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작공방 이우환은 왜 구석에 몰렸나
[한겨레] 가라앉지 않는 이우환-경찰 위작공방 쟁점과 전망은
1956년 미대생 시절 일본에 밀항했던 그는 이후 고투 끝에 여백의 미학으로 세계 미술판을 움직이는 풍운아가 됐다. 종이에 점과 선만 채워넣고, 돌덩어리를 철판 위에 얹은 선적인 작품들은 큰 울림을 던졌다. 70년대 한국 단색조 그림의 태동에 큰 영향을 주었고, 일본의 전후 현대미술에서 모노하 유파를 창안한 거장 이우환(80)씨가 지금 작가 인생에서 가장 큰 난국을 맞고있다.
국내 미술시장에서 작품값이 가장 비싼 생존작가인 작가의 70년대 점·선 연작을 놓고 수년 전 화랑가에서 불거진 위작 사기판매 논란이 경찰의 수사 개입까지 불렀다. 그의 작품으로 시장에 유통되다 최근 압수된 그림 13점은 전문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의 감정 결과 지난달초 모두 위작 판정을 받았다. 지난주 문제의 작품들을 뒤늦게 감정한 그는 모두 자신이 그린 진작이라며 경찰 판정을 뒤엎었다.
구속된 위조범들이 13점 중 4점을 자신들이 위조했다고 이미 진술한 상황에서 경찰은 공소유지를 위해 작가와 정면대결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경찰과 거장의 진위작 대결이라는 초유의 상황 앞에서 위작 시비는 국민적 논란으로 확산되고 있다. 특히 작가가 13점 모두 진작으로 단정하면서 위조범들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며 언급을 피하고, 자기 안목 외에는 근거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은 것 등은 되레 새 의혹을 키우는 빌미가 됐다. 미술계 일각에선 작품값 폭락이나 거래 화랑의 이권을 의식한 발언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던지고 있다. 2011년 미국 구겐하임 미술관 회고전에 이어, 2014년엔 거장들만 초대한다는 프랑스 파리 베르사유궁 전시로 비상을 거듭했던 그의 예술혼은 고국에서 위작논란으로 자칫 큰 상처를 입을 처지에 놓였다.
■ 주관적 안목과 과학감정의 대립 “결론은 모두 진품입니다. 한 장도 이상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호흡이나 리듬이나 채색을 쓰는 방법이나 내 것이었습니다.”
지난달 27, 29일 경찰에서 두차례 압수작품 감정을 하고 나서 밝힌 작가의 ‘모두 내 작품’ 발언은 미술판에 충격을 던졌다. 13점의 압수품 중 상당수가 필치가 조악하고 그림 틀 자체를 낡은 것처럼 조작한 흔적이 뚜렷하다는 게 작품들을 본 화랑계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평가였던 까닭이다. 위조총책 현아무개씨가 이미 압수품 중 일부 작품을 위조했다는 것을 구체적 정황을 대며 시인했던 상황이어서 작가가 일부는 위작을 인정하리란 예상이 유력했지만, 빗나갔다.
왜 작가는 모두 진품이라고 확신한 걸까? 미술계에서는 경찰이 이례적으로 작가의 사전 감정을 배제하고 위작판정 결과를 공표한데 따른 격앙된 감정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하지만, 경찰이 내놓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의 과학감정과 전문가들의 안목감정 결과에 대한 작가의 해명도 살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앞서 경찰은 27일 1차 출석한 작가에게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 감정 결과를 알려주면서 위조범들이 위작을 그리는 시연 장면의 영상자료와 시연 그림, 위작 도구 등을 보여줬다. 위조범들은 영상 속에서 위작했다고 진술한 4점을 지목해 위조 방법을 재연했다. 못과 본드를 써서 화폭을 나무틀에 고정하고, 테두리에 흰색 물감을 덧칠했다. 위조범들은 공개된 진술 내용에서 빻은 유리·대리석 가루를 안료에 섞어 진품 특유의 반짝이는 색감을 재현했으며 위조서명의 경우 레이저 빔 영사기로 진품 서명의 윤곽을 화폭에 그대로 투영해 옮겼다고 털어놨다. 이런 위작 형태는 위조범 일당이 지목한 4점과 일치한다고 경찰은 설명했다.
기준작인 작가의 진작 6점과 비교할 때 위작 판정 그림들은 낡은 화폭처럼 조작한 흔적이 보이고, 안료의 구성이 다르며, 서명과 붓질 필치가 조악하다는 등의 근거가 제시됐다. 그러나 작가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반짝거리는 색조에 대해 “여러 색깔을 쓰는 작가 고유의 혼합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작업할 때 유리 가루를 넣지 않는다”고 했다. 또 “물감이나 붓은 그때그때 조금씩 다른 것을 써왔기 때문에 문제가 될 수 없다”고 반박했다.
이런 발언은 합리적 의심을 부를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고유의 호흡과 리듬의 과정을 거쳐 독특한 색조와 화법이 나왔다는 설명 외엔 위작범이 털어놓은 작품 제작 과정에 대한 진술을 반박할 구체적 근거를 내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유리 가루를 쓰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가 자신의 진작이라고 밝힌 작품에서는 실제로 유리 가루 성분이 검출됐다.
물론 경찰의 조사방식이 정보의 객관성을 단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지난달 30일 기자회견에서 문제의 작품들을 그렸던 78, 79년은 가난하고 어려운 시기로 한국과 일본에서 한 달간 30~40여점의 그림을 다작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그의 작품을 다수 거래해온 한 중견화랑주는 최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작가가 이 시기 600~800여점의 작품을 그려 동경화랑 등 일본화랑에 넘겨줬다는 사실이 최근 수년 사이 뒤늦게 드러났다”면서 “아직 수백여점이 시장에 풀리지 않은 상태”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정황까지 감안하면, 경찰이 감정분석 때 기준작으로 정한 진품 6점은 턱없이 적은 수량으로, 작가의 진위작 감정에 통용되는 보편적 잣대로 인정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하지만, 작가의 청장년기라 해도 2년 만에 수백점의 작품을 창작할 수 있을까란 궁금증 또한 생기는 것도 피하기 어렵다. 한 평론가는 “호흡과 리듬을 중시하며 과작과 대작을 선호해온 작업 스타일을 감안하면 다작했다는 작가의 증언은 선뜻 와닿지 않는다”고 했다. 고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 위작 논란에서 최근 법정소송을 제기한 유족들이 과거 진품설을 퍼뜨린 국립현대미술관, 화랑협회의 졸속 감정 과정을 구체적인 기록들로 제시하며 여론의 주목을 받은 것과는 상반되는 모습으로 비친다.
■ 거래 기록이 없다 과학감정 자체가 모든 감정의 잣대가 될 수는 없다. 안목감정과 출처 유통 경로 조사를 함께 해서 가려야한다는 것이 미술계의 정석이다. 사실 이우환 진작설의 가장 큰 맹점은 작가 자신이 지닌 유통경로 기록이 거의 전무하다는 데 있다. 실제로 경찰은 위작 넉점의 유통경로와 관련해 “최종 구매자들이 대금지급한 수표 23억원 상당이 유통책에 입금됐으며 현 씨에게 이중 2000만원 입금된 금융내역을 확인했다” 고 밝혔다. 경찰은 위작 4점의 유통경로와 관련해 “최종 구매자들이 대금 지급한 수표 23억원 상당이 유통책에게 입금됐으며 이 중 2천만원이 위조를 주도한 현아무개씨에게 입금된 금융 내역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위작들이 진짜로 조작돼 팔린 정황을 세부적으로 확인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작가는 문제가 된 작품의 제작 및 소장처 이동 내력을 알려주는 자료는 없으며, 당시 작품들을 일일이 기억하지는 못한다고 밝혔다. 그림들을 그린 구체적인 내력을 현재로는 알 수 없다는 말이다. 그는 “가난하고 힘들 때여서 전시 작품이 도록에 실리지 않은 경우도 있고 화랑에 작품 주면 돈을 받지 못하고 사라진 경우도 많았다”면서 “작품 일련번호도 나중에 한꺼번에 기입하거나 화랑이 기입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해명했다.
경찰 조사에서는 가짜가 팔린 최근의 돈거래 경로가 분명히 드러나는데, 진짜라고 주장하는 작가는 작품 제작 당시의 정황과 초창기 거래 경로의 근거를 전혀 대지 못하고 있다. 이런 설명으로는 의구심을 풀 수 없다는 게 지배적인 견해다. 전문가들은 진위감정의 가장 결정적인 근거는 작품의 거래 이동에 대한 기록, 바로 작품의 ‘족보’라고 말한다. 작가 발언의 진의가 의심을 받는 결정적인 이유는 이런 일차 자료가 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찰 수사에 조력했던 한국미술품감정평가원의 한 관계자는 “경찰이 압수한 13점외에 유통된 다른 위작 의혹 작품 50여점의 유통 경로도 확실한 단서를 잡은 것으로 안다. 올 하반기 계속 추가 물증을 제시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박경미 피케이엠갤러리 대표는 “경찰이 위작 유통 경로를 철저히 찾아내 진위작 공방의 책임을 묻고 수사를 제대로 마무리하는 전례를 남겨야 한다. 그래야 소모적인 위작 공방이 재연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 “ 법적 공방에서 작가 감정은 한 증거일 뿐” ♣ ] 작가의 ‘모두 내 작품’ 선언이 미술계(특히 미술시장)에서 앞으로 실효성 있는 감정기준으로 인정 받을 수 있을까. 현재로선 그럴 가능성이 크지 않다. 경찰은 작가의 진작 선언 뒤에도 “위작을 전제로 수사를 계속한다”는 방침을 재확인했고, 3일 작가의 위작을 그린 혐의로 불구속상태였던 화가 ㅇ씨를 전격구속했다.
서구의 경우 화랑이나 경매사 거래에서 생존작가의 감정 의견은 우선 존중되는 핵심 근거다. 그러나 진위작 문제가 법정공방으로 비화하면 ‘원오브뎀’, 곧 하나의 증거자료로서만 취급된다는 게 법조계 관계자들의 말이다. 예술법 국제변호사인 캐서린 킴은 “결국 위조범들의 형량에 대한 법원의 최종 확정판결이 내려질 때 작품의 위작 여부도 최종 확정되며 그 결과에 따라 작가의 진위판정이 지닌 파급력의 범위도 정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현재 국내외 시장에서 위작 파문에도 불구하고 이 작가의 작품은 거래량이 늘고 일부 작품들은 값이 올랐지만, 법적으로 위작이 확정되면 신뢰도와 거래는 타격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진위작을 둘러싼 법정공방에서 작가 판단이 배제된 사례들은 종종 있었다. 프랑스의 대가 발튀스는 90년대초 한 수장가에 팔린 자신의 작품이 가짜라고 주장해 법정다툼으로 번졌으나, 95년 미국 뉴욕대법원은 이 작품이 80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도록에 포함됐다는 증거를 제시하며 진작 판결을 내렸다. 국내에선 작고작가 윤중식이 2007년 서울옥션 경매 출품작을 위작이라고 주장하면서 법정공방까지 갔다가 70년대 전시도록에서 작품도판이 발견되자 진작으로 인정하는 해프닝이 벌어진 적도 있다.
■ 작가별 감정전문가가 없다
이우환 진위공방의 근본적인 문제는 두가지다. 무자료 거래, 즉 작품 족보가 없는 주먹구구식 밀실 거래에 급급해온 관행과 작가별 감정전문가가 거의 없다는 현실이다. 특히 화랑들과 딜러들은 재벌 등 큰손 컬렉터들의 구린 비자금 거래와 투기 행각을 돕는 구실을 하면서 거래자료를 공시하지 않고 된서리를 맞은 경우가 적지 않았다. 캐슬린 킴 변호사는 “외국 경매사 화랑들이 한국작가들의 거래를 꺼리는 가장 큰 이유는 작품들의 이동경로와 출처가 제대로 파악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이런 악폐들이 쌓여 거장 이우환의 위작수사 건에서 총체적인 모순을 드러낸 국면이 된 것이다. 이권에 좌우되는 화랑업자들이 주축을 이룬 국내 감정기관들의 역량과 자질도 이번 위작공방에서 입도마에 오르고 있다. 경찰은 민간의 공신력있는 감정기관과 법원 경찰에서 감정위원으로 활동했던 전문가들에게 감정을 맡겼다고 밝혔으나 이들도 상당수는 미술판에서 화랑업자들과 감정 결과를 놓고 다툼을 벌이거나 내부적으로 반목하는 등 확고한 신뢰감을 주는 인사들로 볼 수 없다는게 중론이다.
서구의 경우 작가별로 오랫동안 연구해온 전문가들이 개인 사무소를 꾸려 각기 책임을 지고 감정하는 풍토가 뿌리를 내린 반면, 국내는 화랑주나 미술사학자, 미술관 출신자들이 다같이 모여 작품을 토의한 뒤 감정 결론을 내는 후진적 방식을 수십여년째 유지해왔다. 그래서 이우환 작가 같은 대가들의 경우 감정 결과를 놓고 감정기관, 화랑과 갈등을 빚어 감정이 중단되거나 감정단체들의 분열로 한 작가의 작품에 각기 다른 판정을 내리며 혼란을 빚는 행태들이 잇따랐다. 미술선진국이라면 자체적으로 감정전문가들과 미술사학자들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을 국내 미술시장은 위작 논란이 커지면 대부분 사법당국이나 법원 쪽으로 달려가 판단을 요청하는 불행한 관행을 답습해온 것이다. 작가별 전문감정가도 거의 없고 무자료 밀실거래가 판치는 현실에서 사실 법정에 진위판정을 떠미는 건 필연적인 귀결일 수 밖에 없다.
화랑가 일각에서는 이우환 작가의 작품거래를 도맡았던 메이저 화랑 갤러리 현대가 이번 위작공방에서 뒤로 빠진 채 관망하는 모습도 비판의 표적이 되고 있다. 미술계 한 관계자는 “서구의 경우 거장의 작품거래를 도맡는 주력화랑이 작가의 진위작 시비 등에 대해 책임지고 대처하는 것이 당연시된다. 그러나 갤러리 현대는 그동안 작가의 작품 거래에 따른 이득은 취해왔으면서도 진위공방에 대해서는 강건너 불구경하는 듯한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다. 이우환 작품에 가장 정통하고 감정권한까지 넘겨받았던 박명자 갤러리 현대 회장이 위작공방에 대해 분명한 입장과 경위를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우환 작가는 30일 기자회견에서 앞으로 최대한 작품을 직접 감정하면서 시장에 개입할 뜻을 밝힌 바 있다. 하지만 국제무대 활동에 바쁜 그가 국내 거래 작품들을 모두 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앞으로 그의 작품 감정에서 적지않은 난맥상이 빚어질 것으로 우려되는 이유다. 미술계 인사들은 대체로 작가의 모호한 해명에 실망감을 나타내면서도 한국이 낳은 세계적 거장이 위작 방조 등의 의혹을 받으며 명예가 추락하는 최악의 상황은 피해야한다는 조언도 내놓고 있다. 싸늘해진 여론 앞에서 작가가 어떻게 위기국면을 풀어갈 것인지, 그의 다음 행보가 주목된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한국장학재단 이사장 “청년들, 빚 있어야 파이팅”
■ ‘사랑의 교회’ 아침 8시 고위 판검사가 오 목사의 ‘로열층’에 모였다
■ 표창원 “잘생긴 남자경찰관 보내 여고 성관계 사건 초래”
■ [카드뉴스] 막장드라마보다 더 막장…종편의 선정적 방송들
■ [화보] 로이터가 기록한 세상의 모든 드라마
▶ 발랄한 전복을 꿈꾸는 정치 놀이터 [정치BAR]
▶ 콕콕 짚어주는 [한겨레 카드뉴스][사진으로 뉴스 따라잡기]
▶ 지금 여기 [환자 만들어내는 실손보험][한겨레 그림판][2030 플랜Z]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