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잔혹한 오이디푸스, 그 현실적 반영

2013. 10. 14. 11:5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강성률의 씨네포커스] 장준환 감독의 < 화이 >

[미디어오늘 강성률 영화평론가·광운대 교수] * 스포일러 있습니다.

장준환 감독의 < 화이 > 는 매우 '센' 영화이다. 이 영화가 세다는 의미는 단지 잔혹한 방법으로 사람을 죽여서 하는 말이 아니다. 물론 이 영화의 살해는 그 빈도도 높고 방법도 잔혹하며 무엇보다 시각적 스타일로 극대화시켜 놓았기 때문에 편하게 볼 수가 없다. 이렇게까지 잔혹하게 그릴 필요가 있었는지, 잠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를 곱씹으면 반드시 '세게' 살해를 그려야만 한다.

여기서 영화가 세다는 것은 살해의 내용, 즉 아버지를 죽이기 때문이다. < 화이 > 의 화이는 아버지를 모두 죽인다. 그렇다. 화이는 아버지를 모두 죽인다. 여기서 모두 죽인다는 말은 화이에게는 아버지가 여러 명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영화에 의하면, 화이는 다섯 아버지에 의해 길러졌다. 그 다섯 아버지는 어린 화이를 유괴해 키웠는데, 그들의 직업이 마침 '낮도깨비'라는 별명을 지닌 잔혹한 갱들이다. 운전, 총격, 칼, 열쇠 따기 등 각각의 능력을 지닌 전문 갱들. 그들은 화이를 키우면서 자신들의 능력을 하나씩 전수한다.

영화 < 화이 > 포스터.

화이를 자신들과 똑같은 갱으로 만들려는 리더 석태는 그를 범행 현장으로 데려가는데, 그곳에서 엄청난 비밀을 알게 된다. 자신의 친아버지를 죽여야 했던 것. 석태의 요구에 겁에 질린 화이는 결국 그를 살해하고, 어머니는 보호한 채 집으로 돌아온다. 당연히 죄의식에 빠지게 된 화이. 유괴된 그를 그토록 기다린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마저 죽이려 했던 자신,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다섯 아버지를 보면서 화이는 변하게 된다.

어머니를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친아버지의 복수를 갚기 위해 이제 화이는 다섯 아버지에게 복수를 감행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화이의 공격을 받으면서 다섯 아버지는 묘한 만족감과 불안감을 동시에 보인다. 자신들이 키운 화이의 능력이 대견하면서도 불안했던 것. 그것이 아버지의 심정일까? 이상하고 기묘한 이 역설.

결국 화이는 자신을 키운 석태와 마지막으로 대결하게 된다. 그리고 묻는다. "아버지, 왜 저를 키우셨어요?" 정말 석태는 왜 화이를 키운 것일까? 자신에게 총부리를 겨눌 아들을, 그 존재를 알고 키운 것일까? 이보다 더 근원적인 질문. 석태는 왜 자신을 사랑하고 포용해준 형택에게 육체를 훼손한 것을 넘어 그의 아이마저 유괴해 죽이지 않고 키운 것일까?

영화 < 화이 > 의 한 장면.

이 영화가 이상한 것은 장준환은 석태의 입을 통해 모든 이야기를 해버린다는 것이다. 후반부의 그 지루한 플래시백과 일방적인 독백이자 강요는 그래서 불편하기까지 하다. 지루한 고백. 자신이 어린 시절 본 괴물을 화이도 보니 자신이 그런 것처럼 괴물이 되어 괴물을 없애라는 그 말. 그 길을 같이 걷도록 석태는 화이를 데려와 키워 형택에게 복수를 한 것일까?

장준환은 화이의 복수심을 매우 상세하게 그리지만 정작 중요한 문제, 화이의 진짜 육체적 친아버지와 어머니가 누군인지는 정확하게 말하지 않고 상징적 대사를 통해 관객들이 유추하도록 만들어 혼란을 자초한다. 때문에 관객들은 화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석태와 형택 사이에서 고민하고, 심지어 화이의 어머니를 두고도 고민한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이것이 아니다.

화이는 선과 악의 공통 분모를 지니고 있는 아이이다. 학교를 다니지 않는 아이가 끝까지 교복을 입고 다니는 것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화이는 그 안에 서로 다른 욕망을 지니고 있다. 그 욕망은 단순도식하면 형택의 숭고한 선과, 석태의 극악한 악으로 상징된다. 형택은 그 선으로 화이를 기다리고(그러다가 화이의 총에 죽고), 석태는 그 악으로 화이를 길러 자신과 같은 괴물이 되게 한다(그러다 화이에게 죽임을 당한다). 결국 같은 결론.

영화 < 화이 > 의 한 장면.

중요한 것은 화이가 모든 아버지를 죽인다는 것이다. 선도 죽이고 악도 죽인다. 인간을 구성하고 사회를 구성하는 선과 악의 양 뿌리를 모두 거부하며 그들을 죽여버린다. 영화에 드러난 것처럼, 화이는 향나무의 일종이다. 사람이 죽은 뒤 관을 만드는 나무. 죽은 사람의 부패를 위장하기 위해 피우는 향불의 소재. 그 이름처럼 화이는 아버지를 모두 죽인다. 심지어 자신마저 죽인다. 화이가 보는 괴물의 다리가 나무뿌리처럼 되어 있고 < 화이 > 의 포스터가 나무 뿌리로 된 인간을 그린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화이는 그 뿌리를 거부한 것이다.

노골적으로 < 화이 > 에 대해 단평하면, < 화이 > 는 가장 직접적이고 폭력적이고 적극적으로 아버지를 죽이는 영화이다. 이제까지 한국영화사에서 이런 영화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버지 세대의 모든 것을 거부하면서 모성의 세계로 돌아간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런 특성은 장준환의 '전설적인 데뷔작' < 지구를 지켜라 > 에서도 그려졌다는 것이다. 병구는 어머니를 병들게 한 나쁜 행동은 외계인의 짓이라 생각하며 잔혹하게 복수한다. 그 때문에 강사장을 유괴하고 고문한다. 자신을 감싸줄 어머니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병구가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았다. 결국 병구는 점점 이윤만 취하고 노동자의 인권과 권리는 보지 못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되고 병들어 자신만의 복수를 감행했다. 그로부터 10년 뒤 장준환이 본 세상은 이와 다르지 않다. 아니, 더 가혹해졌다. 선이든 악이든 아버지 세대의 모든 것을 죽여 과감히 단절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을 길러준 어머니를 보호한다.

그런데 화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버지 세대가 준 공포로부터 벗어난 것일까, 그 공포의 노예로 묶여버려 또 다른 아버지가 될 것인가? 과연 화이는 괴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사실 나는 화이가 자유로울 것인지 아닌지에 큰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아들 세대에게 짐만 지우는 지금의 아버지 세대를 과감히 죽인 그 용기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와 화이를 옹호하고 싶다. 지금의 아버지 세대는 1980년대에 사회변혁을 부르짖은 이들이든, 자신의 이득만 추구한 이들이든 모두 기성세대의 틀에 철저히 갇혀 아들 세대의 목을 조이고 있다. 그 아버지'들'을 죽여야 아들들이 자유로울 수 있다고 < 화이 > 는 말한다. 때문에 < 화이 > 는 아버지 세대가 보아야 한다. 아들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으려면!

Copyrights ⓒ 미디어오늘.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Copyright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