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하고 싶은 일이 없어요"..한국 팬에게 준 하루키의 충고는?

유성재 기자 2015. 4. 29.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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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보도국에서 방송통신위원회와 IT를 담당하고 있지만 은근슬쩍 문학계도 기웃거리고 있는 문화과학부 유성재 기자입니다. 지난 3월 말에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출판사 신쵸사(新潮社)가 운영하는 '기간 한정, 독자와의 질문-답변' 사이트에 대한 취재파일

(▶[취재파일] "역사를 제대로 돌아봐야"…하루키, 반성 없는 日에 쓴소리)

로 인사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취재파일에서 약속에 철저한 하루키(와 출판사)의 성격을 고려하면 3월 말까지로 예고된 이 사이트의 공개 기한이 3월 31일로 끝나 그날 밤 11시 59분에 폐쇄될 것으로 보인다고 '예상'을 했었는데, 혹시 기억하시는지요. 네, 하루키 팬들은 이미 아시겠지만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습니다. 취재파일을 쓴 이틀 뒤에 이런 글이 올라왔거든요. 제가 괴발개발 번역했습니다.

예상이 빗나가 조금은 부끄러웠지만, 모처럼 하루키와 독자들간의 생생한 문답을 조금 더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그 사이 부지런한 하루키는 역시나 하루에 십여 개씩의 답변을 사이트에 올렸는데요, 4월 22일에 올라온 2만 6천번째의 메일은 마침 한국의 팬이 보낸 것이더군요. 잠깐 보겠습니다.

질문 :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에 있는 하루키 씨의 팬입니다. 상담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사실은 여러 개가 있지만 제한이 있으니까 하나만 할게요. 저는 유복한 부모님 덕에 지금까지 아무런 고생 없이 살아 왔습니다. 최근에는 이렇게 유복한 저의 인생이 조금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어 버렸습니다. 뭔가 엄청나게 하고 싶은 일도 없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루키씨도 이럴 때가 있으시겠지요. 이럴 땐 어떻게 하면 좋을지, 하루키씨의 생각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주희, 여성, 28세, 무직)

답변 :

안녕하세요. 당신의 메일이 26000통 째가 됐습니다. 기념으로 암호명을 드리겠습니다. 당신의 암호명은 '삿포로로 기린(サッポロできりん)'입니다. 특별히 의미는 없습니다만, 마음에 드신다면 사용해 주세요. 맥주는 좋아하시나요?

'하루키 씨도 이럴 때가 있으시겠지요'라고 쓴 부분에 관해서입니다만, 그런 일 따위 제 인생에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저는 전혀 유복하지가 않았기 때문에 살아가기 위해 줄곧 열심히 일을 해 왔습니다. 언제나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당신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저라면 큰 백팩을 짊어지고 혼자서 훌쩍 네팔이든 어디든 가겠습니다만, 당신은 아마도 그런 타입은 아닐 것 같네요. 어쨌든 지금까지 해 본 적이 없는 일을 해 보면 어떨까요? 지루하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병입니다. 힘을 내서 뭔가 지루하지 않은 일을 찾아봐 주세요.

(원문 보기)

어떻습니까? 조금 한가해 보일지도 모르는 질문에 대한, 그야말로 하루키다운 답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루키가 이 독자에게 제시한 암호명 '삿포로로 기린(サッポロできりん)'은 단순히 일본의 맥주 브랜드 두 개를 조사 で('데')로 연결한 단어가 아니라는 느낌이 듭니다. 2만 6천번 째 메일에 기념으로 주는 것이라면 뭔가 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지 않으신가요? 저는 일본어를 썩 잘 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건 그냥 추측일 뿐이지만, 한 번 봐 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삿포로'입니다. 그리 품위있는 말은 아닙니다만 비슷하게 발음되는 동사 サボる('사보루')는 '게으름피우다, 농땡이부리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또 조사로 이어지는 で('데')와 きりん('기린')을 붙이면 できりん('데키린')이 되는데, 어쩐지 '할 수 있다'는 의미의 동사 できる('데키루')의 부정(不定)인 できない('데키나이')를 떠올리게 합니다.

나름의 추측을 마구 섞어서 해석하면 '게으름 피우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의미처럼 보인다는 얘기입니다. 하루키는 혹시 '암호명'이라는 껍데기를 씌운 말장난을 통해 이 독자에게 따끔한 충고를 준 것이 아닐까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초급을 간신히 넘긴 정도의 일본어 실력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본 것이니 여러분 가운데 일본어 능력자 분이 계시다면 이에 대한 의견을 메일로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무튼, 이 글이 올라온 22일에는 마침내 사이트 종료 시점을 알리는 공지도 게재됐습니다.

(공지 원문 보기)

출판사 측에 따르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답변은 4월 30일에 업로드가 중지되고, 사이트 전체가 폐쇄되는 것은 2주 뒤인 5월 13일이라고 합니다. 그 외에 눈에 띄는 내용도 있습니다. 물론 모두가 예상하고 있었던 내용이겠지만, 출판사 측은 사이트가 종료된 다음에 그동안 사이트에 올라왔던 하루키와 독자와의 문답을 적절한 편집을 거쳐 가까운 시일 내에 출판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본인의 질문에 하루키가 답변을 해서 사이트에는 공개가 됐지만 책으로까지 나오는 것은 곤란하다는 독자가 있다면 사이트 종료 전까지 연락을 달라는 당부도 있고, 출판을 위해 부득이하게 질문의 길이가 짧아질 수 있으니 양해해 달라는 말도 잊지 않았네요. 이렇게 철저한 걸 보면 이번에는 공개된 대로 5월 13일 오후 2시에 사이트가 정확하게 폐쇄될 것으로 보입니다. 설마 이번에도 틀리게 될까요?

앞서 하루키가 한국 독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할 일이 없다면 백팩을 메고 네팔에라도 가라'고 했는데, 그 사이 공교롭게 네팔에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누구나 돕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그곳으로 훌쩍 떠나기는 어렵겠지만, 엄청난 재해를 당한 네팔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게 있을지 잠시 생각해 보시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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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재 기자 veni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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