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년 정치풍자, 만화가로 살아온 '고바우 영감' 김성환 화백

입력 2012. 1. 27. 09:12 수정 2012. 1. 27.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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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 한 올로 서민을 웃기고 울리던 시사만화 '고바우 영감'을 그린 김성환 화백. 한국 시사만화의 상징인 그가 '까세 수집가'로 모습을 드러냈다.

무표정한 얼굴에 뭉툭한 코, 납작머리 위에 솟은 머리카락 한 올로 기억되는 고바우 영감. 신문 지면을 통해 44년간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고바우 영감은 김성환 화백의 손끝에서 탄생했다. 고바우 영감은 때론 정치인을 풍자하고 때론 권력을 비웃으면서 늘 독자와 함께 울고 웃었다. 서민들이 어려운 시대를 견뎌낼 수 있는 힘이 됐던 고바우 영감과 반세기를 함께한 김성환 화백을 분당 자택에서 만났다.

그는 자신이 시사만화가라기보다는 화가로 불리길 원했다. 현역에서 떠난 후, 김 화백은 네 번의 전시회를 열었고 요즘은 장생도를 그리고 있다. 3~4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김성환 화백은 이미 그때부터 화가의 꿈을 키웠다. 아버지는 의사가 되길 바랐지만 그는 경북고등학교에서 미술부장을 맡으며 그림 실력을 쌓았다. 당시 만화에 관심이 있었던 그는 < 연합신문 > 만화 공모전에 '멍텅구리'라는 제목의 네 컷 만화를 그려 보냈다. 이는 네 컷 만화가 없던 당시로는 파격적인 시도였다. < 연합신문 > 에 '멍텅구리'가 당선된 것을 계기로 그는 < 만화뉴스 > 에 매달 1만원씩 고료를 받는 전속 작가가 됐다. 그 당시 1만원은 지금으로 치면 1백60만원 상당의 금액이다. 생활이 어렵던 그에게 고료는 큰 힘이 됐다. 일곱 식구가 지붕에 구멍이 뚫린 세 평 반짜리 판잣집에서 살던 때였다.

하지만 전속 작가가 된 지 1년 만에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다시, 배고품이 찾아왔다. 김 화백은 북한군을 피해 정릉 다락방에 숨어들었고 그곳에서 1백5점의 전쟁기록화와 만화 캐릭터 2백개를 그렸다. 그 2백개의 캐릭터 중에 고바우 영감도 있었다. 주로 어린이들이 보는 만화지만 할아버지를 주인공으로 세우면 노인들도 보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그린 캐릭터였다. 기분이나 심리 상태를 표정 대신 머리카락 한 올로 표현하는 모험도 감행했다. 평소에는 머리카락이 앞으로 약간 구부러져 있다가 놀라면 빳빳해지고, 질릴 정도의 상황이면 꼬불꼬불, 화가 났을 때는 똑바로 서는 식이었다. 이렇게 탄생한 고바우 영감은 1955년부터 < 동아일보 > 에 게재된다.

만화 '고바우 영감'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김 화백은 서민 편에 서서 만화를 그렸다. 정부가 서민들을 탄압할수록, 정치인이 자신들의 이익만 챙길수록 고바우 영감의 인기는 뜨거워졌다. 이어령 교수는 '국민의 한숨 속에 고바우가 자란다'라는 말을 했을 정도였다. 서민을 괴롭히는 사람은 어김없이 그의 타깃이 됐다. 김종필, 김영삼, 김대중 등 주요 정치인도 어김없이 만화 속에 등장했다. 물론 그려놨다가 못 나온 만화도 부지기수였고, 권력을 모독했다며 필화사건에 휘말리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 때는 검찰에 2번, 중앙정보부에 2번 다녀왔고 전두환 정권 때는 언론계에 불어온 숙청 바람에 휩쓸려 해직을 당했다.

"감시가 심했습니다. 저를 매일 따라다니는 사람도 있었어요. 집에 들어가면 집 앞에 서 있고, 버스를 타면 같이 탔습니다. 자유롭지는 않았죠."

당시, 외국 언론들도 고바우 영감을 주목했다. 그가 정보부에 끌려간 사실이 알려지자 < 뉴스위크 > 와 < 워싱턴포스트 > 기자가 취재를 했을 정도다. 1977년에는 하버드대학에서 '고바우의 언어'라는 제목의 박사학위 논문이 나왔다. 이렇게 화제를 몰고 다니던 김 화백은 < 동아일보 > < 조선일보 > < 문화일보 > 를 거치며 '고바우 영감'을 게재하다가 지난 2000년 9월 29일, 1만4천1백39회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떠났다.

"오래 그렸습니다. 미련은 없어요. 45년간 그렸으니 기간으로는 아마 세계기록일 겁니다. 아쉬운 점이야 있지요. '고바우 영감'이 있을 때는 신문사들이 앞다퉈 시사만화를 싣더니 제가 그만두니까 다들 연재를 중단하더라고요."

사라져가는 시사만화를 기리기 위해 국립중앙도서관에서는 '고바우 김성환 작품 전시실'을 따로 마련했다. 2001년에는 김 화백의 작가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고바우 만화상'이 제정됐다. '까치' 시리즈의 이현세, < 고인돌 > 작가 박수동, < 머털도사 > 와 < 임꺽정 > 의 이두호, < 식객 > 과 < 타짜 > 의 허영만 등 이름만으로도 쟁쟁한 만화가들이 고바우 만화상을 받았다.

여기까지는 대중이 아는 김성환 화백이다. 다른 한편에는 우표 수집인으로서의 김성환이 있다. 박정희 정부 시절, 집 근처까지 온 괴한들 때문에 불면증에 시달리던 박 화백은 어느 날부턴가 우표 가장자리에 뚫린 작은 구멍을 세기 시작했다. 이처럼 단순 반복되는 일을 하다보면 잠이 올 거라 생각한 것이다. 하루 이틀 구멍을 세는 데 몰두하다 보니 자연스레 우표에 애정을 갖기 시작했다. 은행 금고에 보관할 정도로 귀한 우표를 모으는 마니아가 된 것이다. 그런 김 화백이 까세(편지봉투와 엽서에 그린 작은 그림) 수집가로 변신한 데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박수근 화백과 굉장히 친했어요. 집이 가까워서 자주 어울렸죠. 제 유화 전시에 박수근 화백이 찬조 출품을 약속할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직장생활을 하기 시작하면서 자주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돌연 박 화백이 저세상으로 떠났습니다. 그를 기억할 만한 작은 소품도 남기지 않은 채로요. 친한 사람이 떠난 뒤에도 추억할 작은 증표라도 있으면 덜 안타깝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후부터 인연이 깊은 선후배들에게 그동안 모은 우표가 붙은 봉투를 내밀며, 우표와 연관된 그림을 그려달라는 부탁을 했다. 대개는 보답으로 자신의 작품을 한 점씩 선물했다.

"까세를 부탁하면 그 자리에서 쉽게 그려주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몇 달이 지나서 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는 어렵게 모은 수집품이야말로 사랑을 받는다는 이치를 깨달았다고 한다. 요즘도 울적하거나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수집한 까세를 한 장 한 장 펼쳐 보면서 이걸 그릴 때 작가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를 상상하고 있으면 저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김 화백에게 까세는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 자주 보지는 못하는 선후배들을 따뜻하게 이어주는 연결고리다. 그는 임권택, 천경자 등 까세를 통해 맺은 인연들을 공개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

이승만 전 대통령의 며느리인 조혜자 박사가 회장으로 있는 무궁화 동우회에서 김성환 화백에게 감사패를 전한 적이 있다. 언제나 통쾌한 웃음을 주는 것에 대한 감사였다. 이를 계기로 김 화백은 조혜자 박사 내외와 교분을 맺었으며 이를 계기로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까세를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프란체스카가 그린 산과 집 그림은 초등학생 그림처럼 간단하지만 평소 근검절약하는 생활로 유명한 그녀의 모습이 드러나는 듯하다.

가끔씩 만나 술잔을 기울이는 친구, 임권택

1백 편이 넘는 영화를 만들며 한국 최고 감독이 된 임권택과의 인연은 대통령이 각계각층 인사를 불러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시작됐다. 자택이 서로 가깝다 보니 몸이 불편해 거동이 자유롭지 않은 요즘도 가끔 중국집에서 만나 사회와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분야는 다르지만 이제는 서로 마음을 나누는 사이가 됐다.

마음 여린 후배, 천재 화가 천경자

김성환 화백과 여류 서양화가 천경자의 인연은 깊다. 그림만 그려 세상 돌아가는 일은 잘 알지 못하는 천경자는 언론사에 근무해 세상 물정에 밝은 김 화백을 많이 의지했다. 그녀가 찾아와 자신의 속 얘기를 할 때마다 김성환 화백은 어르고 달래며 적절한 해결책을 찾아주었다고 한다. 그는 가장 기억에 남는 까세로 천경자 화백의 작품을 꼽았다. 이유는 가장 오래 기다렸기 때문. 다른 작품들은 당일이나 일주일 정도면 받을 수 있었지만 천경자 화백의 까세는 채색화에 유화라 제작 시간이 수개월씩 걸렸다.

인터뷰 말미까지 노(老) 화백의 목소리는 카랑카랑했고 발언에는 거침이 없었다. 서슬퍼런 권력을 향해 거침없이 야유를 던지던 고바우 영감은 여전히 현역이었다. 권위주의 정치 시대가 끝났지만 지금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여전히 고달프다. 지금까지도 누군가의 뇌리에 고바우 영감과 김 화백이 잊히지 않는 이유는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취재: 박은혜 기자 | 사진: 이호영, 롯데 갤러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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