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후 조선인 8000명이 짓밟혔다, 중국인에게

유석재 기자 2013. 3. 13. 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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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휘탁 교수, 중국 자료 분석.. '만주 학살' 연구 결과 내놔

"중국인 무장 집단은 마을을 샅샅이 훑으며 식량·돈·옷가지 등을 빼앗거나 반항하는 사람들을 무차별 폭행·살해했고, 부녀자들을 겁탈했다. …조선인 부녀자들은 겁탈을 피하기 위해 얼굴에 숯 검댕이 칠을 하거나, 가족 전체가 밭에 숨어 모기에 뜯기면서 밤을 보내기도 했다."(만주 이민 조선인들의 증언)

1945년 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약 3년 동안 만주(滿洲) 지역에서 중국인에 의해 조선인 사상자가 8000명 발생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학살의 원인은 일제 괴뢰국인 만주국이 조선인과 중국인을 이간질하는 정책을 편 데 있었다.

윤휘탁 한경대 교수는 '한교사무(韓僑事務)' '동북복원계획강요초안' '중국조선족 이민실록' 등 중국 측 자료를 분석한 결과, 당시 만주의 조선인이 주로 국민당 측 중국인들로부터 큰 핍박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12일 밝혔다. 1945년 종전 직후 국민당 군대가 점령한 지역에서 조선인 176명이 사망했고 1866명이 부상당했으며, 3468명이 구금, 320명이 강간을 당했다는 것이다. 1947년에는 조선인 2042명이 맞아 죽거나 부상당했고 8468명이 체포됐다.

윤 교수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이 시기 만주에서 살해당하거나 부상당한 조선인은 모두 8000명에 이른다"며 "통계에 잡히지 않은 산간벽지와 공산당 점령 지역까지 포함한다면 실제 살해당한 사람은 더 많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인의 피살 이유는 당시 이 지역 중국인들의 조선인에 대한 적개심 때문이었다. 만주국을 통해 이 지역을 통치하던 일제는 배급에 차이를 두는 등의 방법으로 일본인을 '1등 공민(公民)', 조선인을 '2등 공민', 중국인을 '3등 공민'으로 인식시키는 차별 정책을 썼다. 실제로는 조선인을 차별하면서도 이런 식의 분류법을 사용함으로써, 중국인들이 조선인을 '일본의 앞잡이'로 여기게 됐다는 것이다.

전쟁이 끝나자 중국 국민당군과 지방군·비적 등 무장 세력은 조선인 마을을 자주 습격했다. 셰원둥(謝文東)이란 자가 이끄는 무장 집단이 한 조선인 마을 사람을 모두 살해한 경우도 있었다. 1946년 5월 북만주에서 일어난 '둥안(東安)·미산(密山) 사건'에서는 조선인 100여명이 국민당 정규군에게 살해당했다. 이 지역 조선인이 중국공산당에 우호적인 입장이 됐던 데는 이 같은 국민당 측의 탄압이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윤 교수는 "광복 직후의 정국이 워낙 난리통이었기 때문에 이 일이 국내에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고, 자료도 적어 지금까지 연구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일제가 '복합민족국가'라고 주장했던 만주국은 여러 민족이 자아 정체성 없이 서로의 모순을 안고 모인 국가였다"고 했다. 윤 교수는 이 내용을 담은 연구서 '만주국: 식민지적 상상이 잉태한 복합민족국가'를 이날 출간했다.

허동현 경희대 한국현대사연구원장은 "그동안 학계에서도 모르고 있던 사건으로, 새로 발굴한 자료를 통해 실증적으로 밝혀냈다"고 평가하며 "국제적 시야의 한국현대사 연구에서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 만주국이란?

1931년 만주사변 후 일제가 현재의 중국 동북지방에 세운 괴뢰 국가. 1932~45년 존속했으며,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 푸이(溥儀)를 황제에 앉히고 신징(新京·지금의 창춘)을 수도로 삼았다. 현재 중국에서는 만주국이란 표현 대신 '웨이만(僞滿·가짜 만주국)'이란 표현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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