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산정호수에 이름 모를 소녀의 초록빛 눈동자가..

2005. 9. 22.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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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이종찬 기자]

▲ 가을빛 머무는 그 산정호수에는 누가 날 기다리고 있을까
ⓒ2005 이종찬

그 호수에 가면 하얀 나비 같은 소녀 날 기다리고 있을까

버들잎 따다가 연못 위에 띄워놓고쓸쓸히 바라보는 이름 모를 소녀밤은 깊어가고 산새들은 잠들어아무도 찾지 않는 조그만 연못 속에달빛 젖은 금빛 물결 바람에 이누나출렁이는 물결 속에 마음을 달래려고말없이 기다리다 쓸쓸히 돌아서서안개 속에 떠나가는 이름 모를 소녀

33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가수 김정호(1952~1985)의 <이름 모를 소녀>와 <하얀 나비>란 노래를 나직하게 읊조리며 용추호수를 찾아 가는 길. 갈빛으로 물들어가는 산을 바라보아도, 풀숲에서 진종일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를 들어도, 왠지 마음이 슬프고 무겁기만 하다. 쓸쓸하고도 슬픈 노래 가사 때문일까. 아니면 또 다시 스러져가야 할 생명들의 슬픈 그림자가 일렁거리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까.

가수 김정호는 이승에서 그렇게 애타게 부르던 그 '이름 모를 소녀'와 '하얀 나비'를 저승에서나마 만났을까. 그가 애타게 부르던 그 '이름 모를 소녀'와 '하얀 나비'는 대체 누구였을까. 하얀 나비를 닮은 그 이름 모를 소녀가 얼마나 가슴이 저리도록 사무쳤기에 그토록 슬픈 목소리로 그 소녀를 애타게 불렀을까. 얼마나 그리웠으면 병들어 일찍 떨어지는 낙엽처럼 슬픈 표정을 지으며 그 소녀를 죽는 그날까지 찾았을까.

지금 그 호수에 가면 김정호가 "음~ 생각을 말아요 지나간 일들은/ 음~ 그리워 말아요 떠나갈 님인데/ 꽃잎은 시들어요 슬퍼하지 말아요/ 때가 되면 다시 필 걸 서러워 말아요// 음~ 어디로 갔을까 길 잃은 나그네는/ 어디로 갈까요 님 찾는 하얀 나비" 같은 그 이름 모를 소녀, "버들잎 따다가 연못 위에 띄워놓고" 날 기다리고 있을까.

▲ 용추호수로 가는 오솔길 주변은 온통 황금빛이다
ⓒ2005 이종찬
▲ 보석처럼 아름답게 반짝이는 용추호수
ⓒ2005 이종찬

천년 묵은 용이 하늘로 승천했다 하여 이름 붙혀진 용추호수

19일(월) 오후 3시. 천년 묵은 용이 하늘로 승천했다는 용추호수로 가는 오솔길 곳곳은 가을빛을 잔뜩 품고 있다. 누우런 벼가 고개를 포옥 숙인 황금빛 들판에서는 참새 몇 마리 포로롱포로롱 날아오르고, 풀벌레 소리 요란하게 들리는 논둑 곳곳에서는 은빛 으악새가 가끔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한껏 뒤챈다.

따가운 가을햇살을 물고 빨갛게 익어가는 고추. 주렁주렁 매달린 고추에 뒤질세라 노오란 모과를 보석처럼 알알이 매달고 있는 모과나무. 눈 시리도록 푸르른 가을 하늘에 퐁당 빠진 채 발갛게 익어가고 있는 동이감. 다랑이 밭둑 곳곳에 파릇파릇 새싹을 내민 가을무와 김장배추. 어릴 때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추억을 일깨우는 빨간 고추잠자리.

용추호수로 가는 오솔길에는 어느새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결실과 수확의 계절 가을은 사람들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어도, 사람들이 아예 기다리고 있지 않아도 때가 되면 제 알아서 오는가 보다. 사람들이 제 아무리 세월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고 싶어 용을 쓰더라도 자신도 모르게 나이를 먹고 점점 늙어가는 것처럼 그렇게.

내가 어릴 때 마을 사람들이 '용추골'이라 불렀던 용추계곡을 품고 있는 용추호수(창원시 용동). 용추호수는 지금도 이 지역 사람들이 '용추못' 혹은 '용연(龍淵)'이라 부르는 아름다운 산정호수다. 용추호수를 품고 있는 마을 이름을 용동(龍洞)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산정호수에서 천년 묵은 용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천 년 묵은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깃든 용추호수
ⓒ2005 이종찬
▲ 용추호숫가에 앉아 물수제비를 날리고 있는 연인들
ⓒ2005 이종찬

그래서일까. 비음산(486m)과 전단산(567m) 사이에 숨어 있는 용추계곡(2km)을 따라 올라가면 용이 하늘로 올라가기 위해 나왔다는 용추샘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 지역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이 샘은 명주실 한 타래를 다 풀어 넣어도 모자랄 정도로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고 한다. 또한 이 지역에 가뭄이 심하게 들 때마다 이 지역을 다스리던 고을 원님들이 이 샘에서 기우제를 지냈단다.

이름 모를 소녀처럼 호수를 이리저리 떠도는 나뭇잎배

초록빛 잔주름을 또르르 또르르 말고 있는 용추호수. 티 한 점 보이지 않는 맑디맑은 용추호수를 더 가까이서 바라보기 위해 호숫가로 내려선다. 호숫가 주변에는 "님 찾는 하얀 나비" 같은 사람들이 자꾸만 물수제비를 날리고 있다. 납작한 조약돌이 초록빛 호숫물을 톡톡톡 튕기며 가장자리로 튕겨나가다가 이내 '퐁', 소리를 내며 사라진다.

그때, 오리 한 쌍이 초록빛 잔주름을 헤집으며 호숫가로 천천히 다가온다. 사람들이 던지는 조약돌이 혹여 자신들에게 던져주는 먹이가 아닐까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사람들에게 길들여져 날지 못하는 새. 갑자기 가여운 생각이 든다. 하지만 오리 한 쌍이 사이좋게 헤엄치며 다가오는 모습은 한 폭의 풍경화처럼 아름답기만 하다.

저만치, 아까부터 호숫가에 앉아 호수를 바라보며 무언가 비밀스러이 속삭이고 있는 연인 한 쌍도 호수를 떠도는 오리 한 쌍처럼 다정스럽게 보인다. 저 연인들은 잔잔한 호수에 비친 짙푸른 하늘과 산 그림자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저 연인들도 나그네처럼 가을빛에 젖어들고 있는 이 산정호수를 오래 바라보며 김정호의 이름 모를 소녀와 하얀 나비를 떠올리고 있을까.

▲ 잔물결을 가르며 헤엄치는 오리 한 쌍이 한 폭의 그림과 같다
ⓒ2005 이종찬
▲ 누가 이 깊은 산 속에 보석을 떨구어 놓았을까
ⓒ2005 이종찬

저 연인들도 나그네처럼 버들잎 몇 장에 못 다한 소원을 실어 이 아름다운 호수 위에 띄우고 싶을까. 그리고 그 이름 모를 소녀처럼 호수를 이리저리 떠도는 나뭇잎배를 오래 오래 바라보며 밤이 깊어가는 줄도, 산새들이 잠든 줄도 모른 채 나뭇잎배가 달빛에 젖어 금빛 물결로 일렁이며 마음 속 깊숙이 떠돌기를 바라고 있을까.

초록빛 호수에 툭툭 떨어지는 꿀밤과 부처님의 그림자

이름 모를 소녀가 떨군 그리움처럼 빛나고 있는 용추호수 주변에는 오래 묵은 소나무와 갈참나무가 호수 위에 가지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다. 바람이 슬쩍 불 때마다 갈참나무에 매달린 갈색 꿀밤(도토리)이 초록빛 호수에 툭툭 떨어지며 동그란 원을 그린다. 그 동그란 원 속에 길상사가 제 그림자를 은근슬쩍 비춘다.

용추호숫가, 전단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길상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송광사 말사다. 들머리와 마당 곳곳에 '걸음은 조용조용, 말씀은 가만가만, 생각은 있듯 없듯'이란 글씨를 새겨놓은 이 절은 지난 4월에 대웅전 낙성식을 한 절로 역사가 깊은 그런 절은 아니다. 그렇다고 이 절 안에 독특한 문화유산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은빛 윤슬을 톡톡 터뜨리고 있는 용추호수를 마주 하고 있어서 그런지 경내에 들어서면 자신도 모르게 몸이 가벼워지면서 마음이 편안해진다. 대웅전 앞 바위에 새겨진 서 있는 삼존불도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맨발로 서 있는 이 석조 삼존불이 누가 언제 새겼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 이 절에 오게 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하지만 전체적인 모습이나 조각 솜씨를 볼 때 예사롭지 않은 불상임에 분명하다.

▲ 갈색 도토리가 툭툭 떨어지며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는 용추호수
ⓒ2005 이종찬
▲ 길상사 대웅전 앞에 서 있는 석조 삼존불
ⓒ2005 이종찬

길상사 뒤 쪽에는 전단산으로 올라가는 등산길이 있다. 전단산은 이곳 사람들이 징산(천지개벽 때 산마루에 징 하나 얹을 정도만 남고 모두 물에 잠겼다 해서 붙혀진 이름), 봉림산, 정병산으로 부르는 창원의 어미산이다. 창원시가 펴낸 <창원의 전설>이라는 책에 따르면 "이 산은 본래 봉림산이라 불렸고 지금의 이름(정병산)은 1920년에 일제가 5만분의 1 군사 작전지도를 작성할 때 고친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문(眞鏡大師寶月凌空塔碑文)>에는 "신라시대에 진경대사가 이 산 중턱에 봉림이라는 절을 지었고, 통일신라 말기에는 선문 구산(禪門九山)의 하나인 봉림산파의 중심사찰인 봉림사와 그에 딸린 사찰이 여럿 들어섰다"며, "고려시대 이후에 불교의 요람이라는 뜻으로 전단산이라 불렀다"고 적혀 있다.

깊어가는 가을, 산정호수를 오래 바라보며 갈빛 가을을 품어보자

그날 그 호수에는 김정호가 그리도 애타게 불렀던 이름 모를 소녀는 보이지 않았다. 그 이름 모를 소녀의 혼백 같은 하얀 나비도 보이지 않았다. 비음산과 전단산의 그림자를 사이좋게 드리우고 있는 용추호수에는 "님 찾는 하얀 나비" 같은 사람들이 자꾸만 물수제비를 날리고 있었다. 그 물수제비가 톡톡 튕겨내는 물방울이 마치 자신의 소원을 이루어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날 그 호수에는 이름 모를 소녀가 초록빛 물결 위에 꼭꼭꼭 찍어놓은 그리움 같은 잔물결들이 초록빛 눈동자를 한껏 빛내고 있었다. 그 초록빛 눈동자 속에서 하얀 나비 같은 윤슬들이 수없이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그 하얀 나비들이 찬란한 은빛 가루를 흩뿌리며 날아오르는 자리, 갈색 가을이 성큼 다가서고 있었다.

▲ 올 가을에는 용추호수에 앉아 그리운 사람의 눈동자를 떠올려보자
ⓒ2005 이종찬

그날, 나그네는 그 잔잔한 산정호수에 서서 이름 모를 소녀가 하얀 나비가 되어 짙푸른 가을하늘로 훨훨 날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날 나그네는 부처님의 감로처럼 졸졸 흘러내리는 용추계곡에 잠겨 갈색으로 물드는 가을을 가슴 깊숙이 품었다. 그날 나그네는 길상사 삼존불을 오래 바라보며 부처님의 그림자를 슬며시 밟았다.

그래. 올 가을에는 보석 같은 산정호수를 품고 있는 용추골로 가자. 가서 천년 묵은 용이 승천하다 떨어뜨린 여의주처럼 빛나고 있는 용추호수에 서서 아름다운 그 사람의 초록빛 눈동자를 가만가만 떠올려보자. 가서 부처님의 사리처럼 톡톡 떨어지는 갈색 도토리를 주워 못 견디게 그리운 그 사람의 이름을 도토리에 가만가만 새겨보자.

/이종찬 기자

덧붙이는 글

☞ 한국관광공사 창원 전단산 정보 바로보기

☞가는 길/서울-대진고속도로-진주-남해고속도로-동마산 나들목-창원역-39사단-명곡로터리-창원의 집--경남도청과 경남도의회 사잇길-용추호수-길상사※용추호수에서 오른쪽 산길을 따라가면 울창한 숲에 가리워진 용추계곡과 비음산이, 왼쪽 산길을 따라가면 길상사와 전단산(정병산 혹은 봉림산으로 불림)으로 올라가는 등산로가 보인다. 용추호수 주변에는 무료 주차할 수 있는 널찍한 공터가 있으며, 국수와 백숙, 파전, 동동주를 파는 집들이 줄을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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