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단일민족설'의 기원은?

2010. 5. 26.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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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개념사총서 '민족ㆍ민족주의' 출간

(서울=연합뉴스) 권영전 기자 = "조선 민족이 혈통적으로, 문화적으로 대단히 단일한 민족이라는 것은 우리 조선인 된 이는 누구나 분명히 의식하여 일점의 의심도 없는 바다."

1933년에 쓴 이광수의 '조선민족론'의 일부다. 이 논설은 현재까지 조사된 바로는 '한국인 단일민족설'을 최초로 제기한 글이다.

박찬승 한양대 교수는 한국개념사총서의 하나로 출간된 '민족ㆍ민족주의'(소화 펴냄)에서 오늘날 많은 한국인이 믿는 단일민족설이 1930년대 초까지 등장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물론 그 전에도 "2천만 민족은 동일한 단군의 자손"이라는 식으로 단일 혈통을 강조한 표현이 간간이 신문 등지에 보이기는 하지만, 거꾸로 한국인이 단일민족이 아니라 다종족으로 구성됐다는 주장도 제기될 정도로 단일민족설은 드문 주장이었다.

단적인 예로, 단재 신채호는 1908년에 발표한 '독사신론'에서 동국민족(한국인)이 부여족을 주 종족으로 하는 6종족으로 구성됐다고 말했고, 박은식은 '몽배금태조(꿈에 금나라 태조를 뵙다)'에서 조선족과 만주족이 모두 같은 단군의 자손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1930년대 초에야 처음 제기된 단일민족설은 3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일본의 '내선일체' 정책에 따라 불온한 것으로 간주돼 해방 전까지는 다시 등장하지 않았다.

단일민족설이 다시 등장한 것은 해방 후 남북이 분단될 위기에 처했을 때였다. 김구는 1945년 12월 임시정부 환영 대회에서 "우리 민족 개개인의 혈관 속에는 다 같이 단군 할아버지의 성스러운 피가 흐르고 있다"며 남과 북의 동포가 단결해야 한다고 호소하며 '단일민족설'을 폈다.

신탁통치가 결정되고 나서 이에 반발한 여운형의 조선인민당도 "4천년 동안 단일민족의 국가로 독립해 찬연한 문화를 발전시켜온 우리 민족의 역사적 전통과 능력을 불고(생각하지 않음)한 것"이라고 단일민족설의 입장을 견지하며 반발했다.

이 당시에도 진단학회가 펴낸 '한국사'에서 "(우리 민족에) 한인(漢人)ㆍ몽고인ㆍ만주인ㆍ왜인(倭人) 기타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등 반대파가 있었지만, 이후에는 단일민족설이 그대로 정설로 정착돼 국사 교과서에 실리기에 이른다.

단일민족설의 근간이 되는 '민족'의 개념도 한국에 들어온 지 100년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이전에 조선왕조실록에도 등장하는 '족류(族類)'나 '동포'가 보이지만 한국인을 지칭하는 말로 '민족'이 처음 쓰인 것은 1904년 황성신문에서였다.

이후 '민족'은 일본 유학생들이 만든 학회지에서 많이 쓰였고, 1919년 3·1 운동 때 대중적으로까지 널리 퍼졌으며, 이후 20~30년대를 거치면서 문화공동체로서의 '민족' 개념을 형성했다.

저자는 21세기 다민족 사회로 변화하는 데 따라 단일민족설이 더 약화할 것으로 예상하고, 민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나올 것을 기대했다.

책은 문화적 민족주의에서 출발해 민중적 민족주의, 시민적 민족주의, 탈민족주의 등으로 변화해온 민족주의의 개념사도 다룬다.

272쪽. 1만2천원.

comm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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