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대넓얕' '피키캐스트' 인기..얕지 않은 '얕음' 지닌 대중문화가볍고 빠른 꿀팁에 매혹되다

2015. 5. 6.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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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적 다운로드 150만개(3월 한달)의 인기 팟캐스트 <지대넓얕(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진행자인 35세 무명작가가 쓴 동명의 책이 서점가를 휩쓸었다. TV에선 '우주의 얕은 꿀팁'을 슬로건으로 한 모바일 큐레이션 앱 피키캐스트의 CF 방영이 한창이다. 풍요로운 삶을 위한 깊이 있는 학문을 뜻했던 '인문학'이 '얕음'이라는 형용사를 달자 사람들은 열광했고, 스마트폰 유저들은 메이저 언론 대신 큐레이션 앱으로 뉴스를 접한다.

인기 팟캐스트 <지대넓얕>, 서점가 베스트셀러 2위

지난 3월 도심의 서점 4곳. 언론에서 단 한 줄의 서평도 써주지 않은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하 지대넓얕)이 베스트셀러 섹션에 전시돼 있다. 팟캐스트 '지대넓얕' 진행자이기도 한 저자 채사장이 펴낸 동명의 책 <지대넓얕:현실 세계 편>이 출간 10일 만에 베스트셀러에 오른 것. 예스 24 종합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3주째 2위를 지키는 가운데, 2권 격인 <지대넓얕: 현실 너머 편>이 새롭게 5위에 올랐다. 12월 출간 뒤 두 권 합쳐 33만부가 팔렸다. 무명작가의 데뷔작으론 놀라운 수치다. '지식 수준이 들통 날까 봐 대화 자리가 두려운 당신에게'라는 서평이 달린 이 책은 고대 노예제, 근대 자본주의의 전개, 세계대전과 대공황, 민주주의와 독재, 보수와 진보의 개념을 하나의 구조로 잇는다. 어설프게 알고 있었던 철학 상식들, 철학자들, 고등학교 때 멋 모르고 암기했던 과학 지식들, 난해한 예술 작품들, 막연했던 삶과 죽음 그리고 의식이 머릿속 그림으로 그려진다. 외워야 하는 숫자, 어려운 인명이나 지명 없이 말이다. 적어도 어떤 분야의 사람을 만나도 기본적인 지적 대화에 있어 소외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 책을 집어 들게 된다.

'지대넓얕'이 1000위권에서 5위권으로 진입한 이유는 개별 분야의 피상적 내용을 전달하는 대신, 하나의 분야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중요가 되는 열쇠가 되는 개념을 선별, 단순화한 데 있다. "2011년 친구들이 유명을 달리한 교통사고 이후 관심사가 물질적인 것과 경제, 금융, 부동산에서 정신적인 것과 종교, 신비로 바뀌었습니다. 사고 이전 관심사가 1권 현실 세계 편으로, 사고 이후 관심사가 2권 현실 너머 편으로 정리된 것입니다."(채사장) 지식이 쉽게 구조화되는 카타르시스

A가 "장이야"하고 B의 진영에 말을 내려놓는다. "장기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말이야, 머리를 써야 한다네. 자네는 머리를 쓰지 않는 게 문제네."(A) 당황한 채 장기판을 주시하던 B가 말을 움직이며 말한다. "멍이야" 이제 A의 중요한 말들이 위험해졌다. "삶의 경험은 생각만으로는 얻을 수 없지. 수많은 실수를 통해 우리는 장기판을 장악하는 법을 알게 돼."(B) 그때 등 돌리고 자고 있던 C가 화를 내며 걸어와 소리쳤다.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네! 너희 장기를 말로 하냐?"(C) 그리고는 장기판을 뒤엎어버렸다.

책 <지대넓얕>에서 진리를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절대주의(A), 상대주의(B), 회의주의(C)-를 설명하는 구절이다. 최근 한국출판인회의 종합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지대넓얕>은 2위를 기록했다. 한 저자의 책 2권이 동시에 베스트셀러 5위 안에 드는 것은 매우 이례적으로, 이 책 때문에 몇년 만에 책을 사서 보았다는 독자 후기도 올라온다. 팟캐스트라는 뉴미디어가 여기에 한 몫 했다. 성균관대 국문학과를 졸업한 채사장(필명)은 평범한 회사원이었다가 2011년 회사를 그만두고 책을 집필, 3년간 묵혀온 것을 최근 펴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형식을 따라 직접 쓴 듯한 메모, 그림으로 이해를 돕는 책은 중간 정리와 최종 정리로 챕터를 정리한다.

'얕은 재미' 내세운 모바일 큐레이션 앱의 인기

우주인이 김치를 들고 온다. 피키캐스트 에디터 에릭남은 평소 까칠하고 동문서답 하기로 유명한 '록의 황제' 노엘 갤러거의 인터뷰에서 '김치예요. 어젯밤 안 드셨어요?"라고 묻는다. B급 정서 충만한 CF에서 '우주의 얕은 꿀팁' 슬로건으로 화제를 모은 피키캐스트 페이스북은 1년 만에 100만 팬을 확보했다. 4월 29일 현재 1위를 기록한 '여자를 행복하게 하는 남자의 조건 7가지'는 조회수 28만개, 좋아요 3134개, 공유 3862개를 기록하고 있다. 웬만한 거대 언론사는 따라가지도 못할 수치다. 월간 활동 이용자는 340만명(2월)으로 1일 평균 이용시간도 12.1분으로 카카오스토리(4.7분)보다 길다. '위키트리', '허핑턴포스트코리아' 같은 블로거가 만든 뉴스 큐레이션 서비스, 피키캐스트와 유사한 '꿀팁' '정보특공대' 등이 탄생하면서 콘텐츠를 가장한 광고, '불펌'에 대한 논란도 생겨나고 있다. 탐사보도 전문매체 <뉴스타파>의 '어느 대학생의 '총장님 업무추진비' 추적기)(2015/4/17) 영상은 튜브 채널에서는 29일 현재 1만200여 개를 기록한 반면, 캡처 이미지·몇 초 분량의 동영상·짧은 글로 이뤄진 피키캐스트의 '식사 한 번에 130만원 쓰는 총장-뉴스타파'(by 뉴욕남) 게시물은 조회수 30만개를 기록했다. 구구절절 늘어놓는 기사 대신 터치 한번에 넘어가는 슬라이드 이미지, 짧은 글, 영상으로 네티즌을 끌어들인 것이다. 관심사와 취향에 맞는 정보를 맞춤 구독하는 것을 향해 과연 '얕다'고 할 수 있을까? Interview| "인문학 디테일 대신 전체 구조 살피며 소설책처럼 읽었으면"

무명작가가 쓴 인문학 책이 광고도 없이 33만부나 팔려나갔다. 출간 열흘 만에 베스트셀러가 된 1권에 이어 두 달 뒤 나온 2권도 대박이 나자, 동명의 팟캐스트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역시 10위권 내 순위를 지켜내고 있다. 신자유주의, 미스터리, 미술사에 관심이 많으며, '얕음'이라는 키워드가 인문학 트렌드로 여겨지는 것이 싫다는 그를 만났다.

실명을 안 밝히는 이유는?

난 작가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끄집어내졌다'고 생각한다. 2011년 사고가 나기 전까지는 돈 벌 생각 밖에 없었다. 논술교사, 주식 투자, 부동산 임대, 창업도 두 번 했는데, 양적 완화 때문에 최근엔 그만뒀지만 사실 주식투자가 가장 내 정체성과 맞는 것 같다. 책이나 팟캐스트는 내 삶의 일부분일 뿐이다. 채사장이라는 인격이 내 진짜 삶을 장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적 다운로드는 300만개, 한 에피소드 당 8만명이 듣고 있다. 책도 베스트셀러가 됐고. '나만 몰래 좋아했던 찐따 남학생이 갑자기 여자들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는 느낌'이라는 후기를 봤다.

인터뷰를 미치도록 많이 했다. 방송에서도 처음엔 쉽게 감정을 내보이고 말도 막 했는데 이젠 좀 주저하게 된다. 현재의 반응은 거품이라고 생각한다. 나머지 세 명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인데 '얕은 지식이다'라며 욕 먹게 한 것도 미안하다. 40대 중 후반 남자들이 주요 청·독자들인데, 양주 같은 것 사 들고 오셔서 본인이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도전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보람차다.

'지대넓얕' 진행자는 어떻게 뭉치게 됐나?

신자유주의 철학, 예술, 과학, 미스터리 오컬트에 관심 많은 나를 필두로, 종교학, 철학, 교육학 등 순수학문에 관심이 많은 깡선생, 독실한 기독교인에다 과학을 신봉하는 이독실, 10년 동안 동양철학과 명상학 박사 과정을 공부한 김도인(실제로 계룡산 등지에서 실전 명상을 오래 했다)과 일을 하며 각각 만났다. 모이면 평범한 얘기 대신 죽음과 철학에 대해 이야기하더라. 그런 것들을 기록해두고 싶어 시작했다. 방송 없으면 안 만난다. 별로 안 친하다, 하하.

'지대넓얕'이 왜 이렇게 인기일까?

인문학이나 교양에 대한 열광은 아닌 것 같다. 인문학에는 트렌드가 없으니까. 기대 없이 듣고 기대 없이 읽었는데 새롭다는 느낌을 받은 것 아닐까. 직업이 분업화되고, 전문가도 너무 많아져 현실에선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없어졌다. 그런 상황에서 잘 모르는 애들이 나와서 아무렇지 않게 떠드니까. 인문학이 고결해지면서 상아탑 속 학자들은 원서를 경전처럼 떠받든다. 모든 이야기의 절반을 인문학적 근거를 들며 이야기하는 교수님이 있었는데, 내용은 하나도 기억 안 나더라.

대중이 '얕은 지식'에 열광하는 이유는?

'얕은 지식'이라는 제목이 싫어 김도인과 깡선생도 계속 바꾸자고 했다. 듣보잡 저자의 인문학 책이 전체 인문학 책보다 잘 팔리니까 원래 있었던 내용을 '얕게' 요약했다는 인문학 저자들의 비판도 있고. 개인적으론 '인문서가 아니라 철학서'라는 반응이 마음에 들더라. '얕음'은 아무 의미가 없다. 1권에서는 보수와 진보를 경제체제와 연결한 것에 대한 비판을, 2권에서 하이데거나 미술사를 내 멋대로 정리한 것에 대한 비판을 예상했지만 대신 '얕다'는 비판만 있더라. '아 아무도 안 읽는구나' 싶었다. 어려운 내용을 어렵게 이야기하는 것만큼 무의미한 게 있을까? 쉬운 것과 얕음을 혼동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 택시 운전, 의사, 핸드폰 판매원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자신들만의 노하우가 있지만 서로 공유할 수 있는 공통분모는 '소통을 위한 교양' 아닐까.

최근 팟캐스트의 인기로 책을 내는 이들이 많은데.

사실 책은 2011년에 1권이 완성돼 있었기 때문에 트렌드에 맞췄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읽을 사람도 없다고 생각했고, 책을 내 줄 출판사도 없었다. 팟캐스트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낸 거다. 옛날 제목 그대로 '지적 대화를 위한 교양'으로 하려 했는데 출판사가 반대하더라(웃음).

힘들었던 순간 vs 보람 찬 순간이 있다면?

다들 타인의 평가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편들이라, 악플에 대한 고민은 없다. 성격이 강하지만 싸우진 않는다. 좋았던 건 '외계인' 에피소드, 가장 아쉬웠던 것은 '미술사' 에피소드. 초기에는 규칙이 있었는데, 지금은 각자 일을 하면서 시간을 맞춰서 지속적으로 하는 것만으로도 피로도가 높다. 첫 방송 '사후세계' 때 재미를 느꼈다. 스트레스도 풀리고. 수익도 없었다. 여름엔 링거까지 맞았다. 시간을 내기 어려워 중간에 그만두고 싶었다. 하지만 일하다 보면 책 찾아보고 공부할 시간이 없는데 그런 기회가 되는 것 같다.

'지대넓얕'을 어떻게 읽었으면 하나?

목차만 보고 '잡다한 지식을 묶어놨네'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다. 기존의 인문학에서 다루는 디테일 대신 세계의 구조를 전달하고 싶었다. 1권에서는 소수의 지배자와 다수의 피지배자가 역사·경제·정치·사회·윤리에서 어떻게 발현했는지, 2권에서는 진리에 대한 3가지 태도(절대주의, 상대주의, 회의주의)가 철학, 과학, 예술, 종교, 신비 등에서 반복되는 구조를 쓰고 싶었다. 겁도 없이 폭력적으로 세상을 단순화시켰다고 볼 수도 있지만 디테일에 집중하지 말고 각각의 챕터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따라가기만 하면 구조가 보일 거다. 소설책 읽듯이.

어떻게 이렇게 다방면의 지식에 정통한가?

자기 분야나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라고 하면 다들 잘 할 거다. 그런데 1등 전문가만 빼고는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2011년 이후에 책을 거의 안 읽었다. 베스트셀러는 더더욱. 책을 쓸 때 참고 서적 없이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을 떠올리며 썼다. 인생은 CD 같다. 모든 사람에게는 1장의 CD가 주어지는데 어떤 사람은 재즈만 넣고, 어떤 사람은 클래식, 가요, 민요를 모두 넣지만 정보의 총량은 같다. '영혼' 에피소드에서 밝혔는데, 우리 영혼은 따로 있고, 여긴 잠깐 배우러 온 거라고 생각한다. 인생은 어차피 잠깐 여행하는 거니까, 이 인기도 금방 끝나겠지.

[글 박찬은 기자 일러스트 포토파크 사진 허준석(그루픽쳐스)]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477호 (15.05.12일자)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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