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남편과의 결혼생활이 외로울 때

2010. 4. 24.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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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매거진 esc] 김어준의 그까이꺼 아나토미

Q 착하고 자상한 남편인데 결혼생활은 왜 이리 외롭고 지겨울까요

결혼 4년차 30대입니다. 겉보기엔 단란한 가정입니다. 남편은 착한데다 저를 사랑해주며 아이에겐 자상한 아버지고 아이 역시 건강하며 시댁과도 좋습니다. 문제는 제가 이 결혼생활에 만족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겁니다. 다혈질인 아버지 때문에 고생한 엄마를 보며 반대 성품을 골랐고 결혼 전에도 남편과의 시간이 아주 즐겁진 않았으나 나이 들어 어른들 소개로 만나는 사이에 20대 같을 순 없다 싶어 차차 괜찮아지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신혼여행도 참 재미가 없었어요. 스스로 그걸 인식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많이 허전했습니다. 남편과 손잡고 키스하고 관계를 맺어도 좋은지 모르겠더군요. 그런 중 첫째를 임신해 우울했지만 무언가 주어지면 열심히 하는 스타일이라 내 몸 안에 자라나는 생명을 생각하며 몸 관리도 하고 자연분만도 하고 모유수유도 열심히 했습니다. 모유수유 끝나고는 바로 둘째를 임신했습니다. 남들은 금실 좋다 하고 아이가 태어나면 또 좋은 엄마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겠지만, 전 너무도 힘이 듭니다. 이렇게 죽을 때까지 몇 십 년을 살아야 한다는 게 암담합니다. 남편에겐 미안하면서도 막연하게 화가 나고 너무 외롭습니다. 결혼해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자 했던 제 목표가 왜 이렇게 됐을까요? 해결책이 있을까요?

A 역할이 아닌 '삶'을 사시오

0. 이런 사연, 참으로 많다. 나이 차서 소개로 착한 남자 만나 건강한 아이 낳아 안정적 결혼생활 한다. 그런데 행복하지가 않다. 대체 왜. 남들 보기엔 문제없는데. 어서부터 잘못된 걸까. 뭐가 문제인지조차 모를 때 필요한 건, 근본적인 회의다. 이 경우라면, 결혼 그 자체다. 이 지면 통해 본인이 줄기차게 주장해 온.

1.인생에 가장 중요한 선택이라고들 하는 결혼. 절대다수가 결혼하려 하거나 이미 했거나 한 적이 있다. 하여 다들 그 결혼에 대해 안다 여긴다. 과연 그런가.

남녀가 배타적 사랑을 평생 약조하는 것이란 개념의 결혼은 사실 역사가 오래되지 않았다. 근대 이전의 결혼은 사랑과 무관했다. 과거 커플들은 사랑하지 않았단 말이 아니다. 사랑해 결혼한 게 아니었단 거다. 사랑은 결혼의 조건이 아니라 결혼의 결과였다. 것도 우연찮은. 결혼은 오랜 세월 한 집안이 자신들의 이권, 지위, 자산을 확보하고 상속키 위한 거래였으며 한 계급 혹은 한 왕가의 생존, 동맹, 번영을 담보하기 위한 계약이었으니까. 사회 경제적 도구이자 정치 군사적 수단이었다고. 동서 막론하고 조혼과 중매혼이 성행한 건 그래서다. 아이가 성장해 누군가와 눈 맞아 거래를 위협하기 전, 조건을 거간하는 이의 조력 통해 일찌감치 교환을 해치우는 것이다.

남녀의 사적 감정이 결혼 전제의 일부가 되기 시작한 건 결혼이 담당했던 정치, 경제, 사회적 기능들을 새롭게 등장한 국민국가의 제도와 기관들이 대체하면서, 그리고 근대적 개인이 탄생하면서다. 그러니까 지금 당연시하는 종류의 결혼은 겨우 2세기 전 발명된 혁신적인 신개념에 불과하다.

2. 결혼 역사를 왜 읊느냐. 당신 이야기에 없는, 두 가지 때문이다. 먼저 당신 이야기 어디에도 당신이 왜, 결혼을 했는지가 없다. 만원짜리 구매도 이유가 있는 법이거늘 평생을 거래하면서, 애초 내가 왜 그 거래를 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사유 자체가 없다. 두 번째, 당신 이야기엔 당신이 없다. 남편이 착하고 아이에게 자상하고 시댁도 문제없다는 거. 그건 모두 상대와 조건이 어떻다는 소리들이다. 몸 관리하고 자연분만하고 모유수유 한 거. 그건 모두 결혼이 부여한 임무들이다. 그러니까 당신의 결혼인데, 정작 당신은 없다고.

왜 없느냐. 당신은, 오늘날 무수한 이들이 착각하듯, 결혼을 인생의 숙명적 과제로 받아들인 게다. 그리고 그 과제가 요구하는 배역만 열심히 수행하면, 행복은 마땅히 절로 얻어지리라 여긴 게다. 그렇게 당신은 삶이 아니라, 역할을 살고 있었던 게다. 결혼이란 사회적 역할극 속에서 착한 아내와 좋은 엄마라는 등장인물을 연기하고 있었다고. 그런 시대도 있었다. 춤바람 따위로 그 필연적 삶의 허기를 달래던 때도 있었다고. 하지만 왜 지금도 그래야 하나.

3.유사한 상황에 처한 수많은 이들, 이게 그저 파트너의 문제인 줄 안다. 서로 맞지 않아 그런 줄로만 아는 거다. 혹은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줄 안다. 만족할 줄 몰라 그런 줄로만 아는 거다. 아니다. 그런 건 두 번째, 세 번째다. 결혼이란 제도와 그 제도에 따르는 조건들과 그 조건들이 요구하는 배역의 수행은, 거래를 완성시킬 순 있어도, 나의 행복과는 무관하다는 거, 그 진실을 몰라 벌어지는 참극이다.

그 진실이 왜 어떻게 감춰지고, 그 자리를 어떤 판타지가 대체하고 있는지에 관한 질문들은 다음 기회에 하자. 지금 당신에게 시급한 질문은, 나는 언제 행복하고 언제 불행한 사람인가, 그러니까 나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거니까. 너무도 기본적이어 누구나가 했어야만 하는, 그런 질문들. 그런 본원적 질문을 생략하고 역할을 사는 이가 외롭고 허전하지 않다면, 그게 비정상이다. 그런 연후 내게 적합한 삶의 방식을 고민하는 거다. 결혼은 그때 이용할 수도 있는, 제도일 뿐. 그 회의의 결과에 따라선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할지 모른다. 참,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내가 행복하지 않은데 대체 결혼 따위가 무슨 소용인가.

결혼하러 태어난 인생은 없다.

김어준 딴지 종신총수 고민 상담은 go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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