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日밀약 몰랐던 고종 "美공주가 도우러 왔다" 황실가마 태워

허윤희 기자 2015. 10. 6. 03:07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세상] 110년前 고종이 美사절단에 선물한 초상사진 발견 -고종 황제의 슬픈 사연 美에 마지막 희망 걸었지만 사절단은 이미 日지배 인정 '가쓰라-태프트 밀약' 체결 -루스벨트 딸, 21세에 亞순방 미모 뛰어난 '사교계의 여왕' "내게 사진 선물한 황제는 존재감 없이 애처로웠다"

1905년 7월 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거대한 증기선이 닻을 올렸다. 무게 2만7000t, 길이는 축구장 두 개에 달하는 '만추리아(Manchuria)호'.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파견한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아시아 순방 외교사절단이 타고 있었다. 하와이·일본·필리핀·중국·대한제국을 거치는 긴 여정이었다. 사절단장은 체중 147㎏에 달하는 거구의 육군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1857~ 1930). 당시 스물한 살인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1884~1980)도 함께였다.

앨리스 일행은 9월 19일 인천항에 도착했다. 조미수호통상조약(1882)에 따라 미국이 대한제국을 도와주리라 기대한 고종은 '앨리스 공주'를 융숭히 대접했다. 황실 악단이 미국 국가를 연주하며 일행을 환영했다. 막대한 돈을 들여 앨리스가 지나갈 도로를 고쳤고 황실 가마에 태워 숙소로 안내했다. 떠나는 날은 각부 대신이 남대문 정거장에 나와 전송했다. 하지만 훗날 그녀는 이렇게 회고했다. "환송 회견장에서 황제와 황태자는 각각의 사진을 나에게 주었다. 그들은 황제다운 존재감은 거의 없었고, 애처롭고 둔감한 모습이었다."

◇루스벨트 딸 일행에게 사진 선물

고종 황제가 이 사절단 일행에 선물한 고종의 초상 사진이 미국 뉴어크박물관(Newark Museum)에서 발견됐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사장 안휘준)은 지난 4월 이 박물관이 소장한 한국 문화재를 조사하던 중 1905년 경운궁(덕수궁)에서 촬영한 황제 복식 차림의 고종 초상 사진을 찾았다고 5일 밝혔다. 대한제국 황실 사진가였던 김규진이 촬영해 미국 외교사절단에 선물로 제공한 사진이다. 재단은 "당시 사절단 일행이었던 미국의 철도·선박 재벌 에드워드 해리먼(1848~1909)의 소장품이었던 것을 그의 사후, 부인이 1934년 박물관에 기증한 것으로 국내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사진"이라고 했다.

당시 고종이 앨리스에게 선물한 고종의 또 다른 초상 사진은 미국 스미스소니언 프리어 새클러 갤러리에 소장돼 있으며, 3년 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분관에서 열린 '대한제국 황실의 초상'전에 공개된 바 있다. 앨리스의 아시아 순방엔 하원의원이던 니컬러스 롱워스가 함께했다. 이듬해인 1906년 앨리스는 백악관에서 열세살 위인 '바람둥이' 롱워스와 결혼했다. 앨리스는 96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워싱턴 사교계의 여왕으로 군림했다.

새로 확인된 고종의 사진에는 대한제국의 슬픈 역사가 고스란히 투영돼 있다. 당시 일본의 주권 침탈 위기에 봉착한 대한제국은 미국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고종은 미국의 도움을 얻기 위해 '공주'를 대접하는 데 정성을 쏟았다. 하지만 미국의 속내는 달랐다. 사절단은 이미 도쿄에서 필리핀 통치를 대가로 일본의 한국 지배에 동의하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하고 온 후였다. 사절단장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가 바로 이 조약의 장본인이다.

고종은 "우리는 미국과 약속한 것이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미국은 우리의 친구가 되어줄 것이다"라고 했지만, 루스벨트는 부통령이던 1900년 친구에게 "나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차지하기를 바란다"는 편지를 썼다. 사절단 방문 두 달 후 을사늑약이 체결돼 한국의 외교권이 박탈당한다.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국제정세에 무지했고 강력한 군대와 유능한 외교관을 양성하지 못했던 대한제국은 결국 멸망의 길로 가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한국인이 촬영한 가장 오래된 고종 사진

사진 속 고종의 눈빛은 어딘가 애처롭다. 크기는 가로 22.9㎝, 세로 33㎝이며 '대한황제진 광무구년 재경운궁(大韓皇帝眞 光武九年 在慶運宮)'과 '김규진조상(金圭鎭照相)'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다. 광무9년은 1905년, 경운궁은 지금의 덕수궁을 뜻한다. 구체적 촬영 장소는 서양식 타일이 있는 바닥에 카펫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아 현재 덕수궁 중명전 1층 복도로 추정된다.

특히 흑백사진으로 인화한 뒤 황제의 복식인 노란색 황룡포와 보라색 익선관 등 일부를 채색한 점이 눈에 띈다. 재단은 "채색된 고종 사진은 당시 고종이 앨리스에게 선물한 프리어 새클러 미술관 소장 사진을 포함해 두 점뿐"이라고 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1858~ 1919)

미국의 제26대 대통령으로 재임 기간은 1901~1909년. 훗날 제32대 미국 대통령이 되는 프랭클린 루스벨트(재임 1933~1945년)와는 먼 친척 사이다. 러일전쟁 강화조약인 포츠머스회담을 중재한 공로로 1906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하는 등 힘의 논리에 충실한 모습도 보였다.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