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사를 지킨 빨치산 토벌대장

2008. 6. 5.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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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차일혁 전 총경에 감사장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절을 태우는 데는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는 데는 천 년 이상의 세월로도 부족하다."

6.25 전쟁 당시 빨치산 토벌대장이었던 차일혁 총경(1920~1958년)의 말이다.

차 총경은 당시 빨치산의 은신처로 사용되던 구례 화엄사를 불태우라는 상부의 명령을 거부, 천년 고찰의 명맥을 지키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한 인물.

문화재청은 차 총경의 업적을 기려 5일 발간한 `수난의 문화재 이를 지켜낸 인물이야기'에 그의 일화를 담았다.

또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에서 `문화재 지킴이'로서의 공로를 기려 그의 아들 차길진(61)씨에게 감사장을 전달했다.

이날 행사에 참가한 차길진 씨는 12살에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차 총경에 대한 기억은 또렷했다.

"아버지는 경찰의 자존심이었습니다. 친일파들이 득세하던 그곳에서 드물었던 독립운동가 출신이셨습니다."

차 총경의 이력은 특이하다. 민족주의자였던 그는 1938~43년까지 좌익 계열인 조선의용대에서 활동했다.

좌익계열의 독립운동단체에 들어간 것은 당시 중국의 조선인 민족주의 세력들이 일본과의 무력투쟁에 소극적이었기 때문.

해방 후에는 경찰로 활동했으며 6.25전쟁 중에는 빨치산 소탕을 담당하는 전투경찰대 제2연대장을 맡아 조선 공산당 총사령관인 이현상을 토벌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하지만 전쟁에 대한 시각은 당시 남한의 주류세력이었던 우익과는 사뭇 달랐다.

"이 싸움은 어쩔 수 없이 하지만 후에 세월이 가면 다 밝혀질 것이다.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 벌어진 부질없는 동족상잔이었다고..(중략)"

전북일보에 기고한 이 글과 이현상을 화장했다는 이유로 그는 상부로부터 질책을 받았고, 결국 혁혁한 전공에도 불구하고 총경 자리에서 더이상 승진하지 못하고 38살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요절했다.

차길진 씨는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라면 유언이랄까. 그런 가훈이 있었습니다. 그 첫째가 '벼슬길에 나서지 마라'였고, 둘째가 '가정을 잘 지켜라'였습니다. 아무래도 공직생활에 대한 회한도 조금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공직에서 이른바 '왕따' 신세를 면치 못했지만 문화지킴이라는 세간의 명성은 얻었다.

화엄사를 태우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은 그는 화엄사 전체 대신 전각의 일부 나무 문짝을 태우는 것으로 명령을 대신했다. 천은사, 쌍계사, 선운사 등 유명 사찰들에 대한 포격도 될 수 있는대로 피했다. 결국 그는 잇따른 명령 불이행으로 감봉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세상은 그의 공적을 인정했다. 조계종 초대 종정이었던 효봉스님은 1958년 차 총경에게 감사장을 수여했다. 화엄사는 1998년 경내에 그를 기리는 공적비를 건립했고, 마침내 국가기관으로는 처음으로 문화재청이 이날 감사장을 전달했다.

차길진 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50년만에 받는 감사장이라 뭐라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먹먹하다"며 "오늘 아버님 산소에 다녀올 예정이다"고 말했다.

buff27@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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