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속의 한류를 찾아서]<31>아스카 히노쿠마의 ''오미아시 신사''

2007. 3. 28.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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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고대 백제인 오진왕의 왕실에 건너가 백제문화를 심어준 두 거인은 아직기(阿直岐·阿知吉師, 5세기)와 왕인 박사였다. "오진천황 15년 8월6일 백제왕은 아직기를 파견하면서 좋은 말 2필을 바쳤다. 그 말을 야마토 땅(지금의 나라 땅) 가루(輕)의 언덕지대 마구간에서 키우도록 했다. (중략) 또 아직기는 경전에 능통했다. 그 때문에 태자인 우지노와키이라쓰코를 가르치는 스승으로 삼았다. 천황은 아직기에게 '혹시 백제에 그대보다 뛰어난 학자가 있는가'라고 물었다. '왕인이란 우수한 사람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신하인 아라타와케와 가무나기와케를 백제에 파견해 왕인을 초청해 왔다."(일본서기)

이와 같이 먼저 왜나라 왕실로 건너갔던 백제왕족 아직기의 천거로 왕인도 왜왕실로 초청됐다. 일찍이 도쿄고등사범 오쓰키 후미히코(大槻文彦·1847∼1878) 교수는 "아직기와 왕인은 둘 다 학문이 뛰어나 태자가 이들에게서 배웠으며, 일본에서 이때 처음으로 문학의 길이 시작돼 융성했다"('日本小史'상권, 1885)고 찬양했다. 앞의 '야마토 땅의 가루(輕)'는 "나라현 가시하라의 지명이며 조선반도로부터 건너온 도래인의 땅"(吉田茂樹 '일본지명어원사전' 1981)이다.

◇오미아시신사 유서 깊은 13층석탑(중요문화재).

현재 나라현 아스카 '히노쿠마'에는 유서 깊은 13층석탑과 더불어 아직기의 사당 '오미아시신사'(於美阿志神社)가 자리 잡고 있다. 지금은 '금당' 등의 주춧돌만 남은 이 터전의 고대 사찰 '히노쿠마사' 절터에서는 7세기 기와가 출토됐다.(아스카보존재단) 히노쿠마사는 아직기 사당과 함께 섰던 고찰이었다는 것을 '연희식'(927 왕실 편찬)에서 살필 수 있다. 이 사찰도 아직기와 그 후손 백제인 왕족인 '야마토노아야씨'(東漢氏) 신주를 모셨다. 또 이곳은 제28대 센카천황(535∼539 재위)의 '이오리노궁'(蘆入野宮) 왕궁 옛 터전이었다는 비석이 서 있어 아직기 장관 시대의 위세를 엿보게도 한다. 센카천황은 백제 제25대 무령왕(501∼523 재위)의 친동생인 게이타이천황('인물화상경')의 제2왕자이다. 이 대목에 관해서는 근일 상세하게 밝히련다.

장장 1500년의 긴 역사를 말해 주는 백제 왕족 아직기의 유적지는 오사카의 '긴테쓰 전철'(미나미오사카선, 오사카의 '아베노바시'역에서 승차)로 '아스카'역에서 내려 동남쪽 1㎞ 지점 야트막한 언덕 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아직기는 동쪽 아스카 땅 가루의 오진왕 왕실의 정무장관(倭漢直·야마토노아야노 아타히)이었는가 하면 왕인박사는 지금의 오사카인 서쪽 '구다라스'(백제주)에서 오진왕의 제4왕자인 닌토쿠왕 왕실의 정무장관(西文首·가와치노 후미노 오비토)이었다.

가쿠슈인대 오노 스즈무(大野晋) 교수는 "왕인의 자손들이 가와치(구다라스인 오사카 지역)에 살면서 벼슬을 이어 대대로 번창했다. 야마토국(나라 땅)에 살던 왜한직(아직기의 정무장관 직위)과 가와치국에 살던 서문수의 자손들은 후세에 각기 왜한직 벼슬과 서문수 벼슬을 세습하며 야마토 땅과 가와치 땅에서 큰 세력을 떨쳤다"('일본어의 세계' 1980)고 지적했다.

◇아직기 신주를 모신 오미아시신사(於美阿志神社)의 사당.

일찍이 오진왕의 왕릉 배총(오사카부 하비키노시 곤다)에서는 너비 43cm의 도금된 말안장 장식(飾鞍)이 발굴됐다. 현재 오진왕의 사당인 곤다하치만궁에 보존되는 일본 국보다. 용무늬가 2단으로 겹치게 제작된 이 안장 장식은 아직기 장관이 백제에서 가지고 건너왔으리라고 본다. 일본 학자들은 이 말안장 장식이 4세기 신라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신라 천마총에서 발굴된 말안장 장식도 이것과 흡사한 형태로, 너비 역시 43cm이다. 1985년 호류지(법륭사) 인근에서 발굴된 '후지노키(藤ノ木) 고분'에서도 신라 말안장 장식과 유사한 것이 한쌍 출토됐다. 백제 왕족의 고분으로 보이는 이 고분에서는 금동 신발(답)이며 큰칼, 구리거울, 귀걸이, 각종 화려한 장신구들이 나와 큰 화제를 모았다.

고대 한국은 지금의 만주땅과 한반도를 합친 광대한 국토를 가진 기마(騎馬)민족 국가였다. 그 시대에는 말 잘 타고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朱蒙)이라고 불렀다. 동부여땅 금와왕(金蛙王)의 왕궁에서 말을 잘 기르기로 소문났던 청년은 주몽이라고 했다. 주몽은 금와왕 왕자들의 박해를 피해 동부여 땅을 떠나 오이(鳥伊) 등 3명의 동지와 함께 남쪽으로 말을 달려 졸본주에서 졸본부여(卒本扶餘)라는 부여 국가의 새 국도로 삼고, 주몽 동명성왕(東明聖王·BC 37∼20 재위)은 나라를 세워 국호를 고구려라고 불렀다. 지금부터 2000여년 전의 일이다.(삼국사기)

그러므로 장차 부여 땅 옛 국토를 회복하는 광개토대왕(391∼413)과 장수왕(413∼491)의 대고구려 시대의 기초를 일찍이 닦은 것은 주몽이다. 한국인들이 말을 잘 타는 기마민족이라는 사실은 고구려 고분벽화의 기마도 그림 등 말을 다룬 여러 그림들이 입증해 준다. 경주박물관에 가면 신라인들이 썼던 고대의 각종 마구의 장식 등 훌륭한 유물들을 많이 볼 수도 있다. 눈부신 비단벌레 장식의 안장 받침대는 경주 천마총(天馬塚) 등의 고대 마구의 유물들로, 신라인들 역시 고구려 백제와 더불어 만주 벌판을 누비던 한 핏줄의 기마민족임을 입증해 주고 있다.

◇오미아시신사 일대의 고즈넉한 농촌 풍경.

1992년 6월 경남 함안군 가야읍 도항리에서 출토된 말갑옷은 흡사 물고기 비늘처럼 네모난 쇠조각들이 한쪽에 340여쪽이나 엮어진 무쇠의 철비늘로 이루어져 있다. 이 말갑옷은 싸움터에 나가는 말의 몸을 둘러 주어 적의 화살이며 창검에 찔리는 것을 방어하는 갑옷이다. 그만큼 우리 민족은 군마(軍馬)를 아꼈던 기마민족이었음을 입증한다. 더구나 가야 고분에서 발견된 말갑옷의 모습은 그 옛날 고구려 고분인 평남 용강의 쌍영총(雙楹塚·5∼6C초경) 벽면에 그려진 말을 탄 무사와 말의 말갑옷과 똑같은 것임을 쉽게 살필 수 있다.

백제 왕족 아직기에 의해 암수 한쌍의 말이 처음 왜왕실에 건너가서 종마 구실을 시작했거니와 왕인박사의 본거지로 알려진 오사카부 하비키노시의 후루이치(古市)는 말과 연고 깊은 옛 터전이기도 하다. 구다라노에 속하는 이 후루이치에는 왕인의 사당인 사이린지(西淋寺)가 있어서 유서 깊다.(연재 17회 참조) 더구나 왕인박사의 후예들 중에서는 말을 관장하는 고관이던 마씨(馬氏)의 성씨도 나오게 됐다.

미키 세이이치(三木精一) 교수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양마(良馬)가 고대에 한국으로부터 자주 왔다는 기록이 있다. 말을 사육하고, 마종을 개량 증식하는 업무를 관장했던 것이 마씨라고 생각된다. 후루이치에 있는 그 터전의 지명이 지금도 우마야(馬谷·마곡)인데, 그곳에는 도카리신사(利雁神社)도 있다. 이 신사가 있는 곳을 가리켜 '왕의 궁'이라고 불러 왔다. 바로 이 신사의 제신(祭神)은 왕인박사이고, 왕인의 후손인 마씨 등이 제사를 지냈다고 본다. 마씨는 이 고장에서 크게 번창했던 것으로 여겨진다."('王仁系氏族とその遺蹟', 1975) 고대 일본에서는 왕과 왕족, 고관 정도나 말을 탈 수 있었다. 말을 관장하는 것도 왕실의 지체 높은 관리였다.

하가 야이치(芳賀矢一)는 일본 제국주의 출발 초기인 1896년 아직기와 왕인의 시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이 시대에 이르러 한국인의 귀화가 많아졌고, 이들 귀화인은 대개 방직과 대장간 등 공업에 종사했기 때문에 의복과 음식이며 주거 등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베풀었다. 태고시대 인민의 의식주를 말하자면 기원전은 말할 것도 없고 진무(일본 개국 초대왕) 시대 이후에조차도 일반 인민은 동굴 속에 사는 자가 허다하였다. 한국과 교통이 열리면서 비로소 처음으로 기둥을 주춧돌 위에 세우게 됐다. 의복은 초목의 껍데기를 실로 자아서 짰으며, 색깔은 흰색을 숭상했으며, 이것을 물들일 때는 초목의 액즙을 갖고 했다. 오진천황 치세에 진시황제의 후예인 궁월군이 백제로부터 귀화하여 양잠을 시작하여 이것이 크게 성하게 됐다. 남자는 머리를 좌우 두 가닥으로 나누어 머리의 양쪽으로 늘어뜨리며 둥근고리 모양으로 땄는데 이것을 '미조라'(みぞら)라 하였다."('新撰帝國史要' 상권)

아직기 시대로부터 본격적으로 한반도의 각종 산업 문화가 일본에 건너가면서 일본 선주민들이 비로소 벌거벗은 몸에 옷을 걸치게 되고 초가 움집 등 주거도 등장하게 되며 사람다운 구실을 하기 시작한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백의'를 숭상하게 됐다는 것은 한민족의 영향이 절대적으로 작용한 것을 알 수 있다. 남자들이 머리를 두 갈래로 나누어 둥근고리로 땄다는 것이 고대 한국과 연관이 있는지는 고증 자료 관계상 알 수 없다. 한 가지 짚어둘 것은 일본의 국수적 학자들은 '도래인'을 귀화인으로 못박고 있고, 걸핏하면 백제·신라인 지도자 조상을 중국인으로 조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도 백제에서 일본으로 도래한 '궁월군'을 '진시황제의 후예'로 왜곡하고 있다.

일본에서 기와와 주춧돌을 놓은 건물의 등장은 588년 백제 건축가들이 나라땅 아스카 왜왕실에 건너가서 '아스카절'을 지을 때부터의 일이다.(일본서기) 게이오의숙대 사학과 시미즈 마사지(志水正司) 교수는 "1956년부터 57년에 걸친 아스카 절터 발굴 때 창건 당시의 것으로는 2종류의 수키와가 출토됐다. 거기서 나온 것은 백제 왕도 부여의 여러 사찰터에서 출토된 수키와와 똑같은 계통의 것이었다. 단 부여 출토의 것은 연꽃잎이 8엽에 한정돼 있는데, 아스카절 것은 10엽의 것도 있다는 점이 달랐다. 이런 사실은 백제로부터 기와박사가 일본에 건너왔다는 것으로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일이다"('古代寺院の成立' 1985)라고 강조했다. 기와며 백제식주춧돌이 출토되었다.

교토산대 고대문화연구소장 이노우에 미쓰오(井上滿郞) 교수는 지난 1월23일 오사카의 '사천왕사'에서 가진 '아직기 시대의 백제문화 특강'에서 "당시 백제문화가 일본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일본 문화는 백년이 뒤졌을 것이다. 우리 대학에서 나는 학생들에게 늘 그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고 말했다.

(다음주에 계속)

한국외대 교수 senshyu@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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