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입니다>"통큰 전두환, 유일하게 100만원 수표 쾌척"

박민기자 minp@munhwa.com 2011. 4. 29.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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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악사'.. 아코디언 거장 심성락

아코디언이 울었다. 그건 단순한 연주가 아니었다. 기계적으로 설계된 악기의 소리를 정해진 악보에 따라 불러내는 것이 아니었다. 벨로스(바람통)를 신축하는 셈여림의 미세조정이 서로 다른 굵기의 리드(금속관) 5개를 번갈아 통과하자 '사람의 소리'가 울려나왔다. 아코디언이 자유자재로 표현한다는 반음계를 넘어 악보로 표현할 수 없는 음계의 소리들이 살짝 늘어지다 유려하게 꺾어지기를 반복했다. 그 범상치 않음에 문외한의 귀가 쫑긋해졌고 텅빈 무대와 객석은 이내 충만해졌다.

[인터뷰=박민 전국부 부장]

지난 27일 오후 아코디언 거장 심성락(75) 선생을 서울 중구 충정로 1가 문화일보홀로 모셨다. 인터뷰 사진 촬영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전날 발목을 심하게 다쳐 아코디언을 메고 무대에 서있는 모습을 담기는 어려웠다. 결국 무대에 걸터앉아 포즈만 취하기로 했는데 건반 위에 올려놓은 그의 손가락이 춤추기 시작했다. 10여분의 연주가 끝나자 무슨 곡인지도 모른 채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그런데 본격적인 인터뷰를 위해 편집국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음악을 접은 지 6개월이 넘었다"고 말했다. 뒤통수를 한대 맞은 듯 얼떨떨했다.

―아니 무슨 말씀이세요. 지난해 음악인생 50년만에 선생님 이름으로 첫 공식 앨범을 발표하신 뒤 '무대에서 연주하다 쓰러지고 싶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모두들 50년씩 음악한 사람이 왜 갑자기 그만두겠다고 그러느냐고 의문을 가지더라고요. 그런데 솔직히 내가 하기 싫으면 그만두는 거 아니겠습니까."

―50년 하던 음악이 갑자기 싫어지신 이유가 있을 것 아닙니까.

"저는 연주료가 싸면 자주 찾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돈이 아까우면 찾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1년에 한번만 불러도 나를 제대로 평가하는 사람들을 위해 연주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직감적으로 '지난해 앨범 발표 과정에 문제가 있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바로 관련 질문을 할 수 없었다. 그는 다짐을 하듯 덧붙였다.

"아코디언도 처분했습니다. 아는 사람에게 아코디언을 팔겠다고 했더니 자기가 살테니 다른 데 팔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연주를 계속하고 내가 죽으면 그때 가져가겠다고 하고 돈을 미리 줍디다."

―50여년을 이름을 내세우지 않고 음지에서만 음악을 하다가 마침내 지난해 공식 앨범을 통해 평가를 받으신 것 아닙니까.

"내가 음지에서 음악했다고 하는데 나는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무대에 서는 게 양지가 아닙니다. 누가 보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지만 녹음실에서 악보에 따라 최선을 다해 연주를 하는 그 자리가 바로 양지입니다. "

6개월간 봉인해뒀던 음악에 대한 열정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음악인생에 대한 회고가 이어졌다. 경남고 재학중 악기상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처음 아코디언을 접해 일을 시작으로 청소년 시절이 숨가쁘게 전개됐다.

―본격적으로 프로 연주가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언제부터입니까.

"부산에서 활동하다 1969년인가 서울스튜디오에서 아코디언 파트를 맡았던 경남고 선배 권창호씨가 미국으로 떠나면서 그 자리를 물려받았습니다. 이후 TV방송에 아코디언 연주자로 픽업도 됐고 미군부대도 1주일에 3∼4번씩 나갔습니다."

―그때부터 연주를 하셨으면 엄청나게 많은 가수들의 음반제작에 참여하셨을 텐데 최고의 가수로 누굴 꼽으시겠습니까.

"우리나라 가수치고 제가 한곡이라도 연주 안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그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남자 가수는 나훈아씨입니다. 나훈아씨는 녹음을 하든, 방송을 하든 음표 하나하나에 온 정성을 다 쏟습니다. 한 소절 단위로 대충 부르는 가수나 댄스에 묻어가는 가수와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여자가수로는 역시 이미자씨입니다."

―음지로 불리는 녹음실이 양지라고 하셨지만 이름이나 얼굴을 알리고 싶다는 욕심은 없으셨습니까.

"옛날부터 제 이름이나 사진을 내고 싶다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꾸 뒤로 빠지고 싶어했습니다. 지난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라는 앨범을 내자고 했을 때도 저는 '왜 내려고 하느냐'고 반문했습니다. 단독앨범이다, 정규음반이다고 하는데 다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이 연주를 했으면 그게 다 정규앨범 아닙니까."

―앨범 발매와 관련, 문제가 있었습니까.

"광고음악 감독인 K모씨 제의로 만들었는데, 선곡 과정이나 음원을 가져다 쓰는 과정, 음반판매 수입에 따른 정산 과정 등에 문제가 많았습니다. 그런 일을 겪고 나니까 음악 자체에 회의가 들더군요."

―연주생활을 하시면서 역대 대통령들과 인연을 맺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악사를 하셨다고 하던데.

"박 전 대통령이 아니라 JP(김종필 당시 총리)부터 만났습니다. 작곡가 이봉조씨가 일본에서 전자오르간을 사서 JP에게 드렸는데 사용법을 알고 싶어서 저를 불렀습니다. 녹음을 하고 있는데 총리공관에서 전화가 와 오후 7시까지 무조건 총리공관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정치적으로 어땠는지 모르지만 인간적으로 JP는 참 존경스러운 양반이었습니다. "

―어떤 점이 존경스러웠습니까.

"행동 하나하나 보고 있으면 난 저렇게 못할 텐데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 전 대통령과는 어떻게 만났습니까.

"JP 생일날 박 대통령이 총리공관으로 오셔서 처음 봤습니다. 당시 박 대통령께 노래하시라고 하니까 '아아 으악새 슬피우니'로 시작하는 '짝사랑'을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키를 몰라 우물쭈물하고 있으니까 박 대통령께서 음악교사를 하셔서 그런지 상황을 눈치채고 "F마이너로 하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F마이너는 너무 낮아 부르기 힘들지만 하라고 하니까 반주의 볼륨을 최대한 낮춰 연주를 했습니다."

―궁정동 안가에는 언제 들어가셨습니까.

"그로부터 한 1년쯤 지나고 나서인 것 같습니다. 궁정동 안가에 갔더니 경호실 키 작은 양반이 '내일은 각하가 나오시는데 악수를 하도록 돼있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미리 짜여져 있느냐고 물었더니 '대통령 손 아무나 잡습니까'라고 대답하더라고요. 그러더니 '원래 사진은 유출 안되는데 심 선생은 음악하는 양반이어서 사진을 찍어줄테니 가보로 간직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다음날 갔더니 대통령은 안오시고 차지철 경호실장이 대신 왔습니다. 참석자들이 대부분 군인이었는데 '무슨 노래를 연주할까요'라고 물으니 새마을노래, 충정가 등이 적힌 악보를 주면서 '심 선생이 알아서 시간을 메워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노래를 천천히 연주했는데 재미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박 대통령이 좋아하는 가요를 클래식처럼 연주했습니다. 차 실장이 어떤 사람과 칵테일을 마시고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런데 차 실장이 발로 템포를 맞추고 있었습니다. 조금 빨리 연주를 했더니 발 움직임도 빨라졌습니다. 박 대통령이 좋아하는 노래니까 차 실장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음날인가 박 대통령이 오신다고 했는데 또 차 실장이 대신 왔고 연회가 일찍 끝났는데 그날인가 그 다음날 궁정동 사건(10·26)이 났습니다."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재임시에도 궁정동에 갔습니까.

"두분들은 박 전 대통령시절부터 저를 봤으니까 아랫사람들이 알아서 저를 불렀습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어땠습니까.

"호방한 성격이었습니다. 술 한잔 하면 거의 다른 사람 칭찬을 했습니다. 한번은 노신영 총리의 자녀 교육을 칭찬했습니다. 노 총리가 자식들과 편지를 주고 받는데 외국생활 하던 애들이어서 영어를 섞어 편지를 쓰기도 했는데 그럼 편지를 다시 보내라고 했다고 하더라고요. 노래도 종종 했는데 전직 대통령 중 유일하게 노래를 하신 뒤 주머니에서 100만원짜리 수표를 꺼내 오르간 옆에 올려주신 적이 있습니다, 장세동 경호실장이 저와 동갑인데 '받을 수 없으니 비서실에서 보관해달라'고 했더니 '각하가 개인적으로 주신 거니까 받으라'고 했습니다."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은 사이가 좋았습니까.

"전 전 대통령이 노 전 대통령에게 물려주기까지 저도 어느 정도 감을 잡아서 알고 있었는데 친구간에 잘 되는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전 전 대통령이 백담사까지 가는 걸 보면서 (노태우씨에 대해) 대통령이 됐지만 제 마음으로는 당신을 존경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

―박정희 전 대통령 악사를 하실 때 차지철 경호실장이 금일봉을 많이 줬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런 일 없습니다. 총무비서관이 정해진 액수를 주었는데 50만원대였습니다. 당시 저는 궁정동에 프리패스로 들어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민간인이어서 제 포니 승용차에 탤런트나 가수들을 태워주곤 했습니다. 한번은 청와대 비서관과 덕수궁 앞에서 모 여자가수를 기다렸는데 약속시간이 돼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차안에서 비서관과 대화를 나눴는데 '불만이 없느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개런티가 너무 적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날 바로 개런티를 두배로 줬습니다."

구중심처의 이야기는 너무 흥미로웠지만 한국 아코디언의 최고봉을 만난 이상 정치야사에 대한 질문은 접어야 했다. 인터뷰를 시작한 지 3시간이 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 선생님의 음악은 앞서 소리를 내기보다 다른 음과 조화를 이루는 데 더 역점을 둔다는 평이 있습니다.

"언론에 너무 각색이 돼 나왔습니다. 전 50년 동안 제 고집대로 했을 뿐입니다. 녹음실이 양지고, 음악하는 사람으로서 최고의 자리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다 부질없는 일 같기도 합니다."

다시 그 허탈감이 그의 가슴에 고여들고 있었다. 수구초심. 아코디언의 매력을 물었다.

"누가 어떤 음악성을 가지고 연주하느냐에 따라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납니다. 젊었을 때 아코디언 소리가 그렇게 좋았습니다. 그 음색이나 테크닉이 그냥 좋았습니다. 제 생각에 건반악기로 할 수 있는 최고의 연주를 아코디언으로 해냈다고 자부합니다."

―가수 최백호씨가 대표를 맡고 있는 한국음악발전소에서 심 선생님에 대한 헌정공연을 오는 6월26일 개최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단한 후배가수들이 기꺼이 출연한다고 하는데 어떠십니까.

"처음엔 헌정공연의 의미를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주변에서 대중음악계에 기여한 공로를 후배가수들이 기리기 위한 것이라며 대단한 영광이라고 하더군요. 정말 제가 그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후배들을 위해 한마디 해달라는 말을 끝내 거절했다. 형식적인 덕담을 남길 수 있지만 그럴 마음도, 의욕도 없다고 했다. 그는 다시 음악을 하지 않겠다고 재차 다짐했지만 3시간 30분이 넘는 인터뷰에 응하는 그에게서 음악에 대한 식지않는 열정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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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입니다>심성락 선생은… 오른손 새끼손가락 절단·난청 극복하고 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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