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학(譜學)의 대가가 남긴 '마지막 유산'
호남 보학자 故 양만정 선생 '20시간 녹취록' 남겨
조선시대 양반사회 생활상 담겨…학문적 가치 높아
(전주=연합뉴스) 김진방 기자 = "송강 정철(鄭澈)의 집안과 경함 이발(李潑)의 집안은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척을 지게 돼 서로 혼인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 이발의 집안 아낙들은 정철이 미워 '철철철철'하며 칼질을 했다."
이 문장은 호남지역 보학(譜學)의 대가인 고(故) 양만정(1928∼2013) 선생이 생전에 전주역사박물관에 남긴 구술 기록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이 기록에는 동인세력의 지도자였던 이발의 집안이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인해 호남지역 명문가 출신의 정철에게 멸문지화를 당하게 된 뒤로 두 집안이 서로 원수지간이 됐다는 내용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보학은 족보가 발달했던 조선시대에 유행했던 학문으로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주요 씨족과 그 계파들의 내력이나 주요 인물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뜻한다.
명문가의 족보부터 원한관계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양 선생의 보학 지식은 음성파일로 20시간이 넘을 정도로 방대한 양을 자랑한다.
이동희 전주역사박물관장의 기획으로 제작된 '20시간의 기록'은 양 선생이 별세하기 4년 전인 2009년 10월 21일부터 2010년 5월 14일까지 10차례에 걸쳐 기록됐다. 그 양은 MP3 음성파일 12개와 DVD 영상자료 20장, 녹취록 173장(A4)에 달한다.
기록에는 신천 강씨부터 장수 황씨까지 가나다순으로 호남지역 명문가들의 가풍과 문과급제자 수, 호남지역으로 들어오게 된 내력, 우호·원한 관계 등 조선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각 명문가의 생활상이 그대로 담겨 있다.
지금은 그 의미가 퇴색했지만 조선시대에 보학은 각 집안의 정치관계와 혼인관계, 사교계 처신법 등을 결정 짓는 중요한 척도가 될 만큼 양반사회의 기본 교양 지식이었다.
보학은 특별한 저작이나 기록이 없이 각 가문에서 구술로 전해지기 때문에 그 명맥이 유지되기 어렵고 양반문화가 사라진 현대에는 거의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양 선생은 특유의 기억력을 바탕으로 평생을 연구해 온 보학 지식을 세상을 떠나기 전 후세를 위해 남겨 두었다.
지난달 24일 별세한 그는 일본강점기인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선친으로부터 보학을 배웠다.
당시 일본이 한국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양 선생의 아버지는 보학을 통해 그에게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가르쳤다.
양 선생의 평생의 노고가 담긴 20시간의 기록에는 호남지역 명문가들에 얽힌 이야기 등이 상세하게 남아 있다.
예를 들면 그는 기록에서 "호남의 4대 명문가는 한양에서 호남으로 내려온 송강 정철의 연일 정(鄭)씨와 향교 문묘에 모셔진 현인 18명 중 한 명인 하서 김인후의 울산 김(金)씨, 고봉 기대승 행주 기(奇)씨, 삼부자가 임진왜란 때 순절한 제봉 고경명의 장흥 고(高)씨를 뽑는다. 이를 '정김기고'라고 한다"면서 "이 중 장흥 고씨가 벼슬로는 제일 뒤쳐지지만 임진왜란에 의병을 일으키고 삼부자가 순절한 '충절'을 높이 사서 호남의 최고 명문가로 뽑는다"고 호남 4대 명문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의 기록은 범위가 호남지역에 한정된 측면도 있지만 양반 사회 전체를 조망하고 있어 중요한 기록문화가 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기록을 주관한 이동희 관장은 "양 선생은 기억력이 정말 좋은 학자였다. 그 기억력을 바탕으로 남긴 이 기록은 호남지역을 넘어서 조선시대 전반적인 양반 문화를 세세히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료"라며 "이를 잘 활용하면 역사와 관련된 저작을 하는 작가나 창작자에게 영감을 줄 수 있고 학자들에게는 좋은 연구 주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이어 "양 선생의 기록은 조선시대의 양반사회뿐 아니라 양반문화가 사라져 가던 일본강점기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양반문화의 변화에 대해서도 알 수 있는 소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면서 "앞으로 고증작업을 거친 뒤 양 선생의 기록을 학계와 세간에 공개할 예정이다"고 덧붙였다.
chinak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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