男과 女, 서로의 반쪽 아닌 적? 이성 잃은 '이성 혐오 시대'

입력 2015. 9. 9. 03:08 수정 2015. 9. 9.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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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보 10∼30대 남녀 656명 설문조사

[동아일보]
경기 안양시의 한 학원 강사인 여모 씨(28)는 최근 수업 중 10대 학생의 행태에 깜짝 놀랐다. 한 여학생이 “선생님, 날씨가 더우니 아이스크림 좀 사주세요”라고 말하자마자 남학생들이 “저런 김치년”이라고 비아냥거린 것. 그러자 여학생들 역시 ‘김치남’이라며 맞받아치며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 남성 절반, 여성 25% “상대 성 비하 언어 써봤다”

‘이성 혐오의 시대’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다. 일베 등 온라인 사이트에 이어 대중문화 콘텐츠를 통해 여성 혐오(여혐)가 급속히 확산되자 이에 대한 반발로 남성 혐오(남혐)도 고개를 들고 있다. 온라인에서 뜨겁던 이성 혐오가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반대 성(性)에 대한 ‘극혐’은 일상 속에서도 번지고 있다. 이는 동아일보 취재팀의 설문조사에서도 나타난다.

7, 8월 서울 시내 고등학교 방문 취재와 동아닷컴이 개발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설문 툴을 활용해 10∼30대 남녀 656명(남자 330명, 여자 326명)을 상대로 ‘이성 혐오’에 대해 조사했다.

그 결과 남성은 ‘김치녀, 된장녀 등 여성을 비하·혐오하는 용어를 사용해봤다’고 답한 경우가 55.1%(182명)로 2명 중 1명꼴이었다. 특히 10대의 경우 10명 중 6명(59.7%)이나 됐다.

여성은 ‘×치남, 베남이 등 남성 비하·혐오 단어를 사용해봤다’고 답한 경우가 25.4%(83명)였다. ‘×치남’은 성기의 속어와 김치남을, ‘베남이’는 여성 비하로 유명한 인터넷 사이트 ‘일베’와 남자를 합친 말이다.

이성 비하 용어를 사용한 이유에 대해 “‘실제로 한국 남성(여성)이 한심하다’고 생각해서”라는 답이 남성(36.6%)과 여성(24.5%) 모두 가장 많았다. 이성 비하 용어가 단순한 유행어가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연결된다는 의미다.

○ 대중문화를 타고 번지는 여성 혐오
여성 비하 논란을 일으켜 전량 폐기하기로 한 남성 잡지 맥심 9월호 표지.
여혐은 전파력이 높은 대중문화 콘텐츠를 통해 사회 전반으로 번지고 있다. 남성 잡지 ‘맥심 코리아’는 9월호 표지에 성범죄를 미화하는 듯한 사진과 함께 ‘진짜 나쁜 남자는 이런 거다. 좋아 죽겠지’라는 카피를 버젓이 달았다. 이뿐만 아니다. ‘데이트 폭력’을 웃음 코드로 사용한 웹툰 ‘상남자’, 여성 비하 가사를 담은 가수 브로의 ‘잡쉈잖아’, 남성이 김치녀의 공격에 공동 대응한다는 SBS ‘웃음을 찾는 사람들’의 코너 ‘남자끼리’ 등이다. 이런 대중문화 속 여성 혐오 콘텐츠는 남성 혐오를 불러오고 이것이 일상 속의 이성 혐오로 구조화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 남성 혐오 혹은 여성 혐오에 대한 혐오

여혐에 맞선 남혐은 메르스 갤러리, 메갈리아 등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 게시물을 중심으로 번지는 추세다. 바나나(남성 성기를 상징)를 자르는 모습이나 여성이 남성을 집단 구타하는 그림 등이 올라오고 통쾌해하는 여성의 댓글이 수십 개씩 달린다. 하지만 이를 ‘남성의 여성 혐오와 동등하게 취급해선 안 된다’는 게 여성들의 주장이다. 한 20대 여성은 “남성 혐오가 아닌 여성 혐오에 대한 혐오(여혐혐)”라며 “남자가 ‘가슴이 작은 여자’를 놀리는 것에 여자도 ‘성기가 작은 남성’이라고 맞서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오른 여성들의 남성 집단구타 그림. ‘삼초한’은 3초마다 때려야 한다는 뜻이다. 인터넷 화면 캡처
젠더 갈등은 2000년대 초 군 가산점 논란 때도 벌어졌다. 하지만 지금처럼 이성 혐오로 번지진 않았다. 이에 대해 배은경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과거 남성우월주의의 사회 속에서는 여성이 남성을 공격할 화력을 갖추지 못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었던 것”이라며 “매체 환경이 변하면서 여성들도 온라인에서 남성들이 하던 풍자 방식과 똑같이 일종의 ‘미러링(Mirroring·거울효과)’으로 되받아치기 시작한 것”이라고 말했다.

○ 각박한 사회가 이성 혐오 불러

전문가들은 이성 혐오 현상을 사회 변화에 따른 문제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여성의 권리가 신장되고 경제 불황, 취업난 등으로 젊은 세대의 삶이 팍팍해지면서 반대 성에 의해 차별받는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짙어졌다”고 분석했다.

오프라인보다 온라인 소통이 증가하면서 나타난 ‘불통’ 현상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남궁기 연세대 의대 정신과학교실 교수는 “특정 현상에 대한 평가가 온라인에서 돌아다니다 보면 마치 전체를 대변하는 것처럼 증폭된다”며 “사치를 일삼는 일부 여성의 이야기가 ‘한국 여자=김치녀’가 돼 버리고 이후 사소한 잘못에도 ‘남자는 저래’, ‘여자는 저래’ 하는 식으로 확대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윤종 zozo@donga.com·김배중 기자

▼ 젊은이들이 말하는 대안은 ▼“여자들은 미래를 준비할 20대에 군대에 가는 남성의 괴로움을 잘 모른다. 반대로 남자들은 출산으로 인한 여성의 경력 단절을 모른다. 내 고충의 무게 때문에 타인의 고충을 보지 못하다 보니 혐오 감정이 키워진다. 역지사지(易地思之)가 필요하다.”(대학생 A 씨)

설문에 참여한 남녀는 이성 혐오 문화의 확산을 막을 방법에 대해 다양한 목소리를 냈다.

▽20대 여성 B 씨=여성이 군대 가서 겪는 이야기를 다룬 최근 웹툰 ‘뷰티풀 군바리’는 연재 초기 군 가산점을 둘러싸고 남녀 간 댓글 논쟁이 일었다. 연재가 계속되면서 남녀 간 생각의 차이를 알게 되자 남자들은 ‘군대 가는 것이 억울하진 않다. 다만 군대 가는 게 별 일 아닌 것처럼 무시하지는 말아 달라’고 적었고 여성들이 호응하면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됐다.

▽30대 남성 C 씨=일부 이성 혐오 사이트들이 마음속에서 이성 혐오를 느끼지 않던 사람들까지 선동할 가능성이 있다. 이를 막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

▽30대 여성 D 씨=초중고교 과정부터 토론과 소통을 통해 이성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태도를 길러 주는 교육이 필요하다.

▽20대 남성 E 씨=‘6포 세대’(연애, 결혼, 출산, 인간관계, 내 집 마련, 인생을 포기한 세대)라는 말까지 나오는 힘든 사회가 이성 혐오를 심화시킨다. 삶의 여유가 있는 사회가 돼야 한다.

이 밖에도 ‘이성 간에 좋은 점을 강조하는 SNS 글을 퍼뜨리자’, ‘남녀 간의 오해와 편견을 희석시키는 TV 예능 프로그램을 만들어 공론화하자’ 등의 의견도 나왔다.

김윤종 기자 zoz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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