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조선일보> 아니면 못 보는 이유

입력 2014. 1. 4. 19:31 수정 2014. 1. 4.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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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태희 기자]

부모님께 진보 시사 주간지를 보내다

두 달 전 모처럼 큰 맘 먹고 시사잡지 1년 정기 구독을 신청했다. 잡지를 받는 주소는 부모님 댁으로 했다. 올해 칠순이 되시고 팔순이 되시는 부모님 보시라고 신청한 것이었다. 물론 이 시사 주간지의 색깔은 '진보'였다.

우리 집도 대한민국의 평범한 다른 가정처럼 부모님은 진보 정당을 '빨갱이' 내지는 '종북 세력'이라며 보수당에 투표하시고, 자녀들은 보수 정당을 '수구 세력'이라며 반대당에 투표한다. 어쩌다 집에서 시사적인 현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 아버지는 < 조선일보 > 에서 읽은 이야기를 하시고, 자녀들은 반대 논조를 가진 신문에서 읽은 이야기를 서로 쏟아 놓는다.

< 조선일보 > 를 15년이 넘게 구독하신 아버지의 말씀은 점점 더 그 신문이 주장하는 내용을 닮아 가신다. 그래서 과감하게 아버지가 현재 보시는 신문과 반대편 논조를 가진 시사 주간지 정기구독을 신청했던 것이다. 한쪽 의견만 읽지 마시고 반대 의견도 읽어 보신 후 종합적으로 판단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어르신께 시사 주간지를 권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냐는 우려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충분히 읽어보실 분이다. 아버지는 지금도 신문을 이 잡듯 샅샅이 몽땅 읽어버리신다. 어르신을 위한 컴퓨터 강좌도 몇 년 동안 수강하신 후 지금은 소일거리로 다른 어르신들을 위해 컴퓨터 강사를 하고 계신다. 그런 아버지라면 직접 돈을 내고 사서 보거나, 인터넷에서 찾아 읽지는 않더라도, 집에 시사 주간지가 굴러다니면 읽어볼 분이기 때문이었다. 부모님의 균형 잡힌 시각을 위해 과감하게 투자를 하니 은근히 뿌듯했다.

"엄마, 아마 이번 주 내에 우편물이 하나 갈 거야."

"뭔데?"

"잡지야, 아버지 이름으로 가니까, 한번 읽어보시라고 그래. 내가 담에 가면 그거 가져갈 거니까 버리지 말고. 알았지?"

"그래, 알았다."

예상 못한 태클, 글자 크기라는 복병

약 한 달이 흐른 후 갈 일이 생겨 서울 부모님 댁으로 갔다. 그랬더니 그동안 배달된 시사 주간지 4주분 중 두 개나 포장도 뜯지 않은 채 쌓여 있었다.

"아빠!!!! 이게 뭐야!!!! 내가 읽어 보랬잖아!!! 껍질도 안 뜯었어? 너무 해!!!"

"야! 이거 봐라. 두 개는 뜯어서 봤다."

"근데, 두 개는 왜 포장도 안 뜯었어?"

"이게 보이냐? 이만한 글씨를 늙은이가 어떻게 봐. 눈 밝은 젊은 애들이나 보이지. 글씨가 너무 작아서 못 봐! 보고 싶어도 못 보는 걸 어떡해."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태클이 들어왔다! 아버지께 어떤 시사 주간지를 보내드릴까 고민하며 < 시사인 > , < 한겨레21 > , < 주간경향 > 등을 꼼꼼히 훑어보았을 때, 내용만 생각했지 글씨 크기 따위는 고려해 볼 생각조차 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 < 조선일보 > 는 어떻게 봐?"

"그건 글씨가 커. 얼마 전에 글씨를 더 키운 거 같아."

왼쪽은 < 시사인 > 기사이고, 오른쪽은 < 조선일보 > 기사.

ⓒ 김태희

당장 < 조선일보 > 와 내가 보내드린 < 시사인 > 을 펼쳐 글씨 크기를 비교해 보았다. 확연히 글씨 크기에 차이가 있었다. 글씨 크기가 다르다는 사실을 이날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두 매체의 글씨가 다 보이기에 나는 편하게 읽은 후 기사의 품질을 평가해 왔다. 하지만, 어르신들은 보수와 진보의 의견을 모두 읽고 기사의 품질을 평가하고 싶더라도, 글씨 크기라는 또 다른 장벽을 넘지 못해 아예 포기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시사 잡지 표지. 왼쪽부터 < 한겨레21 > < 시사IN > , < 주간경향 >

ⓒ 김태희

주간지 글자 크기 비교. 왼쪽부터 < 한겨레21 > < 시사IN > , < 주간경향 > .

ⓒ 김태희

그 다음 주, 다시 부모님 댁으로 갈 때, 가방 속에 < 시사인 > , < 주간경향 > , < 한겨레21 > 세 권을 모두 구해 가지고 갔다. 아버지께 어떤 잡지의 글씨가 보이느냐고 여쭤 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세 잡지 모두 글씨가 작다고 하신다. 그나마 < 한겨레21 > 의 글씨가 조금 컸지만 < 조선일보 > 와 비교해 보면 작은 글씨였다.

할 수 없이 잡지사에 전화를 걸어 1년 정기구독을 취소했다. 잡지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라 글씨 크기 때문이라는 사정을 이야기하며 글씨 크기를 키울 계획은 없는지 물었다. 전화를 받으시는 분도 매우 안타까워 하시며, 어르신들께 이런 내용의 전화를 많이 받았다고 했다. 나처럼 부모님께 잡지를 보내드렸는데 정작 어르신들은 글씨가 작아서 읽지 못한 경우가 많았나 보다. 이 내용을 꼭 건의해 보겠다고 했다.

"아빠, 건의해 본대. 그리고 나도 이거 기사 쓸 거야."

"야, 그게 될 거 같아? 글씨 크기를 키우면 기사 분량이 늘어나는데, 지면을 무한정 늘릴 수도 없고 어떻게 키워? 안 돼."

"아니야, 아빠. 꼭 글씨 크기 키우게 할 거야!"

"너 하나가 건의한다고 그게 되겠냐."

진보는 소통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그래서 지금 이 기사를 쓴다. 선거 때마다, 정치적 사회적 현안이 생길 때마다, 어르신들은 항상 보수 신문의 의견을 말씀하신다. 어르신들은 왜 막무가내로 저러실까 의아해 했는데, 그 의문의 일부분이 풀린 것 같다. 진보의 의견은 읽을 수 없어서가 아니었을까?

< 조선일보 > 가 글씨 크기를 키웠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인터넷을 찾아보니 본문 활자를 9.8포인트에서 10.2포인트로 키우고, 자간 등을 미세하게 조정해서 정보량이 거의 줄지 않도록 했다는 기사를 찾았다. 물론 이렇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독자 대부분이 어르신들이니 이 신문은 어르신들이 볼 수 있도록 이렇게 신경을 쓰는 것이 당연할 것이라고. 그에 비해 진보 매체는 주 독자층이 젊은이들이니 글씨 크기 따위에는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만, 글씨 크기를 크게 하고 읽기 편하게 하면 '누구나' 편하게 볼 수 있지만, 즉 어린이부터 어르신까지 '모두' 볼 수 있지만, 글씨 크기를 작게 하면 현재 젊음이라는 특권을 지닌 이들만 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젊은이들도 시간이 흘러가면 늙어갈 것이고, 진보 매체의 작은 글씨를 더 이상 읽을 수 없는 날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큰 맘 먹고 질렀던(?) 1년 정기구독을 취소하고, 그동안 받았던 시사 주간지 6권의 구독료를 보냈다. 안 그래도 어려운 살림일 텐데 잡지사에 돈을 주었다 빼앗는 느낌이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글씨 크기가 커지면 다시 부모님께 보내드리겠다고 진심으로 말씀드렸다.

과연 아버지는 진보 주간지를 다시 받아보실 수 있게 될까? 그래서 균형 잡힌 시간을 마련하는데 도움을 받으실 수 있게 될까? 진심으로 다시 한 번 호소해 본다. 제발 어르신들도 볼 수 있도록 충분한 크기로 글씨를 키워달라고. 젊은이만 볼 수 있는 시사 주간지가 아니라 한글을 아는 모든 이가 볼 수 있는 시사 주간지가 되어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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