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삼열의 꿈' 숭의학원 평양에 재건할 그날까지.. 숭의학원, 내달 9일 숭의마펫기념교회 헌당예배

2015. 3. 31. 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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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한경직 목사 "통일 되면 마포삼열이 세운 숭의학원 평양에 재건해 달라" 뜻 좇아

"통일이 되면 꼭 평양에 숭의학원을 재건해주세요." 고(故) 한경직 목사가 백성학(영안모자 회장) 전 숭의학원 이사장에게 남긴 유지(遺志)다. 숭의학원의 모태는 새뮤얼 A 마펫(마포삼열·사진) 선교사가 1903년 평양에 세운 숭의여학교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일제의 모진 탄압을 받아 38년 문을 닫았다. 숭의여학교 동문들은 광복 직후 평양에 학교를 재건하려 했지만 북한 공산화로 무산됐다.

그러나 그 꿈은 마펫 선교사의 영적 제자인 한 목사의 가슴 깊숙한 곳에 남았다. 한 목사는 마펫 선교사가 세운 자작교회에서 복음을 접하고, 마펫 선교사가 설립한 진광소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한 목사는 58년부터 99년까지 숭의학원 이사를 지냈고, 68년 '마펫 선교사 기념사업회'도 설립했다.

백 전 이사장은 한 목사의 당부를 항상 기억했고, 아내인 윤순희 현 숭의학원 이사장에게도 전했다. 윤 이사장은 '북한에 숭의학원과 교회를 세우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자'는 뜻에서 지난해 12월 사재(私財)를 들여 서울 중구 소파로 숭의여대 본관 옆에 숭의마펫기념교회를 완공했다.

30일 숭의마펫기념교회 입구로 들어서자 새뮤얼 A 마펫(마포삼열) 선교사의 활약상이 담긴 사진들이 눈에 띄었다. 1891년 평양의 한 거리에서 자신을 둘러싼 인파를 상대로 전도에 열을 올리거나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사경회에서 예배당을 가득 채운 성도들에게 인사하는 모습 등 그가 일조한 초기한국교회의 역사적 순간들이 일렬로 전시돼 있었다.

140석 규모의 예배당은 장대현교회의 모습을 재현하고자 한옥 건축에서 사용하는 서까래를 이용해 지붕을 올렸다. 교회 한쪽 벽에는 윤 이사장의 기도가 새겨진 동판이 걸려있다.

'111년 전 마펫 목사님을 통해 평양에 세워졌던 숭의여학교가 이곳 남산 터 위에 다시금 재건되어 하나님의 크신 은혜 가운데 지금까지 인도하시고, … 이 터 위에 마펫 목사님을 기념하는 교회를 건축해 하나님께 드립니다.'

숭의여대 이승원 총장은 "숭의마펫기념교회에는 한 목사의 유지를 받들어 평양에 학교를 재건하겠다는 다짐과 마펫 선교사가 남긴 업적을 기리고, 그가 추구한 사역을 계승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고 밝혔다.

마펫 선교사는 1890년 미국 북장로회에서 한국선교사로 파송된 이후 기독교 교육과 목회자 양성에 선구적인 업적을 남겼다. 미국 선교사 대부분이 서울에 머물던 시절 그는 북녘으로 향했다. 평양을 중심으로 숭의여학교와 숭실전문학교, 숭실중학교를 세웠고 장로회신학대와 총신대의 전신인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설립했다. 1000여개 교회도 세웠다.

마펫 선교사는 신앙인으로서 항일운동에도 적극 동참했다. 이 총장은 "마펫 선교사는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애국지사들이 투옥되자 '이 사건은 날조사건이며 비인도적인 고문이 자행되고 있다'는 항의문을 조선총독에게 전달했으며 일제의 만행을 미국 장로회본부에 보고해 국제여론을 환기시켰다"고 말했다.

한국의 독립을 위한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숭의여대 교목 정준희 목사는 "마펫 선교사는 1920년 4월 동아일보에 기고문을 보내 '금일 조선에 가장 유망한 점은 조선 민중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전에 호응함이니 그리스도의 복음은 독립적 정신을 가지게 하며 민중의 복리를 위하여 노력하며 정의를 위하여 튼튼히 설지라'라며 자신의 소명을 밝혔다"고 말했다.

이 같은 행동은 그가 교장으로 있던 학교에도 자연스레 영향을 끼쳤다. 숭의여학교 교사와 졸업생, 재학생들은 1913년 항일 비밀결사조직인 '송죽회(송죽결사대)'를 조직하고 독립투사들의 국내외 활동비를 지원했다. 3·1운동 때는 밤새워 태극기를 그린 뒤 만세운동에 앞장섰으며 교회에서는 여성계몽운동을 펼쳤다.

정 목사는 "일본은 성경과 종교 과목을 폐지하라고 압력을 가했지만 마펫 선교사는 끝까지 거부하고 전도사업을 고수했다"며 "1932년 장로교 총회에서 일제의 압력에 맞서 신사참배를 거부할 것을 결의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마펫 선교사는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1938년 숭의여학교 등을 폐교해야만 했다. 그는 일제로부터 추방명령을 받고 미국으로 귀국, 1939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몬로비아의 한 주택에서 숨을 거뒀다.

마펫 선교사는 떠났지만 그가 뿌린 복음의 씨앗은 고스란히 싹을 틔웠다. 해방 후 남쪽으로 이주한 숭의여학교 동창들은 숭의재건위원회를 발족하고 1953년 재단법인 숭의학원을 설립했다. 이듬해에는 일제 강점기때 조선신사의 본거지였던 남산 경성신사터에 숭의보육학교를 세웠다.

정 목사는 "신앙의 양심에 따라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자진 폐교를 결정했던 학교가 일본의 대표적 신사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다시 세워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숭의학원은 이후 숭의여자중·고등학교와 숭의여대, 숭의초등학교를 추가로 설립했다. 숭의학원 외에도 마펫 선교사가 세웠던 학교들은 모두 재건됐다.

숭의학원은 숭의마펫기념교회를 통해 마펫 선교사의 꿈을 실현할 계획이다. 정 목사는 "숭의마펫기념교회는 헌금의 10%를 통일 후 북한에 학교와 교회를 재건하기 위한 기금으로, 60%를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 사용할 계획"이라며 "마펫 선교사의 숭고한 삶을 좇는 이 믿음의 씨앗이 훗날 북한 땅에 아름다운 결실로 이어질 것이라 믿는다"고 말했다.

숭의마펫기념교회 헌당예배는 다음 달 9일 열리며 이 자리에는 마펫 선교사의 손자 등 유족도 참석할 예정이다.

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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