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실의 남자들, 섹시남이 없네

2009. 6. 4.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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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매거진 esc] 너 어제 그거 봤어?

여왕의 이야기라면 귀가 솔깃하다. 여왕이 어떤 공적을 남겼는지도 궁금하지만 무슨 옷을 입고 어떤 남자를 만나고 누구와 라이벌이었는지도 궁금하다. 오천년 역사상 최초의 여성 임금인 신라의 '선덕여왕'을 그린 드라마가 최근 화제다. 드라마 초반이라 성인이 되지 않은 선덕여왕 대신, 새로운 차원의 악녀를 연기하는 미실 역의 고현정을 바라보는 시선이 뜨겁다. <10 아시아>(www.10asia.co.kr)의 백은하 편집장(사진 왼쪽)과 최지은 기자가 이제 막 시작한 <선덕여왕>(문화방송)에 채널을 고정했다.

섬세한 연기력과 압도적인 매력 발산하는 '선덕여왕' 고현정이요원이 고현정에 얼마나 밀리지 않을까가 시청률 성패 열쇠

백은하(이하 백)

올 초부터 <선덕여왕> 관련 기사를 보면서 '와~ 어떻게 저렇게 캐스팅이 되지?' 하고 놀라곤 했다. 고현정이 사극에 출연한다는 거, 게다가 미실 역이라는 사실이 더 그랬다. 김유신 역으로 엄태웅이, 김춘추 역에는 유승호가, 선덕여왕에 이요원이라는 말을 들었을 땐 의아했다. 김영현 작가가 자신의 장기인, 역경을 딛고 시대의 영웅이 되는 이야기를 어떻게 맛있게 요리할 것인가도 궁금했다.

순한 얼굴에 흐르는 악한 기운

최지은(이하 최)

<주몽> 이후로는 사극이 크게 히트했던 적이 없다. <대왕세종>도 기대에 비해 흥행과 비평면에서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 <자명고>와 <천추태후>가 고전을 면치 못하는 상황에서 <선덕여왕>은 여성 사극에 거는 마지막 기대작이다. 작가나 배우들의 면면, 문화방송 사극의 만듦새 등을 고려할 때 이미 검증된 상태에서 출발했다.

1박2일에 걸친 경주 현지 제작발표회를 거쳐서 5월 말 첫 방영했다. 아니나 다를까 고현정의 연기가 강렬하고 악랄할수록 드라마의 성패가 좌우되겠다 싶더라. 강력한 악당이 존재하고 그 악당의 힘을 도저히 꺾을 수 없다고 생각될 때 선덕여왕과 김춘추, 김유신이 힘을 합치면서 극적 재미를 보여줄 거다. 미실은 눈을 부라리고 째려보는 식의 악녀가 아니다. 목소리의 높낮이나 자체 발광 카리스마로 얕지 않게, 깊~게 독할 수 있단 걸 보여줬다. <히트>나 <여우야 뭐하니>가 이 또래 여배우가 해낼 수 있는 영토의 확장을 보여줬다면 지금 <선덕여왕>에서 의도적으로 악하게 그려지는 미실은 그녀가 참 잘 선택한 캐릭터다. 고현정에겐 본인의 의지가 딱 작동하는 순간에는 물불 안 가리고 달려갈 것 같은 이미지가 있다. 또 연민 같은 것도 느껴지고.

1회 보기 전만 해도 고현정이 사극과 얼마나 어울릴지 의심했다. 그런데 1회 보자마자, 미실에 대해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이 잡히더라. 왕의 총애를 받는 여자면서, 투구를 쓰고 검을 휘두르는 전사이면서, 또 왕을 모셨지만 그의 유언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사람을 죽일 결심까지 하는 복잡한 캐릭터를 잘 표현했다. 오랜만에 연기다운 연기를 보는 것 같았다.

결이 굉장히 풍부한 연기였다. 극중 신녀 서리(송옥숙)가 미실에게 "권력도 있고 모든 걸 다 가졌는데 왜 이렇게 왕후가 되고 싶어하냐"고 묻는 장면이 있었다. "다 가졌는데, 그것만 없으니까 그게 되고 싶다"고 말하는 걸 보면서 사실은 굉장히 탐욕스러워 보일 수도 있었을 텐데 그 열정 자체가 너무도 순수하게 느껴졌다. 이상한 불확실성 같은 느낌? 뭐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 그걸 너무 원하기 때문에 큰 걸 포기하고 떠나는 모습이 남다르게 다가왔다.

이건 뭐 단순히 여인천하식의 독기와는 다르다. 거기서 여자들이 뒤에서 조종했다면, 미실은 뛰쳐나가 실질적으로 몸을 움직이고 자기를 드러낸다. 화랑들을 끌고 나가서 낭장결의를 하는 여자 캐릭터는 처음 본 것 같다.

죽을 각오 한다기에, 강하게 싸울 줄 알았는데 화랑들이 배를 가르더라. 근데 이왕 화랑인데 좀 더 꽃미남이었으면 좋았을걸 싶더라.(웃음) 서라벌 10화랑도 기대된다. 극중 미실은 정말 장군님 같다.

힘으로만 누르는 게 아니라 여자의 매력으로 남자들을 홀리더라. 평면적이지 않은 이 캐릭터가 고현정을 통해서 잘 발현된다. 얼굴이 독하지 않게 생겼잖아. 그 독하지 않게 생긴 얼굴이 순수한 탐욕을 그려내는 거지. 맑은 얼굴로 나쁜 짓을 하고, 천진한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고 정말 보통 사람이라면 상상하지 못할 일을 '저지르는' 인물이다.

<자명고> 같은 근래 사극이 장르적인 코드로 다소 마니악(maniac)하게 갔다면, 김영현 작가만큼 사극을 쉽게 풀어내는 사람이 없다. 사극이 실제 역사를 기반으로 전통적인 영웅을 풀어내는 것과는 다르다. 영웅이 될 운명을 가진 어린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버림받고 힘겹게 자라나다가 결국은 자기의 운명을 받아들여 왕이 된다. 이건 사실 그리스로마신화를 비롯해 어디서나 반복되는 이야기다. 김 작가는 이 익숙한 이야기를 어렵게 꼬지 않고, 단순한 선악의 구도로 끌고 간다. 대중사극으로서의 장점을 분명히 갖고 있다.

김영현 작가는 <대장금>처럼 대중적인 히트작을 썼던 사람이다. 드라마 <히트>와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를 쓴 박상연 작가와 공동 작업을 하고 있다. 김 작가가 뼈대를 잡고 인물을 그리기는 하지만 박상연 작가와 함께 작업하면서 왕권에 대해 접근하는 남녀의 심리를 구체적으로 그릴 수 있어서 좋다고 말하더라. 박상연 작가가 다양한 장르물에 관심이 많고 상상력이 풍부해서 사극이 행여 낡은 것으로 보일 수 있는 단점을 넘어서는 것 같다. 뼈대 안에 흥미로운 상상력을 집어넣는 거지. 좀더 현대적이고 재밌는 이야기들이 두 작가의 공동 작업으로 나온다.

픽션이다 아니다는 무의미한 말다툼

스토리 안에서 너무 큰 상상력이 동원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다보니 역사적 사실과는 다른 설정이 생기고, 또 이걸 여전히 문제 삼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로 선덕과 미실이 대치할 수 있는 시간대의 인물들이 아니었다든지, 미실이 삼국유사나 삼국사기 등의 사료에는 적혀 있지 않다든지 하는 이야기 말이다. 그가 미실이든 아니면 다른 이름의 누구였든 <선덕여왕>의 상상력을 두고, 픽션이다 아니다 말하는 건 김영현식 사극에는 좀 무의미하지 않나 싶다.

한편 기대치가 높아진 상태에서 다음 회를 보니 어딘가 산만한 구석이 있었다. 미실을 보면 화면의 집중도가 높아지는데 주변의 남자들이나 마야부인이 나올 때는 화면의 밀도가 떨어진다. 선덕여왕 출생 장면에서 쌍둥이라 한 아이를 버려야 하는 긴박한 상황인데도 장면이 상당히 천천히 흘러갔다.

결국 주인공은 선덕여왕

그래도 1회만 출연했던 이순재를 진흥왕으로 배치한 것은 참 탁월했다. 미실을 총애했지만 그녀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잖아. 미실이 자기 유언을 전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지. 이순재와 고현정이 있을 때는 러브라인의 느낌도 있더라. 노회한 늙은 왕이 순수한 욕망덩어리인 미실에게서 뭔가 다른 위안을 얻는 느낌, 묘한 시너지가 있었다.

왕으로서 미실을 내치려면 진작 내칠 수 있었는데 안 그랬다.

장렬하게 돌아가신 이순재의 캐릭터와 계속해서 선덕을 도와줄 신구를 한 드라마에서 동시에 볼 수 있는 것 역시 진귀한 경험이었다. 걸출한 아역배우 남지현과 이현우도 그렇고. 남지현처럼 아역 특유의 연기조에 빠지지 않는 친구를 본 적이 없다.

미실을 둘러싼 남자 배우들도 기대된다. 세종(독고영재), 미생(정웅인), 설원(전노민)을 비롯해 모두 미실에게 꼼짝 못 하는 남자들이다. 그런데 각각 다 매가리가 없는 느낌이다. 미실을 떠받드는 남자들이 매력이 있어야 시청자들이 보게 되는데 아직 그게 너무 없는 거지. 미실의 남자들, 섹시남이 없다.

선덕의 주변 남자들은 강하고 매력이 있잖아. 미실의 남자들은 약하고(웃음). 이게 작가의 의도적 배치가 아닐까 싶다. <선덕여왕>은 결국 내 편을 끌어모아서 싸움을 계속 해나가는 게임 같다. 미실은 이미 패를 골라 놓고 시작했다면 선덕은 계속해서 한명 한명 얻어가는 거다. 그래서 주인공이 선덕일 수밖에 없다.

이요원이 등장한 뒤, 화랑과 함께 훈련을 받고 김유신을 만나 어떻게 그를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지의 과정도 기대된다. 무예가 뛰어나지만 세상사에 대해서 잘 모르던 남자아이가 성장하면서 신라를 짊어지는 수장이 되는 김유신도 중요하다. 엄태웅도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것 같고.

<선덕여왕>은 역사책의 이면을 보여주는 것 같다. 아직까지 연출이 대본과 차지게 붙는 느낌은 덜하지만 그 변화를 보는 것도 재밌을 거다. 이제 관건은 선덕여왕 이요원이 얼마나 미실에 밀리지 않는 카리스마를 지니느냐다.

■ 카리스마 콸콸콸~ 물오른 연기

⊙ 검을 휘두르는 미실(고현정 분)

"임무 수행을 못한 부하를 향해 검을 날리며 '내 사람은 실수를 하면 안 된다'고 반말을 하는 장면. 희열에 찬 하얀 얼굴에 피가 촤악~ 묻는데 정말 무서운 여자라는 생각이 들 만치 섬뜩했다!"(백은하)

"순간 얼굴의 잔근육까지 사용하는 표정연기 작렬! 돌아서서 한쪽 눈썹만 움직이고, 입꼬리를 올리는 걸 보면 장군과 요부의 매력이 동시에 넘친다. 그녀는 미실의 연기를 즐기고 있는 게 분명하다."(최지은)

■ 발가락이 오그라든 연기들

⊙ 마야부인(박수진 분)의 출산

"2회까지 나온 역할, 중요하다면 중요하고 아니면 아닌 건데. 몰입에 방해가 될 정도면 곤란하다. 출산 연기 해냈다는 그 자체만으로 칭찬해줄 순 없잖아? 표정 변화 없이 목소리의 높낮이로만 하는 연기, 이러면 가수 출신 연기자들을 향한 편견을 버릴 수 없어~"(최지은)

⊙ 소화(서영희 분)의 오두방정

"인자한 유모가 아닌 캐릭터인 건 좋은데, 지나치게 튀는 연기 톤. 군더더기가 너무 많다. 굳이 안 해도 될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면 부담감 팍팍~ 온다. 시트콤식의 안달 연기는 이제 버려도 되지 않을까?"(백은하)

정리 현시원 기자 qq@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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