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나요, '개여뀌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

2006. 9. 18.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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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윤희경 기자]

▲ 개여뀌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
ⓒ2006 윤희경

'여뀌', 귀여운 이름입니다. '뀌'보단 귀가 좋아 '여귀'라 부르며 이 꽃들이 피어나길 기다립니다. 찬이슬이 내리기 시작하면 '여기 좀 보세요'라는 듯 가을 문을 열고 앞으로 다가섭니다. 여귀가 아니고 왜 여뀌일까, 여뀌라면 뜻은 무엇일까, 갸우뚱대며 여기저기 찾아봐도 시원한 대답이 없습니다.

자전에는 '요화(蓼花)', 즉 풀이 길고 큰 모양의 꽃이 여뀌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여뀌들은 대부분 벼이삭보다 키가 더 큽니다. 여뀌는 종류도 다양합니다. 여뀌, 개여뀌, 가시여뀌, 기생여뀌, 털 여뀌, 버들여뀌, 이삭여뀌, 장대여뀌 등.

▲ 풀밭을 환하게 밝히는 여뀌.
ⓒ2006 윤희경

논밭이나 냇가 습지는 여뀌들 세상입니다. 논두렁이나 밭머리에 피어나는 여뀌들은 농사꾼들에겐 원수이자 골칫덩어리입니다. 뽑고 베어내고 또 뽑아내도 끈덕지게 살아남는 야물찬 잡초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논밭두렁이 갑자기 환하게 밝아옵니다. 사람들이 여름내 모질게 내팽개쳤건만 여뀌는 찬바람이 돌면 고춧가루 빛으로 촘촘히 피어납니다. 분홍색 좁쌀처럼 매달린 여뀌꽃은 어둑한 풀숲에 불을 밝혀놓습니다.

▲ 털이 보송보송한 털여뀌. 털은 끈적끈적 달라 붙는다.
ⓒ2006 윤희경

개여뀌들은 꽃잎도 없이 알몸으로 피어납니다. 무더기로 피어나 자신을 붉게 태워내는 모습은 차라리 '소리 없는 아우성'입니다. 발버둥치며 살아가는 우리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여간 안쓰럽지 않습니다.

개복숭아, 개머루, 개똥참외, 개살구처럼 이름에 '개'가 들어가면 흔하고 천한 똥개 취급을 받습니다. 인간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식물이자, 먹지 못하는 불량품 신세라고나 할까요. 그러나 밤하늘에 총총 빛나는 별들을 만나면 여뀌들은 재롱부리는 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들고 늙은 농부 기침 소리에 귀를 쫑긋거립니다.

▲ 조 이삭을 닮은 여뀌. 화가 나면 물고기도 잡아요.
ⓒ2006 윤희경

개여뀌들이 여뀌로 '업그레이드' 되면 문제가 좀 달라집니다. 여뀌는 '매운맛'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옛날엔 농사일을 하다 심심타 싶으면, 여뀌 잎과 줄기를 짓이겨 물고기를 잡아 천렵을 하기도 했습니다. 흉년이 들어 먹을 게 부족하거나 민심이 흉흉하면 아예 여뀌 꽃을 짓눌러 빻아 물고기들을 몽땅 잡았다고 합니다.

여뀌들이 촘촘한 이삭 모양으로 매달려 있습니다. 벼 포기 사이에 듬성듬성한 여뀌들은 어쩌면 힘없는 농부들의 자존심인지도 모릅니다. 요즘 사람들은 멀쩡해 보이다가도, 시간만 나면 쌀로 농심을 흔들어 놓고 있습니다. 아직도 여뀌의 매운맛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스스로 위로하며 여뀌들을 다독여줍니다.

▲ 벼 이삭을 닮아가는 이삭 여뀌. 농부들의 자존심이기도 하다.
ⓒ2006 윤희경

좁쌀처럼 들어와 박힌 개여뀌들의 아우성 소릴 들으며 끈질긴 생명력 앞에 머리를 숙입니다. 황금빛으로 물들어가는 논배미 속 이삭을 쪼아대던 청둥오리 떼들이 푸드득 화악산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윤희경 기자

덧붙이는 글다음카페 '북한강 이야기' 윤희경 수필방에도 함께합니다. 저기 우측 상단 주소를 클릭하면 쪽빛 강물이 흐르는 북한강 상류에서 새로운 고향을 만나 볼 수 있습니다.기자소개 : 윤희경 기자는 북한강 상류에서 솔바우농원을 경영하며 글을 쓰는 농부입니다. 올 4월에 에세이집 '북한강 이야기'를 펴낸 바 있습니다. 카페 주소는 cafe.daum.net/bookhankang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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