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석의 언어학 카페 말들의 모험] <7> 촘스키 혁명

2009. 11. 8.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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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자연언어들 속에서 촘스키는 '보편문법' 수립 시도변형생성문법 전세계 언어학 풍미… '다른 생각' 이론가도 좌표로 삼아

소쉬르 얘기를 여러 차례 했으니, 오늘 하루는 겉핥기로라도 촘스키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군요. 촘스키는 소쉬르 이후 가장 중요한 언어학자라 할 만하니까요. 촘스키가 한국에 소개된 것은 꽤 일렀습니다. 출세작 <통사구조론>(Syntactic Structuresㆍ1957)이 <변형생성문법의 이론>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게 1966년입니다.

뒤이어 1971년에는 <데카르트 언어학>(Cartesian Linguisticsㆍ1966)이, 1975년에는 <통사이론의 양상>(Aspects of the Theory of Syntaxㆍ1965)이 한국어판을 얻었습니다. <통사이론의 양상>은 흔히 '표준이론'(standard theory)이라 부르는 촘스키 초기언어학을 응집한 책입니다. 이 책이 번역된 1975년 이후, 한국에서 '촘스키'라는 이름은 현대언어학의 최전선을 가리키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날, 세계 여러 곳에서 그렇듯 한국에서도, 이 이름은 지식인의 양심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한국인들의 '촘스키 소비'는 시간축을 따라가며 크게 다른 양상을 보여왔습니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촘스키의 한국인 독자들은 주로 영어영문학과의 영어학 전공 대학원생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촘스키의 언어학 책들만 게걸스럽게 읽었습니다.

촘스키의 또 다른 영역, 다시 말해 정치비평에 그들은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았어요. 지식인의 책임을 거론하며 베트남전쟁을 매섭게 비판한 촘스키의 첫 정치서 <미국의 힘과 새 지배계급>(American Power and the New Mandarins)이 나온 게 1969년이었고, 그 세 해 뒤에는 두 번째 정치서 <아시아와 전쟁 중>(At War with Asia)이 출간됐는데 말이죠.

정치참여적 글쓰기는 촘스키가 언어학의 제위(帝位)를 얻고 나서야 손댄 장년 이후 호사취미가 아니었습니다. 촘스키 언어학은 그 시작부터 정치학과 나란했지요. 물론 촘스키가 '혁명'을 일으킨 것은 언어학 특히 통사론에서고, 그 혁명은 주로 언어학의 다른 분야나 심리학, 논리학, 인류학, 인지과학 같은 인접과학으로 수출됐습니다. 정치학은 촘스키 혁명의 핵심인 수학모델을 수입하기엔 너무 '무른' 과학이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1980년대 중반까지 한국어로 소개된 촘스키가 오직 '언어학자'였다는 사실은 그 즈음 한국사회에 대해 곰곰 생각해 보게 합니다.

1980년대 말 이후 한국인들의 '촘스키 소비'는 완연히 달라졌습니다. 이제 촘스키 독자들은 일반언어학이나 영어학 세미나에 참가하는 대학원생들이 아니라 일반인들이었습니다. 독서인이라면 누구나 촘스키를 거론할 만큼 그는 한국에서도 대중적 지식인이 됐습니다. 그런데 이들 일반 독서인이 읽는 촘스키는 오직 정치비평일 뿐입니다. 그래서 언어학자 촘스키는 한국인들에게 점차 잊혀지고 있습니다. 아니 요즘의 한국 독자들 대부분에게 촘스키는 처음부터 '논객'으로, '지식인'으로 각인됐는지도 모르죠.

오늘은 '언어학자' 촘스키를 살짝 들여다봅시다. 사실 살짝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것이, 촘스키혁명을 자세히 들여다보자면 어지간히 두툼한 텍스트로도 모자랄 텁니다. 흔히 촘스키 언어학을 '변형생성문법'(transformational generative grammar)이라고 합니다. 도대체 변형생성문법이란 뭘까요? 그리고 그것이 극복했다고 주장하는 구조주의 언어학과는 어떻게 다를까요? 다음 두 문장을 봅시다.

(1) 존경하는 선생님께서 감격스럽게도 제게 꽃을 이만큼이나 보내 오셨어요.

(2) 존경하는 제자들이 기특하게도 선생님께 꽃을 이만큼이나 보내 왔어요.

이 두 문장은 구조적으로 완전히 같습니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말이죠. 전통문법에서 흔히 주부(主部)라고 부르는 부분만 살핍시다. 동사의 현재관형형('존경하는')이 명사('선생님/제자들')를 수식하고, 이렇게 만들어진 명사구에 주격표지('께서/이')가 붙어 주어 노릇을 합니다. 그런데 '존경하는 선생님'과 '존경하는 제자들'은 정말 같은 구조를 지녔을까요?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그렇다는 것은 그 둘 다 현재관형형 동사(어간-'는') 뒤에 수식되는 명사가 이어진다는 점에서입니다. 명사(구)를 'NP'로 나타내고 동사의 현재관형형을 'V-는'으로 나타내면, '존경하는 선생님'과 '존경하는 제자들'은 둘 다 [V-는 NP]라는 구조를 지닌 NP(명사구)입니다. 이렇게 겉으로 드러나는 구조를 촘스키는 표면구조(surface structure)라고 불렀습니다. 촘스키에 따르면 표면구조는 음성해석 정보를 지녔습니다.

그런데 촘스키는 이런 표면구조 '저 아래에 누워있는(underlie)' 또 하나의 구조를 가정합니다. 촘스키가 심층구조(deep structure)라고 부르는 이 층위에서는 '존경하는 선생님'과 '존경하는 제자들'의 구조가 서로 다릅니다. 심층구조에서 '존경하는 선생님'은 '선생님을 존경한다'입니다. 다시 말해 [NP 목적격표지 V-ㄴ다]의 구떳?지닌 S(문장)입니다. 그러나 '존경하는 제자들'은 심층구조에서 '제자들이 존경한다'입니다. 다시 말해 [NP 주격표지 V-ㄴ다]의 구조를 지닌 S입니다. 즉 심층구조에서 '선생님'은 '존경하다'의 목적어인 데 비해, '제자들'은 '존경하다'의 주어입니다. 촘스키에 따르면 심층구조는 의미해석 정보를 지녔습니다.

서로 다른 심층구조를 지닌 '존경하는 선생님'과 '존경하는 제자들'이 동일한 표면구조를 지니게 되는 것은, [NP 목적격표지 V-ㄴ다] 구조의 문장과 [NP 주격표지 V-ㄴ다] 구조의 문장을 [V-는 NP]라는 동일한 NP(명사구)로 유도하는 규칙이 한국어에 있기 때문입니다. 심층구조에서 표면구조를 유도하는 과정을 '변형'이라 하고, 그 변형에 쓰인 규칙을 변형규칙이라 합니다.

촘스키 문법을 변형생성문법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이 변형규칙이라는 장치를 사용하는 생성문법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생성문법이라고 부르는 것은 유한한 규칙들의 집합(구조)을 통해서 무한한 적격(well-formed) 문장들을 생성해내는 모국어 화자의 능력에 이 이론이 관심을 쏟기 때문입니다.

촘스키에 따르면 구조주의 언어학자들은 "존경하는 선생님"과 "존경하는 제자들"의 구조적 다름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잘해 봐야 그 다름을 '관찰'하거나 '기술'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일반언어이론은 이런 관찰적 타당성(observational adequacy)이나 기술적 타당성(descriptive adequacy)을 넘어서는 설명적 타당성(explanatory adequacy)을 지녀야 한다고 촘스키는 말합니다. 물론 자신의 변형생성문법이야말로 그런 설명적 타당성을 지녔다는 거지요.

표면구조가 다른데 심층구조는 같은 경우도 있습니다. "나는 노무현이 바보라고 생각했어"와 "나는 노무현을 바보로 생각했어"는 표면구조가 다르지만 심층구조는 같습니다. 영어에서도 마찬가지죠. "I believed Roh was an idiot"와 "I believed Roh (to be) an idiot"를 견줘보면 그렇습니다. 한국어에서고 영어에서고, 이 문장의 심층구조는 앞쪽 표면구조에 가깝습니다. 그 심층구조에 인상변형(Raising transformation)이라는 규칙이 적용되면 뒤쪽 표면구조가 유도됩니다. 또 능동문과 피동문도, 동일한 심층구조가 서로 다른 표면구조로 유도된 대표적 예입니다.

촘스키의 변형생성문법은 초기의 표준이론에서 확대표준이론(EST), 지배결속이론(GB), 최소주의프로그램(MP) 등으로 정교화하면서 한 세대 이상 세계 언어학계를 풍미했습니다. 영어권 학계만이 아니라 서유럽, 일본, 중국, 대만, 한국 등지에서 촘스키는 거의 동시에 읽혔습니다.

촘스키를 곧이곧대로 따르지 않은 이론(가)들도 촘스키를 준거로 삼은 다음에야 제 좌표를 확정할 수 있었지요.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정치팜플렛으로 한국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진 레이코프(George Lakoff)의 생성의미론(generative semantics), 동사를 중심에 놓고 표준이론의 결함을 보완하려 한 필모어(Charles Fillmore)의 격문법(case grammar), 언어학 너머 형식논리학의 전통을 계승한 몬터규(Richard Montague)의 범주문법(categorial grammar) 따위가 다 그렇습니다.

촘스키 언어학이 이렇게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이유 하나는 그 이론의 보편지향성에 있을 겁니다. 촘스키는 수많은 자연언어들의 문법이 표면구조에서는 달라도 심층구조에서는 같으리라 예상했습니다. 말하자면 그의 두드러진 욕망 하나는 보편문법을 수립하는 것이었지요. 이탈리아어나 프랑스어를, 일본어나 중국어나 한국어를 모국어로 삼은 언어학자들이 촘스키 이론을 자신의 가장 익숙한 언어에 적용해보고 싶어했던 것이 이해됩니다.

고종석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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