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소문 난 스피커의 비결, 해고 뒤 덮쳐온 절실함

2013. 6. 18.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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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스피커 '쿠르베' 만드는 박성제 MBC 해직기자…MBC 후배들에게 "자신감 회복해야

[미디어오늘 조수경 기자]

2012년 6월 20일 MBC 박성제 기자와 최승호 PD는 김재철의 MBC로부터 해고통보를 받았다. '김재철의 MBC'는 정영하 전 언론노조 MBC본부장, 이용마 전 홍보국장, 강지웅 전 사무처장 등도 해고했다. 벌써 1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다. 기자가 만난 이들의 일상은 단지 복직의 '그날'을 위해 '버티고 있다'란 표현은 어울리지 않은 것 같았다. 그들 모두 '그날'을 간절히 바라고 있지만, 각자가 현재삶을 충실히 만들어가고 있는 모습이다. 해직1년을 맞이한 MBC해직 언론인들을 연쇄적으로 만나 그들이 만들고 있는 '단단한' 삶의 일상들을 들어보았다 < 편집자 주 >

서울 양재동 공방에는 자작나무로 만든 속이 뻥 뚫린 크고 작은 원통들이 가득했다. 여러 개의 직사각형 사포와 투명한 올리브색의 고급 천연오일도 있었다. 그 사이로 공방 직원들에게 뭔가를 말하고 있는 박성제 MBC 해직기자가 보였다.

공방을 채운 재료들은 스피커 '쿠르베(Courbé)'를 만드는 데 쓰인다. 쿠르베가 '곡선의'이란 뜻을 지닌 프랑스어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을 눈치 챘겠지만, 이 스피커는 원과 곡선으로 이뤄져 있다. 자작나무 원통은 인클로저(스피커 통)로, 여기에는 오디오 전문가가 설계한 네트워크(전기회로)와 세계적인 유닛(진동판) 제조업체인 노르웨이 SEAS사가 만든 유닛이 장착된다. 인클로저 제작부터 조립까지 모두 수작업으로 이뤄진다.

쿠르베를 처음 접한 이들은 우선 이 독창적인 디자인에 놀라게 된다. 대개의 스피커들은 하나의 인클로저로 이뤄져 있는데, 이 쿠르베는 인클로저가 무려 3개. 고역을 담당하는 트위터(가칭 주파수 4,000㎐ 이상), 저역과 고역 사이를 담당하는 미드레인지(1,000~10,000㎐), 저역을 담당하는 우퍼(3,000㎐ 이하)를 분리시켰다.

▲ 박성제 기자가 그린 3way 스피커 '쿠르베'. 스탠드 밑에서부터 순서대로 우퍼, 미드레인지, 트위터가 각각의 인클로저에 담겨 분리돼 있다. ⓒ박성제

쿠르베를 탄생시킨 박 기자는 14일 "한 인클로저 안에 트위터, 미드레인지, 우퍼를 한꺼번에 담으면 간섭이 일어나기 때문에 완벽한 소리를 구현할 수 없다"면서 "원칙적으로 분리하는 게 맞지만 기술적으로도 어렵고 만드는 데도 손이 많이 가서 그 동안 제작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쿠르베를 소개하는 브로셔에는 "특히 미드레인지와 우퍼가 완전히 분리돼 작동하기 때문에 기존 3way 스피커 설계상 난점이었던 중역과 저역대의 간섭 문제를 완벽히 해결했다"고 설명돼 있다. 쿠르베의 디자인은 외형뿐만 아니라 음질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 셈이다.

쿠르베의 위용은 공방 옆 건물에 따로 마련된 청음실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오디오 전문 잡지에서도 만나볼 수 없었던 이 스피커에선 묘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박 기자가 CD 한 장을 집어들었다.

헝가리 출신의 프란츠 리스트가 쓴 피아노곡 '라 캄파넬라'가 흘려 나왔다. 연주하기 어렵기로 이름난 라 캄파넬라는 빠른 속도(알레그로, Allegro)로 쉴 새 없이 이어지는 16분 음표와 32분 음표를 아주 정확하게, 그리고 라 캄파넬라 의미(종소리) 그대로 한 음 한 음 표현하는 것이 관건이다. 이 음악 앞에 놓인 스피커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역할은 피아노 건반이 내는 소리를 한 음도 뭉개지지 않고 선명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쿠르베가 들려준 라 캄파넬라는 아주 명징했고, 그래서 환상적이었다. 이 '좋은' 스피커는 라 캄파넬라의 어떤 매력을 놓치지 않았고, 청음실의 공기는 금세 우아해졌다. 쿠르베는 장르를 가리지 않았다. 재즈음악에 등장한 콘트라베이스의 낮은 음색이 주는 무게감은 우퍼를 통해 그대로 전달됐다.

'기자가 왜 스피커를…?'란 궁금증이 나올 법 하다. 이 유려한 스피커가 박 기자의 머리에 떠오른 건 올해 1월이다. 박 기자는 "해직되고 3~4개월이 흐른 지난해 가을께부터 공방에 다니기 시작했다. 아내가 6인용 식탁을 가지고 싶다고 말해서…"라고 했다. 초기엔 헤드세트 걸이, 리모컨 수납박스 등을 만들다가 스피커에 도전했다. "원래 스피커에 관심이 많았다"던 그는 직접 만든 스피커를 '해직 동료'인 최승호 PD가 있는 < 뉴스파타 > 에 기증도 했다. 그러다가 지금의 쿠르베를 구상하게 된 것. 반응도 좋았다. "원래 활동하던 동호회에서 쿠르베를 선보였더니 그 자리에서 선주문이 들어왔다. '이 정도면 되겠다' 싶더라."

▲ 쿠르베 Jr.(2way 스피커)의 새로운 모델.ⓒ박성제

상표 등록은 이미 마쳤다. 그는 1인 기업 'PSJ design'의 대표다. 얼마 전 새로운 디자인의 쿠르베도 만들었어 판매했다. 그의 머릿속엔 또 다른 쿠르베들의 디자인이 완성돼 있다.

자영업자로 살게 되니 전에 몰랐던 '새로운' 현실도 알게 됐다. 재료 구매부터 쉽지 않았다. 그는 해외쇼핑몰에서 쿠르베 재료를 구입하게 위해 신용카드로 결제하려던 했지만 실패했다. 은행에 가서 물어보자, "신용이 없어서 결제 최고 금액이 000만 원이하로 묶여져 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지난해까지 MBC에 다녔다고 말하니, 은행에서는 지난해 소득증명서를 가져오라고 했다. 하지만 박 기자는 지난해 1월31일부터 파업 돌입, 6월엔 해고로 소득이 얼마 되지 않아서 곤란했다고. '억' 소리 나는 비싼 임대료와 인테리어 비용에도 놀랐다.

▲ 서울 양재동 목공방 아이데코홈에서 작업자들이 스피커 몸체를 제작하고 있다.이치열 기자 truth710@

하지만 그에게 가장 어울리는 이름은 '기자', 가장 돌아가고 싶은 곳 역시 MBC 보도국. 1993년 입사, 사회부·정치부·경제부·선거방송기획팀을 고루 거쳐 올해로 기자생활 20년을 맞이한 그에겐 항상 '좋은' 기자란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직업 앞에 붙는 '좋은'이란 '유능한'과 같은 말이다. 박 기자가 지난해 김재철 전 사장의 MBC로부터 해고통보를 받았을 때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 부당함에 대한 분노했고. 유능한 기자가 내쫓기는 현실에 혀를 찼다.

해고당한 뒤 그에겐 이곳저곳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모두 거절했다고. 이유는 간명했다. "반드시 MBC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제안 받은 일을 한다면 다시 MBC로 돌아갈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고는 살인'이라는 구호가 말하듯, 해직자들은 해고 후 오는 상실감과 기약 없는 기다림이란 감정을 경험하게 되고, 동시에 이를 견뎌내야 한다. 박 기자 역시 그 지난한 싸움 한가운데 서 있는 듯 했다. 그는 "누가 나한테 어떻게 스피커를 만들고 사업까지 벌리게 됐느냐고 묻더라. '절실하면 돼'라고 말해줬다"고 했다.

▲ 유닛을 장착하기 위해 완성된 몸체를 차에 싣고 있는 박성제 해직기자.이치열 기자 truth710@

쿠르베는 이를 가능케 하는 힘이자 그가 다시 기자로 돌아가기 위한 발판이기도 하다. "어떻게 이 기간이 힘들지 않을 수 있겠나. 쿠르베를 만들며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버티는 힘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쿠르베를 통해 이 시기를 견디는 '근육'을 단련하고 있는 박 기자는 되레, MBC 후배들을 걱정했다. "많이 침체되고 위축돼 보인다"는 것이다. 박 기자는 "지난해처럼 싸우라는 게 아니라 자신감을 회복하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 서울 양재동 목공방 아이데코홈 한 켠에 마련된 청음실에서 박성제 해직기자가 자신의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이치열 기자 truth710@

박 기자는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가 진행하는 '조세피난처 프로젝트'에 MBC 기자들 가운데 단 한 명도 지원하지 않았다며 안타까워했다. "다른 방송사는 3팀이나 지원했더라. '우리는 어차피 안 되니 하지말자'란 패배주의가 있는 게 아닌가. 이런 분위기에 젖어있을 게 아니라 데스크와도 싸우며 개개인이 힘을 내야 한다."

오는 21일 해고무효소송 3번째 심리가 열린다. 승소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대법원으로까지 가져가며 복직을 받아들이지 않는 YTN처럼 MBC 역시 계속 시간을 끌며 박 기자의 복직을 거부할 수도 있다. 그러면 해직 기간도 길어지게 된다. 하지만 박 기자는 담담했다. "어차피 복직할 것"이라고 했다. 박 기자는 올해 가을 즈음, 쿠르베 전시회를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현실과 싸우는 그의 '근육'은 점점 단단해질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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