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교육 선구자, 아펜젤러] (20·끝) 아펜젤러 가문의 한국사랑

2015. 3. 31. 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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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젤러 아들·딸도 한국 위해 고군분투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를 비롯한 선교사 1세들이 조선 정부의 금교 정책 속에서 복음 전파를 위해 힘을 쏟았다면 2세는 일제의 기독교 통제라는 상황에서 복음 전파와 한국인의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했다. 아펜젤러의 아들, 헨리 닷지 아펜젤러는 일제의 감시로 배재학교 운영에 숱한 어려움을 당했어도 20년 동안 견디며 교장직을 지켰다. 하지만 1937년 중·일 전쟁과 미·일 통상조약에 금이 가면서 일본은 독일,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고 미국과 적대관계로 돌아서면서 국내 미국 선교사들은 점점 설자리를 잃었다.

헨리는 1940년 9월 30일 아침 조회를 끝으로 교장직을 내려놓고 이화여자전문학교 6대 교장이었던 누이 엘리스 레베카 아펜젤러와 함께 11월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헨리는 미국으로 추방당하는 날 한국을 잊지 못해 한국과 제일 가까운 곳에 위치한 하와이 호놀룰루제일교회에서 담임 목회를 했고, 엘리스는 스카릿대 교수로 재직했다.

엘리스 레베카 아펜젤러의 선교활동

엘리스 레베카 아펜젤러는 1885년 11월 9일 한국에서 태어난 최초의 외국인으로 아펜젤러의 장녀이다. 그녀의 탄생은 아기를 좋아하는 한국인들의 발걸음을 자연스럽게 아펜젤러의 집으로 인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 인해 아펜젤러는 엘리스에게 '타고난 선교사'라는 의미로 남다른 애정을 표했다. 그녀는 한국에서 자랐고 아펜젤러의 2차 안식년에 미국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후 미국 최고 여자대학인 매사추세츠 주 웰즐리대학(Wellesley college)을 졸업했다.

최고의 교육을 받아 미국에서 장래를 보장 받았음에도 엘리스는 한국 선교를 위해 기꺼이 몸을 바쳤다. 그는 1915년 이화학당 교사로 봉사를 시작했고 1925년 이화여자전문학교의 교장으로 섬겨 지금의 서울 신촌 캠퍼스의 토대를 마련했을 뿐 아니라 이화학당을 이화전문학교와 이화보육학교로 만들었다.

신촌 캠퍼스로 이전하는 구상은 이화학당을 방문했던 그레이 부인이 엘리스의 헌신과 권유에 감동되어 후원을 약속했고 이를 계기로 캠퍼스가 이전되면서 실현됐다. 뿐만 아니라 후원을 받기 위해 선교회 본부를 찾아가 일일이 설득하는 노고와 미국 강연 등으로 모금 활동을 주도했다.

엘리스는 1922년 YWCA의 설립을 위해 정신여학교 교사 김필례와 이화학당 교사 김활란을 연결하는 등 여성 교육과 복지를 위해 노력했고, 여권 신장을 위해 관심을 가졌다. 특히 조혼의 폐지를 위해 여성들의 교육을 장려했고 '하나님이 여성에게 주신 위치는 남성의 동료이자 배우자로서 나란히 있는 자리'라는 신념 아래 이화학당을 전문학교로 만들었다.

한국통 아펜젤러 남매의 순직

헨리와 엘리스. 이들은 해외에서 한국을 위해 기도하던 중 갑자기 찾아온 한국의 해방 소식에 감격했다. 하와이에서 제일 크고 역사가 깊은 교회의 담임목사로 있던 헨리와, 교수로 재직 중이었던 엘리스는 그의 말년을 안정적으로 마감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해방 소식을 하나님의 부르심과 소명으로 받아들였다.

엘리스는 해방 후 종합대학의 인가를 받은 이화여자대학교의 발전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1950년 2월 20일 대학 채플에서 설교 도중 뇌일혈로 쓰러져 순직했다. 그녀의 유해는 지금 서울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어 있다. 헨리는 호놀룰루제일교회의 담임직을 내려놓고 미군청정 경제고문관으로 배재학교를 위해 재단이사로 참여해, 4년 동안 배재의 복구를 위해 봉사하다 귀국하여 안식년을 보냈다. 6·25전쟁 중에는 기독교세계봉사회 한국 책임자로 내한하여 기독교 재건과 복구사업을 위해 지원했고 미국 연합감리회 총회에 한국교회의 재건을 위해 호소했다. 배재학교의 지원과 협력에도 소홀하지 않아 피란 중에 부산에 피란학교를 설립하는 일과 전쟁고아를 돌보았다.

전쟁의 위협도 그의 열정을 쓰러뜨리지 못했지만 1953년 가을 백혈구 부족으로 미국 뉴욕으로 요양을 떠났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그해 12월 1일 향년 64세로 별세했다. 그는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도 유언처럼 "내가 죽으면 미국이 아닌 한국 땅에 묻어 달라"는 말을 남겼다. 그의 한국 사랑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준다.

하나의 밀알이 된 아펜젤러 가문

올해는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한국에 선교를 시작한 지 130주년이 되는 해이다. 마침 4월 5일은 주일이자 부활절을 맞는 뜻 깊은 해이다. 아펜젤러 가문이 한국에 선교를 시작하면서 우리에게 몸소 보여주었던 모습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인간의 뜻을 버리고 자신을 비워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갔던 삶 속에 그 가문이 했던 수많은 업적은 하나의 밀알에 불과하다. 교단의 분열과 갈등, 선교사의 업적을 우열 가리 듯 살펴보는 모습 속에 이들의 삶이 한국의 기독교인에게 던지는 한마디는 이들의 희생을 마음속에 간직하여 살아내라는 것이다.

한국 기독교가 130주년을 맞이하며 뜻 깊은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업적에 치중하는 것보다 이들이 살았던 정신과 삶을 되새기고 간직해 한국 사회에 열매를 맺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소요한 명지대 객원교수·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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