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를 '소비'하는 두 가지 방법

임지영 기자 2016. 3. 31.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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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자 저 남자, 너무 걱정하는 남자가 많은 것 아닙니까. 헤프게 굴지 말고 강 선생은 이 시간 이후로 내 걱정만 합니다.' 말투는 딱딱한데 내용은 더없이 달콤하다. 상부의 명령을 어겨 구금 중인 유시진 중대장(송중기)이 그를 찾아온 강모연(송혜교)에게 한 말이다. 로맨스가 피어나는 현장은 이슬람 (가상) 국가 우르크. 파병 특전사와 외과 의사의 사랑은 지진이라는 재난 속에서 극적으로 피어난다. 제대 후 복귀작으로 선택한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서 군인으로 등장하는 송중기의 ‘다·나·까’ 말투가 인기다.

유 중대장이 구사할 법한 '보고 싶었지 말입니다' 같은 대사는 실제 국방부의 ‘지침’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 얼마 전 국방부는 일선 부대에 ‘다·나·까 말투 개선 지침’을 내려 일과 시간 이후에는 ‘해요체’를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병영 문화 혁신을 위한 방안이다. 군대 문화의 상징이자 개선의 대상으로 지목됐던 말투가 뒤늦게 유행을 탔다. 물론 사람들이 열광한 지점은 말투보다 내용이다.

ⓒKBS 홍보실 : 드라마 <태양의 후예>(위)에서 군인으로 등장하는 송중기의 ‘다·나·까’ 말투가 인기다.

‘다·나·까’체로 재미를 본 건 드라마만이 아니다. MBC <진짜 사나이>가 있다. 연예인의 병영 체험기를 다룬 이 ‘관찰 예능’에서 외국인 출연자들은 경직된 군대 문화와 ‘다·나·까’ 말투에 예외 없이 힘들어한다. 가수 제시는 ‘다·나·까’를 ‘바닷가’로 알아들어 웃음을 주었고 헨리는 '가나다'라고 답해 당혹스러움을 선사했다. 한국어가 서툰 이들의 부적응이 웃음의 포인트다. 이들은 대체로 ‘군대 무식자’로 자리매김하는데, 이런 ‘무개념’을 딛고 에이스로 성장할 때는 감동의 서사를 선사하기도 한다. 한 예비역은 '초기에 ‘다·나·까’체가 입에 안 붙어 자꾸 실수하던 기억이 있다. 선임병이 그걸로 트집을 잡아 얼차려를 시켰다. 꼬투리 잡아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안 좋은 제도지만 갈궈야 고분고분해진다는 군대 문화를 습득하는 계기가 됐다'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두 프로그램은 결이 다르지만 군대를 바라보는 시선에서는 대체로 일치한다. 그곳은 때때로 가혹하고 힘든 곳이지만 따뜻한 전우애가 있고 원칙을 존중하며 국가의 소중함을 가르쳐주는 공간이다. 최근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배우 송중기는 일부 비판적 시각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있다는 걸 환영한다'라고 밝혔다. 또한 '군 문제는 예민하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잘하고 싶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극중 유시진은 로맨스의 주인공으로서 본분을 지키지만 가끔 직업적 정체성을 드러낸다. '군인은 늘 수의를 입고 산다. 이름 모를 전선에서 조국을 위해 죽어갈 때 그 자리가 무덤이 되고 군복은 수의가 된다. 군복은 그만한 각오로 입어야 한다. 그만한 각오로 군복을 입었으면 매 순간 명예로워라.' 드라마가 흥하자 국방 홍보 블로그에서는 그가 군 복무 기간 중 작성한 칼럼을 다시 게재하며 ‘연예인 송중기가 아니라 수색대대원 송중기’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진짜 사나이>는 1990년대에 8년간 방영한 <우정의 무대> 이후 본격 군대 예능의 계보를 3년째 잇고 있다. 그간 수색대대, 유해 발굴 감식단, 해군, 해병대에 도전한 데 이어 틈틈이 ‘여군 특집’을 편성하고 있다. 남자 연예인과 달리 여자 연예인은 신체검사에서 키와 몸무게, 민낯을 공개해 화제를 모으고 상사들은 ‘여자인 척하지 말라’며 남성도 여성도 아닌 군인성을 강조한다. 조서연씨(서울대 국문학과 박사 수료)에 따르면, <진짜 사나이>는 ‘먹고 씻고 배설하고 잠자는 일상생활에까지 가해지는 빡빡한 통제와 상명하복의 위계질서라는 군사 문화가 체력을 기르고 정신력을 단련하며 팀워크 능력을 기르는 등의 자기 계발과 자연스럽게 얽혀서 재현된다(2015년 <문화과학>’.

이 프로그램을 따라다니는 수식어 중 하나가 ‘군 홍보’ ‘군대 미화’다. ‘윤 일병 사망사건’ 당시엔 군대의 실상을 가린다는 이유로 폐지 논란이 일기도 했다. 2013년에는 한국 PR 대상을 받았다. 당시 잡지 <육군>은 제작 담당 중령의 인터뷰를 통해 ‘안방 TV에서 육군을 선보인다’는 콘셉트 아래 먼저 방송사를 찾아다닌 일화를 소개했다. ‘국민의 니즈(needs)를 반영한 개선된 육군 홍보 마인드의 첫 결실’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15년 전이나 지금이나…군대는 변한 게 없구나

지상파에서 이런 방식으로 군대의 모습을 그려내는 동안, 암울한 모습의 군대 이야기를 그리는 이들도 있다. 얼마 전 4권이 완간된 김보통 작가의 만화 <DP 개의 날>은 15년 전 작가의 경험담을 기반으로 했다. 탈영병을 잡는 육군 헌병대 군무이탈체포조 DP의 이야기다. 작가는 신문 연재 제안을 받고 시점을 언제로 잡아야 하나 고민했다. 지금의 군대는 그가 겪었던 당시와 다를 거라고 판단해서다. '텔레비전을 틀면 그야말로 ‘멋지고 자랑스러운’ 군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으니,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무언가 변한 것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얼마 전 완간된 만화 <DP 개의 날>(전 4권)은 탈영병 잡는 육군 헌병대 이야기를 다룬다.

그런데 요즘의 군 생활이 얼마나 나아졌는지 참고하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했더니 가혹행위와 자살, 탈영은 여전했다. '탈영이 나약한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하려고 했다. 범죄자로 낙인찍혀 자신의 상황과 처지를 항변할 수 없게 되어버린 탈영병을 대신해 가해자와 가해자를 만들어내는 조직, 나아가 피해자를 범죄자로 만들어버리는 사람들의 인식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만화 속 자살을 시도하는 탈영병 오성환은 자신이 그렇게 숱하게 얻어맞던 날들엔 어디서 뭐 하다 지금은 이 난리를 치면서 쫓는 거냐고 주인공에게 묻는다. 군대가 바뀔 거라는 주인공의 설득에는 '제가 쓰는 수통 밑에 1953이라고 새겨져 있어요. 6·25 때 쓰던 거예요. 수통도 안 바뀌는데 무슨…' 하고 말한다.

최근 남산예술센터에서 공연 중인 연극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에도 탈영병이 등장한다. 제대 한 달을 앞두고 총기를 소지한 채 군대를 빠져나온 그는 검문소 앞에서 탈영병 잡는 일을 했다. 아버지를 찾아간 그는 말한다. '잡혀온 군인들이 다 고개를 못 들어요. 검문소 바닥에 무릎 꿇고 비는 병사들도 있고. 그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도 한 달 후, 전역하고 사회 나가면 저렇게 살겠지. (중략) 살기 위해 무릎 꿇고 뭘 잘못했는지 모르면서 계속 빌고 살겠지.' 현재의 탈영병과 일본 가미카제 특공대가 된 조선인, 이라크에서 미군 식품업체에 배달하다 납치된 한국인, 서해에서 선박 침몰로 목숨을 잃은 해군 등 시대는 다르지만 '살고 싶다'는 바람이 일치하던 군인들이 주인공이다. 박근형 연출가는 '국가 간 거래, 전쟁, 시스템 속에서 자의 또는 타의로 강요받는 군인들의 죽음은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그들의 서사 위에 편안하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통해 그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며, 죽음의 순간에 섬광처럼 스치는 기억에 공감할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같은 공간이라도 저마다의 기억은 다르다. 유시진의 부대와 탈영병 오성환의 군대도 서로 멀리 있지 않다.

임지영 기자 /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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