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고사' 지원 확대 배경엔 정치권 입김·민족주의 정서 활용 의도

임아영 기자 2014. 4. 1.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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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장관 직접 챙긴 '상고사'
지난해 국회 특위서 논의 학계선 '위험한 발상' 비판"고대의 영광 확인 통해 현실 불만 해소하려는 것"

서남수 교육부 장관이 직접 관련학자들을 만날 만큼 정부가 상고사에 관심을 갖고 지원을 확대한 것은 정치권의 압력, 그 배후에 깔린 민족주의적 사고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박근혜 정부에서 보수 우파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널리 확산되면서 '민족의 영광'을 확인시켜 주는 상고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이다. 이 같은 움직임은 제도권 역사학계가 그동안 외면했던 상고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반면 상고사 연구가 미진한 상태에서 지원 예산이 엉뚱한 곳에 쓰일 가능성도 높다.

■ 정치권 움직임

서남수 교육부 장관

정치권에서는 지난해 6월 구성된 국회 동북아역사왜곡특별위원회가 중심이 돼 상고사 연구를 강화하자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12월에는 특위가 상고사 관련 공청회를 열기도 했다. 특위 위원장인 새누리당 남경필 의원은 지난해 8월 한 라디오 방송에서 "국회 산하에 '역사 바로쓰기' 기구를 설립해 정파와 역사관을 떠난 중립적인 학자가 모여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로 써야 한다"며 "조선사, 특히 상고사가 너무 왜곡됐기 때문에 이런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식민사학의 교과서'로 비판받는 일제강점기 조선사편수회가 편찬한 < 조선사 > 35권을 번역하는 사업도 동북아특위에서 추진하기로 논의된 것이다. 이 사업은 한국연구재단이 맡아 5년간 5억원씩 지원하며 9월 중 공모할 예정이다.

이 사업에 대해서는 특위 내에서도 논란이 있었다. 새누리당 김세연 의원 측은 "상고사부터 역사적 논란이 있으니 < 조선사 > 연구를 이제라도 제대로 해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의원들끼리 의견이 모아진 것"이라고 밝혔다.

반면 같은 특위 소속인 민주당 강창일 의원은 "식민사관을 번역해서 널리 배포하겠다는 것이냐"면서 "번역보다는 일제가 < 조선사 > 를 왜 썼고, 어떻게 왜곡했는지를 연구하고 알리는 데 힘써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동북아역사재단 관계자는 " < 조선사 > 는 한·중·일 사료에서 뽑아 편년체로 역사를 정리한 내용으로 이미 상당 부분 번역돼 있다"며 "번역의 의미가 없다고 본다"고 밝혔다.

상고사 지원을 주도해온 김세연 의원 측은 "한사군과 왕검성의 위치, 고조선 영토 크기 등 기존 학계의 연구가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보니 교과서도 치우쳐 있다"며 "재야사학자들이 사료를 부풀려 고조선사를 확대 해석한다는 논란이 있지만 이들에게도 연구를 지원해 학문적으로 넓혀야 한다"고 말했다.

■ 학계 반응

상고사를 확대 해석하는 관점은 보수 우파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반영이라는 시각이 많다. 영광스러운 고대사를 복원해 민족을 하나의 구심점으로 모아보겠다는 뜻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해 광복절 축사에서 학계에서는 위서로 평가받는 상고사 역사서 < 환단고기 > 의 한 구절인 '나라는 인간에 있어 몸과 같고(國猶形) 역사는 혼과 같다(史猶魂)'는 구절을 인용하기도 했다.

학계에서는 상고사 연구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현재 상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제도권 학계에 관련 전공자가 많지 않다 보니 이미 지원된 일부 사업은 비전공자들에게 사업 예산이 돌아갔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새로 지원받은 5억원으로 10개 사업을 기획하고 있으나 고조선 전공자가 많지 않아 고민 중이다.

서영수 단국대 역사학과 교수는 "중복 투자가 너무 많고 돈을 엉뚱하게 집행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동북아역사재단 관계자는 "중복 투자를 교육부에서 조율할 필요가 있다"며 "고조선 연구를 몇십년 해온 연구자가 가져가야 할 연구를 비전공자들이 가져가는 게 아닌지 의심된다"고 비판했다.

재야사학계의 검증되지 않은 학설이 범람할 것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있다. 임기환 한국고대사학회장(서울교대 사회과 교수)은 "사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기존 학계의 고조선 연구가 100% 맞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재야사학계는 근거 자료와 반대되는 자료가 있는데도 자기 입맛에 맞는 내용만 내세우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정연태 한국역사연구회장(가톨릭대 국사학과 교수)은 "정부가 오히려 재야사학자의 의견이 옳고 전문학자는 식민사학의 후예로 몰아가는 구도가 아닌가 걱정된다"고 말했다.

정치권이 민족주의 정서를 활용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혹도 있다. 한 역사학과 교수는 "고대의 영광을 통해 현재의 불만을 해소하려는 것"이라면서 "역사를 지나치게 국수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말했다.

한국역사연구회 이정빈 고대사분과장은 "민족이라는 구심점 아래 국민을 하나로 모으겠다는 것은 전체주의적 발상으로 변질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학계에서는 고대사 연구의 올바른 방향 설정을 논의 중이다. 한국역사연구회와 연세대 역사문화학과 BK21 사업팀은 지난달 22일 '식민주의 사학의 실상과 허상'이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열었다. 한국고고학회는 이번주 내 장관과의 만남에 대해 논의할 계획이다. 한국고대사학회는 7월에 고조선 문제와 쟁점 요소를 중심으로 한 학술대회를 열 예정이다.

< 임아영 기자 layknt@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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