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말 아닌 우리말로 학문합시다"

2010. 10. 6.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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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우리말 학문' 고민하는 '우학모' 학자들

말은 사고를 규정하는 프로그램제나라 말로 생각·세계 다듬어야최근 영어가 학문어로 자리잡아노예의식 발로…주체성 필요해

우리 역사에서 말과 글이 일치했던 시기는 해방 뒤 지금까지 단 두 세대 동안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우리 생활에 오래 뿌리박은 한자어와 일본어의 영향으로 말글의 일치를 제대로 이뤄냈다고 자랑하긴 어렵다. 남의 것을 받아들여 지식으로 삼아왔던 학문 영역이 특히 그렇다. 개념을 가리키는 말들은 외래어투성이고 이를 해석하고 풀이한 말들은 한자어투성이라, 쉽게 이해할 수 없다는 지적이 많았다.

지난 5일 서울 강남역 근처에서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우학모) 소속 네명의 학자들을 만났다. 2001년 만들어진 우학모는 '남의 말'을 우리말로 고쳐 그 뜻을 제대로 새기고, 우리말에서 비롯되는 학문을 펼치기 위한 노력을 주로 기울여온 단체다. 현재 회장을 맡고 있는 최봉영 한국외대 교수(철학)는 철학과 한국학을 접목한 새로운 인문학 찾기에 몰두해왔으며, 전 회장인 정현기 세종대 교수(국문학)는 우리말로 된 비평이론을 연구해왔다. 유재원 한국외대 교수(그리스어)는 국내에 독보적인 그리스 연구가로서 학문의 주체성을 강조해왔으며, 구연상 숙명여대 교수(철학)는 철학이란 말을 '슬기 맑힘'으로 풀이하는 등 우리말로 된 개념어 찾기에 초점을 맞춰왔다.

우리말로 학문하기에 대한 이들의 고민은, 단지 '한국사람이면 당연히 한국말을 써야 한다'와 같은 당위적인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말은 생각을 규정하는 프로그램과 같기 때문에, 말을 따지는 문제는 학문의 본질을 따지는 문제와 맞닿는다고 한다. 서양인들은 근대로 넘어오면서 제나라 말을 바탕으로 삼아 생각의 세계를 묻고, 따지고, 풀어서 학문의 세계를 열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들이 만든 것을 받아서 쓰느라 제 나라 말로써 생각을 다듬지 못했다는 것이다.

최봉영 교수는 "남의 말로 할 때에는 흐릿하던 생각이, 우리말로 할 때에는 뚜렷해지기 마련"이라며 '배울 학'(學)을 사례로 들었다. '배우다'라는 말이 '배다'(스며들다, 버릇이 되어 익숙해지다)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따진 뒤에야, 학문·학습 등 추상적이기만 한 한자어의 뜻을 제대로 새길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우리말은 독창적인 생각을 다듬게 한다. 겉으로는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알아내는 행위를 뭐라고 해야 할까? 껍데기를 '깨어서' 본질에 '닿는다'는 뜻으로 '깨닫다'라는 탁월한 표현이 있다. 독창적인 우리말인 '화병'이 서양 의학계의 관심을 모았던 것처럼, 우리말에 바탕을 둔 생각들을 더욱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말로 학문하기는 학문의 주체성 회복과 연관된다. 그리스어로 박사 논문을 쓴 유재원 교수는 "말은 '누구를 위한 학문이냐'를 결정한다"고 말했다. 한국인인 자신이 그리스어로 쓴 논문은 그리스어를 생활어로 쓰는 사람들을 위한 학문이 되지만, 한국어로 쓴 논문은 한국어를 쓰는 사람들을 위해 쓰인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한문이 지배계층인 사대부를 위한 학문으로 쓰였고, 일제 강점기 때 일본어가 제국주의를 위한 학문으로 쓰였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라고 한다.

한자어나 일본어가 아직도 우리 학문언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현상에 대해 정현기 교수는 "우리 학문이 우리말을 생활언어로 쓰는 민중들을 위한 학문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라며 "기득권층의 노예의식을 깨야 한다"고 비판했다. 우리말을 제대로 써보지도 않고 우리말에 대해 '개념어가 빈약하다', '학문에 적합하지 않다' 등의 왜곡된 평가를 내리는 습관 역시 그런 노예의식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지금 우학모의 가장 큰 걱정은 우리 사회에 몰아닥치고 있는 '영어 광풍'이다. 영어로 쓰여진 국제학술지 등재 논문이 아니면 아예 제대로 취급도 하지 않는 국내 학계의 풍토가 학문어로서 우리말을 사라지게 만들 것이란 걱정이다. 대학사회에 영향력이 큰 <조선일보>가 영국의 대학평가 회사인 큐에스(QS)와 함께 지난해부터 펼치고 있는 대학평가의 내용을 보면, 한국어 논문은 아예 점수를 받지 못하는 구조로 이뤄져 있다. 유재원 교수는 "영어를 쓸 줄 아는 지배계층과 그렇지 않은 피지배계층이 나뉘고 있다"며 "조선시대 한자를 아는 사대부와 그렇지 않은 민중들이 갈렸던 것과 무엇이 다르냐"고 반문했다.

구연상 교수는 "영어로 쓰는 논문은, 학문 자체의 필요성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업적을 평가받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며 "진정한 국제화를 바란다면, 영어로 논문을 쓰라고 강요할 것이 아니라 우리말 학문과 그에 걸맞은 번역을 제대로 대접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우리말 강조를 국수주의로 몰아갈 것이 아니라, 우리말을 통해 누굴 위해 어떤 학문을 할지 돌아보자는 얘기다. 또 지난 9년 동안 우학모가 스스로의 공부에 치중했다면, 앞으로는 대중적으로 우리말 학문의 확산에 앞장설 것이라고 밝혔다.

우학모는 9일 한국외대에서 '한글날 기림 말나눔잔치(학술대회)'를 연다. 우리말의 힘과 생산성을 주제로 삼아, 학술어와 일상어 그리고 외국어가 제대로 어울리는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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