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LIFE]프린세스 메이커 2.. 모니터 속의 내 딸

2012. 12. 8.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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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의 손가락

[동아일보]

키운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선 자신이 하나의 생명을 돌볼 수 있을 만큼 '단단한' 존재인지를 스스로에게 묻는 행위일 것이다. 책임감을 갖고 정성을 들여 내가 아닌 존재 하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는 자세이기도 하다. 내가 원하는 방향과 해당 존재가 원하는 방향 사이에서 시도 때도 없이 갈팡질팡하는 방황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육성(育成)에는 설렘과 걱정의 마음이 다 담기게 마련이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하므로 한시도 눈을 떼서는 안 된다. 애를 키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애를 써야 한다.

나는 본디 무언가를 키우는 데 젬병이었다. 겁도 많고 키우던 대상을 잃었을 때 느끼는 상실감도 커서 화분 하나도 섣불리 들이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프린세스 메이커 2'라는 게임이 다가왔다. 자그마치 플로피디스크 열두 장에 담긴 채로. 육성은 아이의 생일을 정하고 이름을 지어주고 혈액형을 결정하는 일로부터 시작됐다. 막막하다고 느끼던 찰나, 집사인 큐브가 등장해 이것저것 알려주기 시작했다. 마음을 다잡고 나의 아이를 가만히 바라봤다. 천진한 표정으로 눈을 연신 껌벅이는 소녀가 모니터 안에 있었다. 어떤 가능성이, 거기 있었다.

'아이 키우기'는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경제관념이 없던 나는 파산하기 일쑤였다. 간혹 딸이 아프기라도 하면 안절부절못했다. 입속에서 침이 바짝바짝 말랐다. 병에 걸렸는데도 생활비가 없어 병원에 데려가지 못하는 아비의 심정이 이런 것일까. 탄식이 절로 흘러나왔다. 딸이 나으면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아르바이트를 시켰다. 책을 나르다 그것들을 다 떨어뜨리고 넘어지는 딸의 모습을 보면 눈앞이 아찔했다. 처음에는 서툴다가 익숙해지면 곧잘 일을 해내는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기도 했다.

'프린세스 메이커 2'의 묘미는 무사수행(武士修行)에 있었다. 딸 캐릭터는 도처에 있는 장애물과 몬스터를 피해 요리조리 모험을

해야 한다. 체력과 전투력이 낮을 때는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번번이 큐브의 등에 실려 돌아오기 일쑤였다. 노심초사의

순간들이 이어졌다. 아이템 하나라도, 단돈 몇 푼이라도 줍기 위해 손가락이 바빠졌다. 생일에 돈이 없어 선물을 못 사주면 곧바로

삐쳐버리는 어린 딸의 심정을 헤아리느라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무일푼의 절박함과 무능력의 서글픔이 극대화되던 순간이었다. 엄청난

박봉을 감수하고 다시 성당 아르바이트를 시켜야 하는가. 아니면 밤의 전당에 보내 생판 모르는 남들 앞에서 춤추게 해야 하는가.

아르바이트와 교육을 시키면서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매력이 올라가면 왜 도덕심이 떨어지는지, 체력이 올라가면 왜 감수성이

떨어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모든 걸 내가 원하는 대로만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하기도 했다. 왜 딸은 내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따라오지 않는 걸까. 허공을 멍하니 쳐다보며 말썽꾸러기였던 과거의 나 자신을 떠올렸다. 왕자와 결혼하는 게 딸이 진정

원하는 엔딩일까. 하고 싶은 게 무궁무진한 현재의 나 자신이 떠올랐다. 게임은 질문을 던지고, 나는 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딸이 자라남과 동시에 나도 자라고 있었다.

친구들 중 몇몇은 이미 결혼을 해 실제로 딸이 있다. 아마도

그들은 그 옛날 '프린세스 메이커 2'를 하며 해봤던 여러 걱정을 실제로 하고 있을 것이다. 그때의 경험이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은 또다시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아이를 키우고 있을 것이다. 실제 육성에서는 저장도 불가능하고 되돌리기도

불가능하다. 이게 진짜 인생이다.

오은 시인 wimwender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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