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눈물의 혼수품서 말까지… 품목도 사연도 갖가지인 '만물상'

한국일보

회원 1000만 매시간 매물 수백개… 누가 내놓은 걸까, 과연 누가 살까
초고가의 희귀물품도 간간이
나만의 매장 설치 15분이면 뚝딱
쇼핑놀이터·창업교실·기부공간… 회원들 활용방법도 천차만별
매일 사기피해 신고 100여건… 미심쩍은 상품들 불안전한 거래
아이러니한 스릴이 매력일지도


1000만 국민, 중고나라

#"야, 이 XX야!" 낯선 전화번호. 웬 남자가 다짜고짜 욕설을 퍼부었다. 짚이는 거라곤 며칠 전 중고나라에서 카메라를 판다는 글을 보고 연락한 여성뿐이었다. 알고 보니 중학교 2학년 딸이 부모 몰래 카메라를 판매하려 했고, 부모는 딸의 휴대폰에서 가격과 만날 시간 장소를 약속하는 문자를 보고 아동 성 매매자라는 오해를 한 거였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려 했지만 이미 흥분한 부모의 귀에 들어갈 리 만무. 인터넷 게시판에 '허벌나게' 욕 먹은 사연을 올린 A씨는 "내 생에 이렇게 억울한 일은 처음입니다"라고 썼다.

↑ 골프채 헤드에 속옷 차림의 판매자 상반신이 비춰 사진에 찍혔다. 실수인지 연출인지 아리송한 저런 해프닝들도 중고나라의 이야깃거리로 인터넷을 떠돈다. 중고나라 사이트 캡처

#B씨는 얼마 전 선물로 받은 운동화를 중고나라에 내놨다가 새벽 운동을 '제대로' 했다. 상품 소개를 올리자마자 구매 희망자가 나타났고, 그는 늦은 시각임에도 당장 만나서 물건을 확인하고 싶다고 우겼다. B씨의 집 앞으로 찾아온 구매자는 "한번 신어보자"면서 그 신발을 신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곧장 줄행랑. 대학 시절 럭비팀 선수 생활을 한 B씨지만 구매자(?)의 엄청난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던 듯하다. B씨의 저 게시판 하소연에 달린 댓글은 더 기가 막힌다. "붙잡은 사람도 있대요. 왜 달아났냐고 꾸짖었더니 '그 운동화 신고 달리면 얼마나 빠른지 보려고…' 그랬대요."

회원 수 1,020만명에 누적 방문자 19억명. 하루 평균 드나드는 횟수는 200여만 회에 이르고, 매 시간 올라오는 매물 소개 글만도 수백 개다. '국경 없는 장기 불황도 비껴간 유일한 나라'라는 네이버 카페 '중고나라'는 이름처럼 중고 물품을 사고 파는 사이트지만, 상품을 매개로 이런저런 사연들이 실시간 생산되고 24시간 유통되는 이야기 공간이기도 하다. 거래되는 물품들만큼이나 사고 파는 이의 사연도 다양해서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한나절이 짧다는 이들도 있다.

15분이면 차리는 나만의 매장

직접 물건을 팔아보기로 했다. 판매 물건은 2년 전 산 멀쩡한 '넷북'. 80만원을 주고 샀지만 30만원에 내놓기로 했다. 카페 회원 가입을 하고 판매 게시판의 '글쓰기'버튼을 눌렀다. 신원 확인을 위해 휴대폰 번호 및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하니 문자로 날아온 인증번호를 입력하라고 한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5분. 판매 글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제품 사진을 올리고 성능과 연락처를 기입했다. 몇 가지 주의사항을 읽고 나니 끝. 15분만에 뚝딱 나만의 '매장'이 생겼다. 이제 연락 오면 흥정해서 직접 만나 거래를 하거나 송금 받고 배송해주면 될 터. '장사하기 정말 편하다'는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왔다. 그러고 1시간, 2시간…. 연락이 오지 않는 이유는? 아니, 넷북 중고 시세가 10만원도 안 된다고?

생필품은 물론이고, 없는 게 없는 곳이 중고나라다. 중고 등급으로 떨려난 새 제품도 있다. 신상품매장- 할인매장을 거쳐 재고 창고에서 세월을 보내다 마지막 고객을 기다리는 것이다. 누가 살까 싶은 물건도 있고, 이런 것까지 파나 싶은 것도 있다.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희귀한 상품도 있다. '너구리 아니냐'고 누가 의심하건 말건 중고나라에서 샀다는 믿거나 말거나 '반달가슴곰 새끼'도 사진과 함께 소개되고, 장난이겠지만 성분이 미심쩍은 '코딱지'가 500원이라는 가격표와 함께 올라오기도 한다.

수도권에서 승마 펜션을 운영하는 김영주(48)씨는 지난해 3월 말 한 필을 중고나라에 올렸다. "도로에서 말을 타고 다니면 시선 집중! 원빈도 부럽지 않다"는 너스레 덕인지 그의 말은 강원 정선의 한 관광가이드에게 200만원에 팔렸다. 김씨는 "올리면서도 반신반의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문의를 해서 놀랐다"고 말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북한 지폐, 운영진과 숨바꼭질하듯 등장하는 의도와 용도가 의심스러운 중고 속옷, 수천만원 짜리 외제 고급 승용차…. 짠한 연애 실패담과 함께 올라오는 커플링이나 "신혼여행 직후 깨졌습니다"란 탄식에 얹혀 나오는 혼수품 일습은 중고나라의 인기 아이템 가운데 하나다.

창업교실이자 쇼핑 오락장

신선희(가명ㆍ17)씨에게 중고나라는 놀이터다. 선희 씨는 유행이 지난 옷들을 팔아 새 옷을 사는 '옷 돌려 막기'로 학업 스트레스를 날린다. 선희씨의 다음 목표는 5만8,000원짜리 '모직 라이더 쟈켓' 판매. 그걸 팔아서 '새 중고' 옷을 쇼핑할 참이다. 그는 거래를 성사시킨 뒤 느끼는 성취감과 선택의 성패를 확인하는 쾌감을 즐긴다고 했다. 2010년부터 거래를 시작했다는 신씨가 소개한 물건 빨리 파는 비법. 1) 제품의 상세설명은 기본 2) 옷 사진만 올리?보다 '착샷'(옷을 착용하고 찍은 사진)을 첨부하고 3) 잘 안 팔릴 것 같은 옷들은 몇 개씩 박스 단위로 묶는 것. 중고나라에서 배운 게 '돈 벌기 어렵다'는 것이라는 신씨의 꿈은 패션디자이너다.

황윤경(28)씨는 다니는 직장을 그만두고 언젠가는 의류 쇼핑몰을 운영할 생각이다. 그에게 중고나라는 쇼핑몰 운영 노하우를 익히는 공간이다. '소녀시대' 스타일의 노란색 스키니진과 호피무늬 원피스, 강아지 모양의 가방까지 황씨가 판매하는 물건만 서른 가지가 넘는다. 일주일에 20여건의 거래를 성사시킨다는 그는 회사에서 일하랴 택배 보내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만 "장사도 배우고 고객들의 반응도 확인하면서 배우는 게 많아 행복하다"고 말했다.

중고나라를 '기부'활동의 공간으로 활용하는 사람도 있다. '먹을거리 무료나눔' 코너에서 활동 중인 조여진(가명ㆍ34)씨. 매주 두 차례 정도 라면이나 우유 등 3만~4만원어치 정도를 구입해 중고나라의 불우이웃에게 나눠준다. 조씨는 게시판이나 쪽지 등을 통해 알려오는 딱한 사연들을 읽고 기부 대상을 정한다고 했다. 그는 "여기 들어오는 사람들은 대개 형편이 어려운 편이다. 심지어 먹을 것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고맙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가장 거대한, 가장 영세한

중고나라는 구매자와 판매자의 선의와 신의에 크게 의존하는 공간이다. 상거래법이나 소비자보호법이 있고 사기죄를 물을 수 있는 형법도 있지만, 중고나라만의 거래 규칙과 절차, 경험으로 공유되는 요령이 더 우선시된다. 법에 기대자니 배(법익)보다 배꼽(절차 진행의 번거로움)이 클 것 같아서다.

그러니 말도 많고 탈도 많다. 스마트폰처럼 고가의 장물이 조직적으로 거래되기도 하고, 오프라인 뺨치는 지능형 사기 사건도 적지 않다. 경찰 집계 인터넷 사기 사건은 2008년 3만6,591건에서 2011년 4만8,755건으로 꾸준히 증가했고, 그 대부분이 중고나라와 같은 중고물품거래 사이트에서 이루어졌다. 중고나라에서만도 하루 평균 사기 피해 신고가 100여 건씩 접수된다. 성매매 홍보물 등 불법 게시물들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중고품 마니아라도 중고나라라면 고개를 젓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주로 서울 광장시장이나 동묘 인근, 부산 남포동 구제시장의 버젓한 오프라인 중고매장에서 발품을 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고나라가 저만큼 번성한 것은 저 시장을 지탱하는 고객과 상인들의 선의와 신의가 아직 힘이 세기 때문일까. 혹시 물품을 사고파는 시장 이상의 어떤 의미가 저 공간 안에 있는 것은 아닐까. 중고 물품의 매력을 '빈티지 미학'이라는 근사한 이름으로 치장하는 이들도 적지 않지만, 어쨌건 모든 것을 낡게 하면서 스스로는 늙지 않는 시간에 대한 반발심 혹은 그 모진 시간까지 끌어안겠다는 너그러움이 '가격 메리트' 너머에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중고나라는 가장 영세한 판매자와 구매자가 가장 추레하고 미심쩍은 상품들을 사이에 두고 가장 불안전하고 불안정한 거래를 하는 시장이다. 그 너절한 물건들이 가장 첨단의 시스템 공간안에서 거래되는 것이다. 중고나라의 매력은 어쩌면 저 아찔한 스릴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정지용기자 cdragon25@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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