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은 하나도 모르는데, 왜 공감이 되지?

2013. 10. 4.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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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병현 기자]

< 미생 > 1~9 완간 세트. 다음 웹툰 연재물을 모아 펴낸 것이다.

ⓒ 위즈덤하우스

몇 년 만일까. 성인이 9권에 이르는 만화의 완결을 보고 싶어 밤을 지새우다니. 그것도 < 미생 > 이라는, 바둑 용어를 빌려다 제목을 붙인 책이라니. 바둑이라고는 학생 시절 허세 가득한 눈빛으로 '바둑의 정석' 따위를 몇 번 뒤적거린 게 다였다. 그런데도 책을 꽤나 집중해서 읽었나 보다. 정신을 차려 보니 동이 터온다.모든 게 좋았다. 둥글둥글한 그림체는 편안했다. 초반에 가졌던 등장인물들에 대한 이질감은 자연스레 사라졌다. 바둑을 잘 몰라도, 매회 앞서 실린 실제 대국을 해설한 부분에선 몰입이 됐다. 어느 정도 진행 방향을 설정해 줬다. 그렇게 스토리는 순풍에 돛 단 듯 흘러갔다. 내용 면으로는 '기승전결'이 있지만, 이를 읽는 이에게는 지극히 잔잔하게 느껴졌다. 스르륵 몸만 실으면 됐다.

사실 읽기 전에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요즘 컴퓨터를 다루는 사람이라면 즐겨 읽는 웹툰 하나 정도는 있다는데, 나는 그렇지도 않았다. 뒤늦게 찾아 보니 이미 적잖은 찬사가 쏟아지고 있었다. 영화로도 제작되고, 드라마로도 제작 예정이란다. 최근에는 박원순 서울시장의 추천으로 화제가 됐다. 이 만화가 이토록 많은 이들을 공명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 미생 > , 불안정하기 그지없는 우리의 자화상

"턱걸이를 만만히 보고 매달려 보면 알게 돼. 내 몸이 얼마나 무거운지. 현실에 던져져 보면 알게 돼. 내 삶이 얼마나 버거운지."(3수)

제목이자 바둑 용어인 '미생(未生)'은, 아직 완전히 살지 못한 상태를 뜻한다. 바둑판에서 두 집을 만들지 못해 상대로부터 언제고 공격받을 여지가 있으면, 모두 미생이다. 반면에 '완생(完生')이란 표현도 있다. 완생은 두 집이 지어져서 상대가 공격할 수 없는 상태, 즉 완전히 살았다는 말이다. 이 두 차이를 알았으면, 이제 < 미생 > 을 읽기에 충분한 바둑지식을 쌓은 것이다.

주인공 '장그래'는 프로 바둑기사를 꿈꾸다 입단에 실패한 청년이다. 바라보던 좌표가 사라져 방황하다 종합상사에 몸을 담는다. 그러나 사장을 정점으로 촘촘히 구성된 피라미드 조직 속에서 고졸의 계약직 사원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야만 하는 것, 이를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누구 한 명의 땀방울로 되고 안 되는 시절이 아냐. 누구 한 명의 캐릭터로 성사가 결정되는 일이란 건 회사로선 매우 위험해. 당신 아니어도 될 일은 돼야 한다고."(55수)

사실 '장그래'가 겪는 일들은 우리가 회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일들이다. 업무가 있고, 역할이 있고, 정치가 있고, 관계가 있다. 등장하는 이들 또한 어느 회사에나 하나쯤 있음직한 인물들이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다. 그러나 한 발짝 물러서 바라보면, 보이지 않던 것도 눈에 들어오는 법이다. 이를 잘 살렸다.

< 미생 > 주인공 장그래의 명함. 프로 바둑기사를 꿈꾸다 입단에 실패하고 종합상사의 계약직 사원으로 입사한다.

사회적 쟁점도 등장한다. 비정규직, 노동, 육아, 여성, 부정이 적당히 버무려져 사실감을 더한다. 그러나 이를 전면에 내세우진 않는다. 시사만화가 아닌 이상 어쭙잖게 다루지 않고, 스쳐 지나가도록 놓아둔다. 의도했을까. 실제로도 바쁜 일상 속에서 '부조리'란 느낌은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는다. 거기에 적당한 관성이 더해지면 우리를 딱 '스쳐'갈 뿐, 그 이상은 아니다. 슬프지만 말이다.

바둑 대국을 활용한 독특한 전개

매회가 시작하기에 앞서 실제 벌어졌던 대국의 해설이 실린다. 1회에는 대국의 1수에 대한 해설이 실리는 식으로, 매회 그 순서와 같은 수에 해당하는 해설이 덧붙는다. 조훈현 9단과 녜웨이핑 9단이 1989년 맞붙었던 응씨배 결승5번기 최종국의 복기다. 한국 바둑 역사상 최초로 세계 챔피언이 탄생한 대국이었다.

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대국과 에피소드는 독자를 이끄는 힘을 갖는다. 바둑의 한 수가 놓아지고, 만화의 한 회가 끝나면 그제야 비로소 한 수가 놓인다. 자칫 집중도가 흐려지기 쉬운 배치다. 그러나 오히려 몰입이 된다. 다음 바둑판에 놓일 한 수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그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 그 대국에서 인생을 보기 때문이 아닐까. 한판의 바둑과도 같은 인생이다. 우리도, '장그래'도. 그래서 다음 수가 궁금하다.

145수를 마지막으로 대국도, 책도 끝이 난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 수는 몇 수일까.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은 지금 놓는 그 수가 사석이 될 수도, 대마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첫 수일지도 모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종국으로 향하는 수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한 수, 한 수 놓아가며 살아간다. 자각하지 못할 뿐. < 미생 > 을 쓴 윤태호 작가도 말한다.

부모 세대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 역시 많은 것을 희생하며 살아갑니다. 야근을 마다하지 않고, 쉬는 날이면 아이들 체험학습을 위해 무거운 몸을 밖으로 내쫓습니다. 보다 넓은 아파트를 궁리하고 더 나아 보이는 동네를 꿈꿉니다. TV에서는 꿈대로 살라고 외치는 미담자들이 득세합니다. 꿈대로 못 사는 이들은 위로받지 못하고 배려받지 못합니다. 그저 시민, 서민, 대중으로 퉁쳐서 평가받습니다.(1권 '작가의 말' 중에서)

사실 이 책의 내용 면에서 바둑은 별로 연관이 없다. 제목이 바둑 용어라는 것과 주인공 '장그래'가 한 때 한국기원에 몸담았다는 설정 외에는 그다지 큰 관련성은 없다. 읽기 위해 전문적인 바둑지식이 필요하지도 않고, 바둑을 통해 이야기가 진행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즈음에는 사람을 헷갈리게 만든다. 나는 치열했던 바둑 대국을 한 판 관전한 것인지, 계약직 사원이 회사에서 겪은 2년간의 고군분투기를 본 것인지. 낯설지만 기분 좋은 느낌이다. 이 잔상이 사라지기 전에 다음 대국이 보고 싶다. 기획 중이라는 2부가 벌써 궁금하다. 힘내라, 장그래!

"근로자로 산다는 것, 버틴다는 것. 어떻게든, 완생으로 나아가는 것."(33수)

덧붙이는 글 |

< 미생 1~9 완간 세트 > , 윤태호 지음, 위즈덤하우스 펴냄, 2013.09, 9만9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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