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펄 끓는 아파트 경비실, "에어컨 놔달라면 염치없어 보여서.."

안상현 기자 2016. 8. 14.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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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5월부터 폭염주의보가 내려지고 전국에 연일 30도가 넘는 기록적인 폭염이 이어지면서 가정에선 에어컨 사용으로 인한 ‘전기요금 폭탄’을 걱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우려가 사치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있다. 에어컨 없이 경비실을 지켜야 하는 아파트 경비원들이 대표적이다.

“돈 받고 찜질방 오는 기분이죠.”

지난 10일 오후 2시쯤 서울 낮 최고기온이 35도까지 치솟은 가운데 서울 성북구 돈암동의 한 아파트에서 2년째 경비원으로 일하는 김모(63)씨는 셔츠 앞단추를 풀어놓은 채 연신 부채질을 했다. 막 샤워하고 나온 것처럼 땀에 젖은 머리칼을 뒤로 넘기던 김씨는 “요즘엔 경비실 안이 한증막이나 마찬가지”라며 “그래도 택배 받는 업무 때문에 자리를 비울 순 없다”고 했다. 이날 김씨가 있던 6.6㎡(2평) 면적 경비실 내 온도는 35.3도였다.

인근의 또 다른 아파트에서 일하는 경비원 정모(70)씨는 바지 단을 걷어올린 채 아예 경비실 문을 열어놓고 밖에 나와 있었다. 정씨는 “경비실 안이 펄펄 끓는다”며 “이런 날 경비실 안에서 트는 선풍기는 선풍기가 아니라 열풍기”라고 말했다. 정씨는 기자와 말하는 도중에도 손에 든 종이를 부채 삼아 계속 흔들었다.

아파트 건물에 붙어 있는 경비실의 경우 1~2평 남짓한 공간에 작은 창문이 한쪽으로만 나 있는 경우가 많아 통풍이 제대로 안 돼 여름철이면 가마솥처럼 푹푹 찐다. 이런 경비실에서 경비원들은 오전 5~6시쯤 출근해 다음날 같은 시간까지 꼬박 하루를 견딘다.

경비원들의 고충을 덜어주고자 지난 6월 경기도 수원시의 한 임대아파트에서 동대표가 모금 운동을 제안해 입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경비실에 에어컨을 설치했다. 또 속초시의 경우 시장이 위원장을 맡고 있는 속초시노사민정협의회와 공동주택 위탁관리업체 ㈜설악안전서비스가 20년 이상 된 노후 아파트 5곳 12개 경비실에 소형 에어컨을 설치한다는 업무협약을 맺는 등 배려의 움직임이 일고 있다.

하지만 이런 상생(相生) 노력에도 여전히 상당수 아파트 경비원들은 ‘열풍기’로 변한 선풍기에 의지해 폭염을 견디고 있다. 이날 기자가 직접 서울시내 아파트 10곳을 돌아본 결과, 에어컨이 설치된 경비실은 4곳 정도였다.

그나마 4곳 중 2곳은 일부 경비실에만 에어컨이 설치돼 있었다. 햇빛이 많이 들어 특히 더운 곳만 우선 설치했다는 아파트 관계자의 말에 에어컨이 설치된 경비실과 그렇지 않은 경비실 주변 기온을 직접 재봤다. 에어컨이 설치된 경비실 주변은 34도, 그렇지 않은 경비실 주변은 33.8도로 0.2도 차이에 불과했다.

자칫 탈수 증세가 일어날만큼 덥지만 경비원들은 에어컨을 놔달라고 말하기 어려운 처지다. 이날 더위에 지쳐 아파트 지하실에 피신해있던 서울 노원구 중계동의 한 아파트 경비원 이모(73)씨는 “돈 받고 일하는 건데 에어컨까지 놔달라고 하면 염치 없어 보인다”며 “올해가 유난히 덥긴 하지만 이 더위도 곧 가지 않겠냐”며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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