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수웅의 르네상스人] 종이 사전을 삼킨 남자, '웹 사전'을 낳다

판교/어수웅 기자 2016. 6. 1. 03:06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정철 카카오 웹 사전 기획자] 책 '검색, 사전을 삼키다' 펴내.. 연세대에서 사전학 석사 "종이 사전 몰락 안타깝지만 차별성 없는 콘텐츠 탓도.. 포털에 계속 改正 요구하세요, 원하는 만큼 '검색'할 수 있어"

아이러니다. 종이 사전에 사형선고를 내린 포털, 그 포털의 웹 사전 책임자가 사전의 가치와 분투(奮鬪)를 촉구하는 종이 책을 펴내다니. 폭염과 체질 탓도 있었겠지만, 카카오 지식셀 (Knowledge Cell)의 사전 담당 정철(40)씨는 이 질문에 연신 땀을 흘렸다.

지난 31일 경기도 판교의 카카오 7층 인터뷰실. '사형선고' '포털 책임' 등의 어휘에 동석(同席)한 커뮤니케이션 파트(Part) 황혜정씨도 조금 난감한 표정이다. 개인이 아닌 회사 업무 관련 인터뷰에는 참석하는 게 규정이라고 했다. 직함 없이 파트·셀 등 낯선 부서 이름만 쓰는 방식도 충분히 어지러운데, 열린 문 복도 사이로 반바지 차림의 '킥보드 청년'이 휙 하고 지나간다.

카카오에서 10년째 어휘 사전을 책임지고 있는 그의 책 제목은 '검색, 사전을 삼키다'(사계절刊). 놀리는 걸까. 흘리는 땀은 여전했지만 그는 "궁극적으로 검색이 좋아지려면 사전이 좋아져야 하며, 그 둘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고 정색했다.

지질학을 전공한 청년이 무작정 네이버의 문을 두들긴 것은 2002년. 새로운 웹 사전 기획안을 들고서였다. 국가·장르·알파벳 순으로 집에 정리한 1만장의 LP가 웅변하듯 그는 유년 시절부터 수집과 분류에 열을 올렸다. 국보 1호부터 50호까지 줄줄 외우던 초등생 정철은 딱지·지우개·메모지·우표를 모았고, 청소년 시절에는 백과사전의 분류 방식에 매혹됐다고 한다. "정보에 접근하는 방식이 비효율적이면 먼저 화가 나고, 여건이 닿으면 고쳐대기 시작한다"는 사내다. 이 강박적 사내가 생각하는 '수집의 끝판 왕'은 어휘 수집. 당시 네이버 자원(自願) 역시 그래서였다. 그의 열정과 재능을 인정한 당시 팀장의 선구안 덕에 정철은 이제 네이버 4년, 다음 10년 등 14년 경력의 디지털 사전 기획자가 됐다.

그 기간 사전은 몰락 혹은 변신의 여정을 겪었다. 종이 사전, CD롬, 전자 사전, 웹 사전, 앱 사전…. 종이 사전 출판사로부터는 "너희 때문에 망했다"는 원망과 비난도 숱하게 들었다. 그들의 '몰락'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이 디지털 사전 기획자는 종이 사전 시절의 태만과 무능 역시 조심스레 지적했다. 개성 없이 엇비슷하던 백과사전의 범람, 고민 없이 일본이나 영미권 사전을 단순 번역하던 영한사전 등등.

포털의 노력에는 무엇이 있었느냐는 반박에 그는 다시 자신의 노트북을 열었다. 그리고 카카오 영어 사전에서 Apple을 입력했다. 예상과 달리 이 사전의 ①번 뜻은 사과가 아니었다. 대신 ①애플 ②사과 ③뉴욕 ④사과나무 순으로 적혀 있다. ①은 아이폰을 만든 기업 이름. '애플의 전 CEO 스티브 잡스…'로 시작하는 예문과 557이라는 숫자가 옆에 적혀 있다. 순서대로 클릭하면 557건의 예문을 읽을 수 있다. ②의 의미로 쓰인 예문은 225건, Big Apple처럼 뉴욕의 의미로 쓰인 ③번 예문은 20건…. 각각의 의미로 쓰인 지금 이 시대의 예문을 컴퓨터가 자동 채집해 빈도 수로 순위를 매긴 것이다. 물론 화면 아래쪽에서는 기존 사전의 뜻풀이도 볼 수 있다.

2016년 5월 31일 현재 25개 국어를 서비스하는 어휘 사전, 위키백과의 신뢰도 향상 등 사전에 대한 그의 열정과 집착은 종종 제지가 필요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의 개인적 열정에 동의한다 해도 포털의 웹 사전이 기존 종이 사전 데이터를 헐값에 구입했고, 결국 '멸종'에 이르게 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사전을 개정·보완해오던 출판사가 사라진 상황에서 이제 그 책임은 1차적으로 '포식자'인 포털이 져야 하지 않을까.

그는 다시 한 번 예의 그 동석자를 당황하게 만드는 발언을 했다. 포털이 사회적 책임을 자각하게 만드는 '팁'을 알려준 것. 포털 최고의 취약점은 사용자의 불만 제기. 이 단어, 이 전문 용어는 왜 검색에 나오지 않느냐고 CS(고객서비스)팀에 계속해서 항의하라는 것. 다수가 반복해서 항의하면 포털은 당연히 설현의 몸매 사진 이외에도 백과사전과 어휘사전 개정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고 했다. 그는 "사람들은 결국 자신이 원하는 수준의 콘텐츠를 가지게 된다"는 명제로 포털과 개인의 책임을 함께 강조했다.

강요하는 사람 한 명 없는데 이 디지털시대의 신(新)르네상스인은 지난 2008년 연세대 언어정보연구원에서 '사전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종이 책 '검색, 사전을 삼키다'의 마지막 문장은 '나는 정말 좋은 사전을 갖고 싶다'였다.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