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노량해전 직전 쓴 '최후의 작전 서한' 첫 공개

정충신 기자 2016. 9. 30. 11:55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순천 왜교성 고립 왜군 먼저 치자”… 明軍에 ‘긴박한 제의’ 담겨



박현규 교수, ‘여수반도 해전 국제학술대회’서 밝혀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 앞서 일본 수군에 대한 선제공격을 명(明)군에 제의하는 의미가 담긴 ‘간찰(簡札·한문 편지·오른쪽 사진)’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장군은 전남 순천 왜교성에 고립된 왜군의 위장행동을 간파해 사실상 철수가 임박했다고 판단하고 왜군을 쳐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30일 박현규(왼쪽) 순천향대 중어중문학과 교수는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와 전남대 이순신해양문화연구소가 공동으로 전남대 여수캠퍼스에서 개최한 ‘정유재란 시기 여수반도 해전과 조명연합군’ 주제 국제학술대회에서 ‘가경-장안왕씨 종보에 수록된 선조·이덕형·이순신 간찰 고찰’ 논문을 발표했다. 공개된 간찰은 모두 8통으로 선조와 좌의정 이덕형, 이순신 장군이 명나라 왕사기(王士琦)에게 전달한 내용이 담겼다. 당시 조명연합군에 의해 순천 왜교성에 고립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명군을 회유해 최소한의 철수 통로를 확보하려 했다.

장군은 ‘이순신 밀찰’로 족보에 명명된 간찰에서 “적장 평의지(平義智)가 명나라 군사가 철수한 이래 왜교에서 돌아와 현지 사람들을 불러 유시하기를 대명 병사와 조선 병사가 모두 패주했으니 이제 근심은 백성들을 안주시키는 것이라고 합니다”라고 적어 이덕형에게 보냈다.

이어 장군은 “적의 동정을 살펴보니 주강포의 소금 찌는 솥 10여 개를 거두어 빈 배에 실어 먼저 대마도로 보냈고, 왜구들이 우리들에게 말과 포를 교역하거나 소를 잡아먹는 것이 전날과 다릅니다”라고 보고했다. 장군은 왜군의 동정을 “믿을 것이 못 된다”고 평가했다. 간찰은 노량해전(1598년 11월 19일)을 한 달 정도 남겨놓은 1598년 10월 28일에 작성됐다.

이덕형은 이순신 장군의 간찰에 대해서 왕사기에게 “만약 그들을 몰아 소굴에서 벗어나면 바다 가운데에서 막아 살해하면 가장 기묘한 책략이 되옵니다”라며 “이순신의 밀계는 수륙 대장군이 함께 먼저 왜교를 치고 나중에 남해를 도모하자는 뜻이옵니다”라고 알렸다.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된 이순신 장군 간찰은 1598년 음력 7월이 마지막이다. 이번 간찰은 ‘조선왕조실록’ ‘이 충무공 전서’ ‘난중일기’ ‘이덕형 문집’ 등 국내 임진왜란·정유재란 관련 사료에서 찾아볼 수 없던 것이다. 김경록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조명연합군의 작전에 소극적이었던 명군을 설득해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섬멸하고자 했던 이순신 장군의 의지를 보여주는 자료로 역사적 의미가 매우 높다”고 평가했다. 김 연구원은 “이순신 장군은 남해에 주둔하며 순천 왜교성의 일본군 철수를 지원하려 했던 일본 수군을 선제공격해 퇴로를 차단하자는 결전의 작전 제안을 했다”고 말했다.

정충신 기자 csjung@munhwa.com

[ 문화닷컴 바로가기 | 소설 서유기 | 모바일 웹]

[Copyrightⓒmunhwa.com '대한민국 오후를 여는 유일석간 문화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구독신청:02)3701-5555 / 모바일 웹:m.munhwa.com)]

Copyright © 문화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