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는 나에게 밥이다" 까치 이현세 작가

박기묵 2012. 10. 5.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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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백서①] 만화책은 죽지않았다. 다만 진화할 뿐!

[CBS 박기묵 방기열 기자]

만화책에 얼굴을 파묻고 낄낄거리고, 신문 속 만평을 보며 속이 후련했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 만화산업은 책을 넘어 캐릭터 산업, 인터넷 속으로 들어와 있다. 딱닥한 책보다 작은 웃음이 필요할 것 같은 가을. 노컷V는 만화계에 한 획을 그은 작가들을 만나 작가의 삶과 만화산업 이야기를 나눠봤다.[편집자 주]

서울 강남구 개포동 작업실에서 만난 이현세(56) 씨는 함박웃음으로 인터뷰를 온 손님을 맞아 주었다. 월남전을 다룬 '저 강은 알고 있다'로 1979년 만화가로 정식 데뷔한 그는 이제 30년차 작가다.

'까치' 캐릭터와 함께 1982년 발표한 '공포의 외인구단'으로 한국 만화계의 한 획을 그으며 인기 만화가로 우뚝 선 이현세 작가. 대학 강의를 병행하고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현역'이었다. 만화를 그릴 때 가장 행복하다는 이현세 작가에게 그의 만화 이야기와 한국 만화산업 현주소를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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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이현세 작가와 일문일답.

- 본격적으로 만화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 미대를 목표로 살아왔는데, 대학 진학 때 내가 적록색약이란 것을 알았다. 그래서 미대 진학이 좌절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렸을 때 양자로 입양된 사실까지 알게 돼 깊은 방황이 함께 왔다. 결국 가장 좋아했던 만화계로 도망치듯 뛰어들게 되었다. 그때 내 나이가 21살 때였다.

- 문하생 시절은 어떠했나?

▲ 서울·경기지역에 있는 모든 만화작가 화실을 찾아 다녔는데 어느 하나도 받아주질 않았다.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내 태도가 불량했던 것 같다. 반항적인 성격과 거만한 모습을 하고 있는 나를 아무도 반겨주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색약이라는 치명적인 약점까지 가졌으니. 그러다 들어간 곳이 나하나 선생님 화실이었다. 순정만화를 그리시는 분이었다. 그래서 첫 만화를 순정만화로 시작했다. 다음엔 개그만화를 하는 하영조 선생님 화실에서 그림을 배웠고, 그 뒤에는 아는 선배와 본격적으로 내 만화작업을 시작하게 됐다.

- 까치가 탄생한 배경은?

▲ 다른 작가들과 달리 난 '어떤 만화를 그릴까' 보다, '어떤 캐릭터를 그릴까'를 더 많이 고민했다. 이현세만이 가질 수 있는 캐릭터를 그리고 싶은데 나 자신만큼 잘 아는 캐릭터는 없었다. 아웃사이더지만 순수한 열정, 그리고 행동하는 양심. 그래서 내가 가장 되고 싶어 하는 모습을 '까치'란 가상 인물에게 줬다. 또한 세속적인 열정과 명예, 승부욕에 집착하는 또 다른 내 모습을 '마동탁'에게 넘겼다. 결국, 이현세의 모습을 까치와 마동탁을 통해 표현하게 된 것이다.

- '공포의 외인구단'은 왜 야구만화였나?

▲ 당시에는 군인들이 정권을 잡던 시기였기에 만화 심의와 검열이 말도 안 되게 심해서 갈등요소를 증폭시키는 시나리오를 쓸 수 없었다. 그래서 갈등을 최대한 이야기 할 수 있는 스포츠를 썼는데 야구가 적격이었다. 던지는 투수와 치는 타자가 떨어져 있으니 심의를 무난히 통과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시대 대다수 만화가 야구만화였던 것. 나 역시 그랬다.

- 청소년 음란물 시비로 '천국의 신화' 재판이 유명한데?

▲ 당시 검사들은 내가 그리는 만화를 전혀 다른 시각으로 해석했다. 신화의 입장에서 보면 동물과 인간의 결혼은 충격적인 소재가 아니었다. 단군 신화만 봐도 그렇지 않나? 그리고 원시시대 삶은 당연히 야만적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작가가 어떤 시각으로 표현 했는가 인데, 마치 이것을 현시대의 입장으로만 해석해서 원초적인 성적 욕구를 자극하는 수간으로 매도하고 폭력적인 만화로만 해석한 것이다.

- 힘든 재판을 끝까지 밀고 간 이유는?

▲ 6년이란 긴 재판 끝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끝까지 밀고 간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만화 작가로서의 자존심이었다. 나는 만화예술가로 당당히 작품 활동을 해왔기 때문에 작가의 자존심을 걸고 당당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만화란 장르를 두고 터무니없는 심의와 검열에 대해 더는 굽힐 수가 없었다. 대한민국 대표작가로 인식되는 이현세가 이걸 이겨내지 못한다면 다른 후배들에겐 말할 것도 없었기에 끝까지 재판을 밀고나갔다.

두 번째는 독자들과 약속이었다. 어렸을 때 이유도 모르고 만화가 중단되면 굉장히 화가 났다. 다들 이유가 있었겠지만, 내 만화를 사는 모든 독자들에게 반드시 책을 끝내겠다는 강한 책임감 있었다. 이 두 가지가 천국의 신화를 끝낼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던 것 같다.

- 한국 만화책 산업이 쇠퇴기에 접어들었는데?

▲ 시작은 일본 만화시장의 개방이었다. 일본의 가장 경쟁력 있는 문화 상품이 한국에서 천대시 하는 분야로 빠르게 들어온 것이었다. 당연히 경쟁력이 없었기에 일본 만화가 급속히 퍼졌다. 게다가 국가가 IT란 산업을 밀어붙이면서 만화가 저작권이 보호되지 않는 환경에 무방비로 노출됐다. 하지만 마치 찬물에 들어간 개구리처럼 물이 천천히 데워지고 있었지만, 위기를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눈치챘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하지만 역사적 흐름에서 보면 너무나 당연하였다. 산업과 세대와 함께 만화 문화가 변하는 시기였으니까.

- 만화책 산업에 다시 활력을 넣을 방법은?

▲ 당분간 웹툰의 강세가 이어질 것 같다. 장점이 워낙 많은 산업이니까. 만화책을 그리고 싶어 하는 후배들이 힘든 시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이 새로운 차원의 만화산업을 모색하는 길이 될 수 있다. 새로운 장르의 길을 만들 수 있으니까. 지금 준비하고 있는 작품 '삼국지'도 그 연장선에 있다. 삼국지는 예전 내 만화를 보는 사람들이 부모님세대로 넘어간 것에 맞춰 교육적 요소를 크게 부각시켰다. 또한 출판될 책이 기존의 웹툰 방식처럼 별도의 편집 작업 없이 모바일과 태블릿에 쉽게 이식될 수 있는 책을 그리고 있다. 아마도 앞으로 내가 어떻게 만화를 그릴 것인가에 대한 큰 기점이 될 듯하다.

- 마지막 질문. 이현세에게 만화란?

▲ 매일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밥. 우리가 매일 밥을 먹어도 질리지 않듯, 나에게 만화는 매일 그려도 질리지 않는 밥이다.ace0912@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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