 이집트고고학박물관에 그 유물들이 있다. 시위(示威)와 진압(鎭壓) 등 이집트의 현재 상황을 보여주는 TV 보도에 늘 등장하곤 하는 나일강 부근 도심 타흐리르 광장 한편의 붉은색 암석 벽돌 건물로 이집트의 대표적 박물관이다.

요즘 금관총, 서봉총, 금령총 등 경주의 고분 이름이 부쩍 자주 들린다. 일제(日帝) 때 일본 관리들이 금관총에서 나온 금관을 기생들에게 씌우며 놀았다는 얘기도 있었고, 서봉총(瑞鳳冢) 이름의 계기였던 스웨덴 왕 구스타프 6세의 후예가 방한했다는 기사도 있었다. 고고학도였던 그를 일제는 1926년 고분 발굴에 참여시켰다. 스웨덴의 한자이름은 서전(瑞典)이었다.

1921년 경주 금관총에서 출토된 국보 제87·88호 금관과 금제허리띠. 잘 보존된 옛 큰 무덤 총(冢)이나 왕릉(王陵)은 결과적으로 역사의 보물을 보존하는 신성한 의미도 지닌다.세계일보 자료사진

국립중앙박물관은 일제가 부실하게 발굴했던 경주의 그 고분들을 다시 발굴하고 있다. 우리 손으로 1973년 발굴한 천마총(天馬冢)을 포함한 왕릉급(級) 옛 무덤들이 제 가치를 활짝 꽃피우기를 기대한다. 발굴은 일면 훼손(毁損)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현대 한국의 고고학자들은 잘 알고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총(冢)은 큰 무덤이다. 어떤 왕을 모신 무덤인지 모르는 경우에 발굴 유물의 특징 등을 활용해 '천마총'과 같이 이름 붙였다. 물론 유물의 기록 등으로 왕의 이름이 밝혀지면 '무열왕릉' 같은 왕릉(王陵)의 이름을 붙인다. '총'과 '릉'이, 품격(品格)이나 뜻이 다른 것은 아니나 그렇게 용어를 구분해 쓰기 시작한 것이 세월과 함께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병마용(兵馬俑) 등으로 아직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진시황릉(秦始皇陵)은 중국 첫 황제의 무덤이다. 용(俑)은 허수아비 또는 인형을 이르는 단어다. 그런 冢이나 陵의 존재는 역사나 고고학의 곳간이면서 또 방아쇠다. 이제까지 알려진 바를 한 순간에 뒤집어버릴 수도 있는 파워를 가졌다.

글로 적힌 역사는 편견이나 의도에 의해 그 줄거리가 구부러질 수 있다. 혹은 이긴 자의 특권으로 작성된 승리 구가(謳歌) 전승담 타입의 일방적인 이야기이기 쉽다. 일제가 우리 역사의 고대사부터 본디를 흔들어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 결과를 아직도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떠받드는 역사 전문가들도 없지 않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중국을 처음 통일한 진시황이 사후(死後)에도 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만들었을까? 수많은 병마용 중 같은 얼굴이 하나도 없다니 그 또한 놀랄 만한 것이다.

왕이나 비중 큰 인물의 무덤이 중요한 이유다. 혼령(魂靈)을 위로하고자 만든 명기(冥器)나 죽은 자가 생전에 쓰던 물건을 껴묻은 부장품(副葬品)이나 여러 기록, 분묘의 형태 등은 고고학의 대상이면서 역사를 바루거나 가멸게 하는 재료다. 시간의 사다리, 즉 역사의 층위(層位)를 보듬어 CT스캐너처럼 그 단면을 후대에 보여주는 '역사의 지문'(指紋)인 것이다.

땅 속에 묻혀 사람들의 접근이 어려웠기 때문에 옛날의 사물들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도 옛 무덤 덕분이다. 경주나 부여, 나주 등 역사도시는 지금도 어디를 파더라도 뭔가 나온다고들 얘기한다. 서울도 마찬가지다.

무덤 안의 그 신비는 때로 공포(恐怖)가 된다. 괴기영화의 무대나 소품이 되어 대중들에게 소비되는 것이다. 투탕카멘 발굴의 자본주였던 캐너번은 발굴 직후 의문의 죽음으로 '투탕카멘의 저주'라는 제목을 언론에 제공했다. 우리의 '월하(月下)의 공동묘지'도 비슷한 주제겠다.

그 총(冢)들을 다시 살피는 작업이 끝나면 우리는 더 많은 역사를 안을 수 있을 것이다. 역사는 과거이기도 하지만, 미래를 예비하는 인류만의 자산이다. 또 존재의 뜻이다. 새기고 살아야 하는 보람이자 의무인 것이다. (옛)무덤은 공포의 대상이 아닌, 벅찬 호기심의 보물창고다.

강상헌 언론인·우리글진흥원 원장

총(塚)이라고도 쓰나 총(冢)과 같다. 옛 (동아시아의) 무덤치고 흙을 쌓지 않은 것이 없었다. 흙 토(土) 글자가 부속품으로 붙지 않아도 冢은 흙을 높이 쌓아올린 뫼였으며, 언덕이고 산꼭대기였다. 높은 사람의 무덤은 일반 민초들의 무덤보다 더 높이 흙을 쌓아야 했다.

큰 무덤 총(?)의 금문(金文)과 전문(篆文). 이 옛 글자는 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자료=민중서림 '한한(漢韓)대자전' 삽화

흙을 쌓은 언덕을 가리키던 冢이 큰 무덤이 되고 산이 된 인연이겠다. '높이 쌓는다'는 뜻에서 높다 또는 크다는 뜻이 번져나왔다. 총군(?君)은 '임금님'을 높여 부르는 말이었고, 총경(冢卿)은 조정 대신들을 이르는 말이었다. 冢이 큰 무덤임을 뒷받침하는 재료다.

冖[멱]은 '덮는다'는 동작의 모양을 그린 그림의 디자인으로, 글자를 나타내는 자(字)의 집 면(宀)과 비슷한 이미지다. 冢의 옛글자에는 冖 대신 포장한다는 뜻의 포(勹) 였다. 축(豕)은 발을 묶은 돼지의 그림이다. 둘을 합친 글자 冢은 '희생물을 싸서 바치고 그 위를 덮는 무덤'이라고 문자학은 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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