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에 '제주 해녀'가 살았다?..독도는 해녀들의 '엘도라도'

2014. 4. 7.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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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독도는 제주해녀들에게 '한국판 엘도라도'였다. 제주해녀들은 독도 물질로 집과 밭을 장만했고, 결혼비용도 충당했다. 194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 독도 물질을 했던 제주해녀들은 눈 감아도 독도의 곳곳이 떠오른다고 했다.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내가 그곳에서 살았는데!"라고 힘줘 말했다. 그들의 기억 속에 새겨져 있는 독도 생활을 들어봤다.

"텔레비전에서 일본 사람들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하는 보도가 나오면 '이놈들아, 내가 갔다 온 지도 50년이 다 됐다'는 말이 튀어나와. 주장할 걸 주장해야지. 우리가 독도의 산증인이야. 우리가 수십년 동안 독도 바다에서 물질하면서 살아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일본이 왜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하는지 모르겠어."

일본 정부가 초등학교 5·6학년 사회교과서에 '한국이 일본 고유영토인 독도를 불법점령했다'는 내용을 넣은 사실이 알려진 4일, 제주해녀 홍순옥(70·제주시 한림읍)씨는 "지금도 독도 바다가 눈에 아른거린다"고 말했다. 비양도가 손에 잡힐 듯 보이는 협재리 바닷가에 살고 있는 홍씨는 요즘 허리를 다쳐 병원에 다니지만 여전히 물질을 한다.

"올해로 꼭 50년 됐어요. 스물 되던 1964년에 처음으로 독도 물질을 다녔어요. 보통 3월 초에 들어가 4월 초 정도에 나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눈 감아도 언뜻언뜻 독도 바다가 떠오릅니다."

일제강점기부터 제주해녀들은 '황금바다'를 찾아 물 설고 땅 선 곳으로 물질을 나갔다. 해녀들의 무대는 한반도의 남해안과 동해안은 물론 러시아,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까지 뻗쳤다.

독도 바다도 예외는 아니었다. 해방 이후 독도 바다는 해녀들에게 '한국판 엘도라도'였다. 제주해녀들은 독도에서 물질을 해 번 돈으로 집안 살림에 보태거나 밭을 사는가 하면 결혼자금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독도에 침입하는 일본 어선과 순시선 등에 맞서 독도를 지켜낸 민간조직인 독도의용수비대가 결성된 1953년 이전부터 제주해녀들의 물질이 이뤄졌다. 독도 물질을 가는 해녀들은 해녀들 가운데에서도 물질을 잘하는 '상군해녀'들로 구성됐다.

해녀들의 말을 들어보면, 해방 이후 제주해녀들의 독도 물질은 194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 이어졌다. 처음에는 주로 제주 서쪽인 한림읍 지역 해녀들이 독도 물질을 갔다. 한림읍 협재리 마을회관에는 1956년 건립된 '울릉도 출어 부인 기념비'가 있을 정도로 이곳 해녀들의 울릉도와 독도 물질이 잦았다. 나중에는 동쪽인 구좌읍 해녀들도 같이 나서게 되고 남쪽인 서귀포시 보목 해녀들도 독도에 들어갔다.

1949년 15살의 나이에 독도 물질에 나섰던 고정순(81·제주시 한림읍)씨는 해방 이후 제주해녀들 가운데 가장 먼저 독도를 찾았다. 울릉도에서 저녁에 출발해 밤새 배를 타고 새벽이 되니까 조그만 섬 두 개가 나타났다. 독도를 이루는 동도와 서도였다. "독도에 사람들이 전혀 살지 않을 때였는데 나와 사촌언니 4명 등 5명이 갔어. 집도 없고 사람도 없어서 무서웠어. 내가 제일 어리고, 물질도 언니들보다 못해서 미역 손질하는 심부름만 하다가 왔어."

사공이 나무토막을 싣고 오면 해녀들이 그걸로 굴속에 임시 거처를 만들었다. 그곳에 가마니를 깔고 생활하면서 미역을 널어 말렸다.

일제강점기부터 원정물질 나서동해안~중국·일본까지 찾아가독도의용수비대 결성 이전부터1970년대까지 계속된 독도 물질당시 전복보다 비싸던 미역 채취서도 굴에 가마니 깔아 집 삼고수십명 들어가 2~3개월씩 거주"수입 좋다" 소문 나자 너도나도"수십년 동안 물질하고 살았는데왜 일본 사람들 자기네 땅이라나"

고씨 사촌언니들의 독도 물질 수입이 좋다는 소문이 동네에 퍼지자 마을 해녀들이 그 뒤를 따랐다. 이 마을 김공자(74)씨는 1950년대 후반부터 10년 동안 독도 물질을 다녔다. 텔레비전에서 독도를 보면 지금도 지리가 훤하게 머릿속에 그려질 정도다. 상군해녀였던 김씨는 '머구리'(바닷속에서 해산물을 채취하는 잠수부)도 했다.

19살이던 1959년 김씨는 울릉도에서 제주해녀들과 함께 저녁에 배를 타고 출발해 이튿날 아침 독도 땅을 밟았다. "서도의 물골이라는 굴속에 물통이 있는데 사람 수가 적으면 적은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물이 나와. 봐야 알아. 해녀 36명과 남자 사공 10명 등 46명이 독도로 들어갔는데, 물통에 있는 물이 넘치지도 않고 내려가지도 않았어. 가자마자 물통 앞에서 고사를 지내고 다음날 일어나보니까 물이 콸콸 넘치더라고. 안 보면 거짓말이라고 할 거야." 동도에서 경비를 서던 경찰들은 빗물을 받아서 먹는 물로 사용하던 물탱크의 물이 바닥나면 배를 타고 건너와 물을 길어 가기도 했다.

해녀들의 독도 물질은 거의 매일 반복됐다. 동쪽에서 바람이 불면 서쪽에서 물질하고, 서쪽에서 바람이 불면 동쪽에서 물질을 하면서 동도와 서도 바다를 동네 돌듯이 돌아다녔다. 해녀들은 서도의 물골이라는 굴에 살고 독도경비대는 동도에 거주했다. 김씨는 주로 3월 초에 독도에 들어가 2개월 남짓 살다 5월 중순에 울릉도로 나왔다. 겨울에도 김씨의 바닷일은 계속됐다. 머구리를 했던 김씨는 겨울철에는 해삼이나 소라 등을 잡으러 다시 독도에 들어갔다.

독도로 물질을 다닌 제주해녀들에게 떠오르는 것은 미역과 갈매기, 물개와 비슷한 강치였다. 독도에서 자라는 미역은 국내 최고라고 해녀들은 입을 모았다.

1964년 스물 나이에 독도 물질을 다녀온 홍씨는 미역 채취 작업을 이렇게 설명했다. "미역이 갈대밭처럼 아주 잘 자라서, 고개를 들이밀고 호미로 베어낸 뒤 손으로 안지 못하고 어깨에 걸쳐 나오곤 했어. 너무 크니까. 전복들도 쇠똥같이 바위에 다닥다닥 달라붙어 있었어. 어른 손바닥보다 훨씬 컸지."

갈매기는 서도의 하늘을 가득 메울 정도로 많았다. 홍씨는 "밖에 앉아 식사를 할 때가 많은데 손으로 훠이훠이 휘저으면서 먹는다. 그러지 않으면 갈매기 똥이 아무 데나 떨어져 밥을 먹지 못하게 된다"고 말했다. 삶아서 먹는 갈매기 알은 해녀들의 간식이었다.

강치는 제주해녀들의 친구들이었고, 서도 북쪽에 있는 넓고 편평한 바위인 가제바위는 강치들의 놀이터였다. 가장 먼저 독도를 찾았던 고정순씨는 "강치들이 숫자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 회고했다.

"새벽에 일어나서 보면 강치들이 시랑시랑(여기저기) 누워서 시커멍허여(새까맣게 보여). 오전 8시께 물질 작업을 하려고 바위 쪽으로 가면 강치들이 바닷속으로 팡팡 떨어져."

강치를 안고 사진을 찍기도 했던 김씨는 "강치가 3~4월에 새끼를 낳는데 2~3일 전에 태어난 것으로 보이는 강치가 바위에 있었다. 다른 강치들은 해녀들이 보이니까 바닷속으로 뛰어들었지만 이 강치는 금방 태어난 새끼여서 뛰어들지 못하고 있던 것을 망아리(해산물을 집어넣는 그물통)에 담아 물골 앞으로 헤엄쳐 온 뒤 사진을 찍고 바다로 돌려보냈다"고 회고했다.

제주도 무형문화재 제1호 해녀노래 전수생인 강경자(69·제주시 구좌읍 동복리)씨도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독도 물질을 했다. 동복리 해녀 10명과 한림 해녀 20명 등 30명의 해녀와 남자 사공 4명이 독도에 들어갔다. 강씨는 전복과 문어가 엄청 많았지만 잡지 않았다고 한다. 강씨는 "그때는 먹을 걸로 생각하지 않았다. 돈 되는 미역만 채취했다"고 말했다. 물질이 끝날 때 받은 돈은 당시 돈으로 2만원이었다. 강씨는 물질로 돈을 모아 오빠 학교 다니는 데 보태고, 옷도 사 입고, 반지도 만들었다.

돈벌이는 됐지만 바다 물질은 고단했다. 김씨는 "그때는 고무옷(잠수복)도 없을 때야. 미녕(무명)으로 된 소중이(옛 해녀복)만 입고 차가운 물속에 뛰어들었다. 미역 채취할 때는 아침에 밥 먹고 나가면 저녁때 들어왔으니까"라고 말했다. 강씨도 "하루 종일 물질했다. 미역을 채취한 다음에는 건조시키고, 이를 묶고 하는 작업을 하느라 놀 시간이 없었다"며 "그래도 짬이 날 때는 같이 간 친구 해녀들과 노래도 부르고 재미있게 지냈다"고 말했다.

"여푼 바당에서 메역이 자박자박, 빈찍빈찍허주게. 그디 한번 가고 싶어(물이 얕은 바다에 미역이 무성하게 번쩍이는 것처럼 빛나. 그곳에 한번 가고 싶어)." 홍씨는 50년 전 꽃다운 나이 때 물질을 했던 그곳에 가고 싶다고 했다.

최근 일본이 독도 영유권 주장을 강화하고 있지만, 오랜 세월 독도의 바다에서 생업을 잇고 자연을 벗삼았던 제주해녀들은 우리 땅 독도의 산증인이다.

제주/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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