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퍼도 슬퍼할 수 없는 죽음

입력 2008. 11. 14. 18:00 수정 2008. 11. 14.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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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이정근 기자]

▲ 환경전.

창경궁에 있다.

ⓒ 이정근

세자가 환경전에서 숨을 거두었다. 향년 33세. 발병 3일만이다. 날씨는 맑았으나 하늘도 울고 땅도 통곡할 일이다. 대소신료들은 망연자실, 할 말을 잃었다. 내명부의 수장은 중궁전이다. 하지만 실세가 따로 있었다. 소용 조씨의 엄명에 따라 궁인과 궁노들에게 함구령이 떨어졌다. 입단속에도 불구하고 궁궐 담장을 넘어간 소문은 빠르게 도성에 퍼졌다.

"세자가 독살당했다며?"

"그런 말 함부로 했다간 목이 열 개라도 부족하다."

"입은 비틀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라고, 멀쩡한 젊은 사람이 사흘 만에 왜 죽냐?"

"학질이래잖아."

"나도 학질 앓아봤지만 땀 한번 흠씬 흘리고 나면 거뜬히 일어나날 수 있어."

"사람 나름이지"

"오랑캐 땅에서 8년 동안 핍박받으면서도 살아난 목심인데 학질에 죽을 수 있냐?"

배오개와 칠패시장 장사꾼들이 입방아를 찧어댔다.

국상체제에 들어간 조정

문무백관은 흑립(黑笠)·흑대(黑帶)·백첩리(白帖裏)를 착용하고 세자의 죽음을 애도했다. 조정은 빈궁(殯宮)·예장(禮葬)·혼궁(魂宮) 세 도감(都監)을 설치하고 인조는 김자점을 도제조로 삼고 국상체재에 돌입했다. 편전에서 당상 이상 대소신료회의가 열렸다.

"왕세자의 부음을 대군에게 전하라."

소현세자의 죽음을 맞은 인조의 제1성이다. 봉림대군은 아직 귀국하지 못하고 북경에 있었다. 즉시 금군(禁軍)이 북경을 향하여 떠났다.

▲ 실록각 편액.

실록을 보관하던 곳이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 이정근

"뜻밖에 왕세자의 상을 당하여 상고할 만한 문서가 없으니 급히 사관을 강화도에 보내 실록에서 상고해 오도록 하소서."

예조에서 품의했다.

"입관 이후의 상례에 대해서는 의당 실록에 의거해서 해야겠지만 입관 이전의 상례에 대해서는 실록을 상고해 오기를 기다릴 수 없으니 3일 만에 입관하도록 하라."

세자를 세자답게 모셔야 합니다

"세자 저하를 그렇게 대하는 것은 예가 아닌듯 합니다."

"3일 만에 입관하는 것은 사대부와 똑같은데 무슨 해로울 것이 있겠는가?"

한 나라의 예를 다루는 예조가 오히려 어리둥절했다.

"대행왕과 대행왕비의 상에는 찬궁(?宮)을 설치하고 6일 만에 성복(成服)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세자의 상에는 참고할 만한 전례가 없으니 어떻게 처리할까요?"

"4일 만에 성복할 것이니 찬궁은 설치하지 말라. 재궁(梓宮)이란 두 글자도 쓰지 말고 구(柩)자를 쓰라."

"구(柩)자는 대부나 사서인에게 쓰는 것이므로 왕세자의 상에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세자는 평소에 동궁이라 칭하고 훙서하면 빈궁(殯宮)으로 칭하는 것인데 유독 상례에 쓰는 제구에만 궁(宮)자를 쓰지 않는 것은 죽은 이를 보내는 대례에 부족한 감이 있습니다."

보덕 서상리, 필선 안시현, 겸필선 신익전, 문학 오빈, 사서 유경창, 설서 장차주가 연대하여 주청했다.

"참작하여 결정하였으니 미진한 일이 없는 듯하다."

인조가 잘라 말했다.

"원으로 할까요? 묘로 할까요?"

이조(吏曹)가 의문(儀文)을 제기했다. 왕실 묘제는 능, 원, 묘로 구분된다. 등극했거나 추존된 왕과 왕후는 릉(陵), 세자와 세자빈은 원(園), 강등된 왕과 그밖에 왕실 사친은 묘(墓)로 칭했다. 연산군 묘와 광해군 묘가 여기에 해당된다.

"묘로 하라."

예정된 수순처럼 인조의 의도는 거침이 없었다.

염습에는 관리를 입회시켜 주십시오

"사리를 모르는 내관에게 염습을 맡겨둘 수 없으니 궁관 한 사람과 빈궁 당상이 들어가 참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승정원이 품신했다. 염습(殮襲)은 망자의 몸을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는 의식을 말한다. 세자의 벗은 몸을 확인하고 싶다는 의도다.

"그럴 필요 없다."

관리들이 염습에 참여한다는 것은 탐탁치 않았다. 왕조시대에 '탁하고 치니 억하고 쓰러졌다'를 뒤집을 만한 물증이 발견된다 해도 그것을 문제 제기할 관리가 있을까마는 인조는 거절했다. 승정원의 의도를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염습은 중요한 예이오니 종친부 족친이 들어가 참여해야 합니다."

"꼭 그렇게 해야 하나?"

"네, 마마."

인조가 마지못해 동의했다. 수묘관으로 임명된 종실 이희와 시묘관에 하명된 내시 박창수가 풀었던 머리를 묶어 매고 습(襲)에 임했다. 시강원·익위사·정원·옥당·종친·문무백관이 꿇어 엎드려 있는 사이 습이 행해졌다.

▲ 서문.

삼전도에서 남한산성 서문에 이르는 길은 가파른 언덕길이다.

ⓒ 이정근

이목구비에서 선혈이 흘러나온 세자

불과 3일 전까지만 해도 삼전도에서 가파른 남한산성 서문을 올라 남문으로 내려왔던 소현세자가 주검이 되어 반듯하게 누워있었다. 종친 참관자로 염습에 참여한 진원군 이세완은 소현의 시신을 보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세자의 몸은 검은 빛이었고 눈, 코, 입, 귀의 일곱 구멍에서 선혈(鮮血)이 흘러나와 있었다.

"이럴수가…."

시신은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자연사가 아니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세완의 가슴은 쿵닥쿵닥 두 방망이질 쳤다. 시자(侍者)들도 민망했음인지 세자의 얼굴을 검은 멱목(?目)으로 덮어 놓고 손톱과 발톱을 깎아 조발낭(爪髮囊)에 넣었다. 이어 향나무를 잘게 쪼개어 삶은 향탕수(香湯水)에 솜을 적셔 시신을 씻겼다.

습의를 갈아입힌 시자들은 물에 불린 쌀을 버드나무 숟가락으로 세 번 떠서 주검의 입에 넣어 주었다. 망자가 저승까지 갈 동안에 먹을 식량이다. 이어 구멍이 없는 구슬 3개를 주검의 앞가슴에 넣어 주고 멱모로 얼굴을 덮어 싸고 조대로 허리를 멨다. 악수(握手)로 손을 싸고 신을 신긴 뒤에 홑이불로 덮어두는 것으로 습이 모두 끝났다.

소렴포로 주검을 메는 소렴과 칠성판에 올려놓고 칠성칠포(七星七布)로 싸매는 대렴을 마친 주검은 숭문전에 빈소를 차리고 빈전(殯奠)을 베풀었다. 빈궁(殯宮)을 설치하지 않고 찬실에다 평상·대자리·요자리만 설치하고 흰 명주로 장막을 만들어 관 위에 쳤다. 왕실 국상이 아니라 사가의 장례와 흡사했다.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주청했다.

어의에게 책임을 묻지 마라

"왕세자의 증후가 갑자기 악화되어 끝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진찰이 밝지 못한 소치라고 여깁니다. 세자 저하의 증세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날마다 침만 놓았으니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형익을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고 약을 의논했던 여러 의원들도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주도록 하소서."

"의원들은 신중하지 않은 일이 없으니 굳이 잡아다 국문할 것 없다."

양사에서 재차 이형익· 박군· 유후성의 처벌을 강력히 주청했으나 인조는 물리쳤다. 조정이 웅성거렸다. 어의의 과실이 없다하더라도 임금이나 세자가 훙서(薨逝)하면 어의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관례였다. 조정의 공기를 감지한 인조는 5일 동안 조시(朝市)를 정지했다. 임금과 신하들이 마주할 시간과 공간을 원천 봉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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