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앓던 세 사람에게 두려움 대신 자유를 주었어요"

경향신문

여느 때와 다름없던 2010년 9월의 오후, 세 식구는 그렇게 배낭 하나씩을 둘러메고 동네 꼬마들이 팔딱팔딱 뛰놀던 아파트 단지 놀이터를 지났다. 인도, 네팔, 터키를 거쳐 서쪽 끝 스페인까지…, 총 3만6000여㎞, 7개월에 걸친 기나긴 여정의 시작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때 우리 가족 모두가 앓고 있었던 것 같아요. 아내는 말할 것도 없고 시간이 흐르며 저도 차츰 지치더라고요."

남씨는 자신의 삶을 즐겁게 해주던 온갖 카메라와 영상 장비들이 아내의 병수발과 생활비로 하나둘 사라지는 것이 당시에는 그렇게 괴로웠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당시엔 죽음을 떠올릴 정도였으니, 아마 우울증이 아니었나 싶어요. 아이는 아이대로 사춘기라 힘든 시기였죠. 부모의 손길이 절실했을 텐데, 저렇게 커준 게 고마울 뿐이에요."





아픈 아내에게 추억을 선사하기 위해 세계여행을 다녀온 남기환씨 가족이 지난 4일 서울 남산 성곽길 앞 전시관에서 지난 여행을 돌아보며 추억을 나누고 있다.

아버지의 따뜻한 눈길에 옆에 앉은 다인(18)이 피식하고 웃었다. 아버지보다 두 뼘은 커보일 정도로 훌쩍 자랐지만, 그 과정이 분명 녹록지 않았을 터다. 한데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였다.

"자퇴요? 학교 안가고 여행을 간다니 좋기만 하던데요. 사실 제가 공부엔 취미가 없었거든요.(웃음) 사실 처음에는 엄마가 쓰러지는 것을 봐도 와 닿지가 않았어요. 저건 드라마에서나 보던 장면인데…, 내가 지금 TV를 보고 있나 하는 생각만 들었죠."

여행의 출발지로 삼은 곳은 강원도 삼척. 여행을 즐기던 남씨가 유난히 좋아하던 곳이었다. 삼척의 맑은 공기와 푸른 동해 바닷가에서 마음을 추스른 가족은 울진, 포항, 부산을 거쳐 제주도까지 걸어서, 또 버스를 타고 갔다.

걷고 싶으면 배낭을 메고, 쉬고 싶으면 아무 데서나 배낭을 풀었다. 특별한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유난히 추위를 타는 김씨를 위해 남으로 남으로, 따뜻한 곳을 향해 잡은 여정이었다.

그리고 날아간 곳이 인도. 신과 사람이 공존하고, 삶과 죽음이 교차한다는 땅이었다. 툭하면 쓰러지는 아내를 데리고 간 곳이 하필이면 인도라니, 묘했다.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인도에서의 첫 여행지는 남부의 마이소르, 거기서부터 3개월간 남으로 남으로 가볼 작정이었다.

하지만 어둠이 내린 마이소르 기차역 광장은 첫 만남부터 영혼의 평온을 찾아온 이들을 거부하는 듯했다. 후텁지근한 공기 사이로 지린내가 올라오고 사람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매연이 밤안개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가뜩이나 병약한 김씨의 목을 괴롭혔다. 5분도 마음 편히 쉴 공간이 없었다. 매연, 흙먼지, 빵빵 대는 거리의 소음과 달려드는 호객꾼들, 그리고 주머니를 노리고 눈을 번뜩이는 온갖 협잡꾼들….

김씨가 주저앉았다. 인도 여행을 시작한 지 일주일 만이었다. 평소엔 약 한 알이면 곧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그때만은 예외였다. 주저앉은 김씨에게로 찌그러진 깡통을 든 손들이 연이어 쏟아졌다.

"경망스럽고, 매사에 경솔한 이 못된 놈을 절대로 용서하지 마십시오. 누구에게 기도하는지도 모르고 제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왔어요.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도움을 청할 곳은 없지, 그저 아내 가슴만 바라보며 '괜찮아질거야'라는 소리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아픈 아내를 이런 곳에 끌고와서 결국 죽게 만드나 하는 자괴감에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지더군요. 아내의 손을 잡고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하며 기도했죠. 다행히 얼마 안 있어 손에 온기가 돌아왔어요."

아내의 손을 잡고 있던 그때, 남씨는 아내와의 지난 삶이 마치 영화 필름처럼 머릿속을 지나더라고 했다. 특별히 잘해준 것이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고도 했다. 풍광 좋은 곳만 찾아 다니느라 수시로 집을 비운 자신이 미웠다고 했다. 특히 이란으로 여행을 갔다가 총을 맞고 돌아온 자신을 바라보던 아내의 눈빛이 그렇게 또렷하게 떠오를 수가 없었다고 했다.

무역업을 하던 남씨의 취미는 자동차 여행이었다. 그것도 국내에서 가까운 곳을 조금 다니는 '드라이브' 정도가 아니라 대륙을 달리는 스케일이었다. 2001년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할 때였다. 영국을 출발해 이란 내륙을 거쳐 파키스탄과 인접한 국경 도시 자헤단을 달리고 있던 그의 자동차 뒤로 픽업트럭 한 대가 따라붙었다.

등에 긴 총을 멘 그들은 경찰도 군인도 아니었다. 납치를 당하면 그걸로 끝이라는 생각에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려 저항의사가 없다는 표시를 한 채 뒷걸음을 쳤다. 그러자 시작된 위협사격. 탕탕탕탕! 총성이 울리고 검은 아스팔트 조각이 공중으로 튀어오르는 순간, 뜨거운 기운이 등을 적시며 아스팔트 위로 쓰러졌다. 한 발은 정강이뼈를 관통했고, 아스팔트에 튄 또 다른 유탄은 다른 쪽 엄지발가락에 박혔다.

"아이의 바이올린 연주소리와 커피를 내오던 아내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가더군요. 회한의 눈물이 주르르 흘러나왔어요. 그래, 이제 그만 다니자. 가족과 함께 있으라고 내 다리를 부숴 버린 것이 틀림없어, 아내에게 죄를 짓고 산 값을 치르는 거야, 이런 생각이 막 떠올랐어요."

옆에서 듣기만 하던 김씨가 눈을 흘기며 한마디했다. "그러면 뭐하겠어요. 국경수비대에 구조돼 다행히 목숨을 건졌지 안 그랬으면…. 그런데 기가 막히는 건 다리에 쇠를 박고 1년 후에 거기를 또 가더라고요."

아내는 남편이 늘 그런 식이라고 했다. 큰일 다 저질러 놓고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웃어 버리는 거, 남편은 그런 사람이었다고 했다.

아내의 푸념이 이어질 듯하자 이번엔 남씨가 겸연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을 잘랐다.

"그렇게 살아온 제가 아내를 인도의 길바닥에서 죽게 만들게 생겼으니 얼마나 놀라고 아팠겠어요."

귀국을 결심했다. 탈출하듯 삼일 밤낮을 달려 찾은 인도 중북부의 하이데바라드 공항 부근. 그러나 비행기표를 구할 수 없었다. 호텔에서 하룻밤을 쉰 다음날, 김씨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이왕 왔는데 계획대로 델리까지 가서 유럽으로 넘어가자."

걱정이 된 남씨는 아내를 말렸다. "유럽은 지금 한겨울인데, 당신 추운 거 못 견디잖아."

그러자 아들 다인이가 의견을 냈다. "그럼 우리 동남아로 가자. 거기는 따뜻하고 바다도 좋잖아."

"엄만 터키에 가고 싶어, 지중해 바닷가에 있는 안탈랴는 꼭 가보고 싶어."

김씨의 목소리에선 간절함이 묻어났다. 결국 네팔에 가서 히말라야를 보고 유럽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아플 땐 모든 걸 때려치우고 싶었지만 몸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면 그런 생각이 싹 없어져요. 아마 제 삶에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이란 생각이 저를 그렇게 간절하게 만들었나봐요."





혼란스러운 남인도를 떠나 북인도 시킴을 찾은 김연희씨와 아들 남다인군. 뒤편에 보이는 봉우리가 세계 3위의 고봉 칸첸중가이다. |남기환씨 제공

애당초 배낭 하나씩만 달랑 메고 떠난 여행이었지만 필요없어 거추장스러운 짐들이 여기저기 눈에 들어왔다. 꼭 필요한 것만 추려내고 한번 더 짐을 줄였다. '비움'의 과정이랄까. '여행은 학교'라는 말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인도 북부의 다르질링과 네팔의 포카라는 천국이었다. 남씨는 히말라야가 한 뼘 남겨 놓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아내와 아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행복을 느꼈다.

"아내와 아들은 표현이 서툰 편이에요. 말도 없고. 집에서도 내가 말을 안하면 한마디로 절간이에요. '사랑한다' 이런 말은 더더욱 못하는 스타일이죠, 그런데 그때는 달랐어요."

다가가서 아내와 아들을 꼭 끌어안았다. 남씨는 그 순간에 감사하고 안도하며 '훗날 오늘 이 순간들을 담아 여행 이야기를 하리라'고 마음먹었다고 결심했다.

"대부분의 인도 여행기가 인도를 영혼이 충만한 곳으로 표현했잖아요. 하지만 처음 도착했을 때 우리에겐 지옥이었어요. 그런데 돌아보니 바로 옆엔 천국이 있더라고요. 결국 인도는 천국도 지옥도 아닌 그냥 인도예요. 모든 게 우리 마음속에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해요."

의류를 수출하는 대기업에 다니던 남씨가 김씨를 처음 본 것은 1993년 무역협회 사무실에서였다. 역시 의류수출을 하던 중소기업 직원인 김씨가 서류를 꾸미느라 끙끙대는 것을 보고 작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리고 각자 일을 마친 후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 건물 지하에서 칼국수를 함께 먹은 게 인연의 시작이었다.

"제가 아내뿐 아니라 다른 여자들한테도 그랬어요. 총각 때 아닙니까. 물론 아내가 유난히 눈에 들어오긴 했죠. 작고 하얀 얼굴이 어찌나 예쁘던지…."

김씨에게 일부러 엘리베이터에서 기다렸느냐고 묻자 손사래를 쳤다. 아들 다인이는 "착하기만한 엄마가 아빠한테 속아 결혼했다"고 거든다.

비교적 평온한 결혼생활이었지만 서로에게 앙금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둘째를 유산했을 때였다.

"다인이가 계획 없이 태어난 터라 당시만 해도 아이는 저절로 나오는 것으로 생각했어요. 그런데 유산이 됐다고 하니 원망스러운 마음에 '잘됐네'라고 지나가듯 내뱉은 것 같아요. 내색은 안 했지만 그게 아내에게 상처가 됐죠."

터키의 시데 해변을 걷던 남씨는 신전의 기둥 아래서 부둥켜안은 연인들을 보며 오랫동안 가슴에 묻었던 말을 꺼냈다.

"나도 그 아이 심장소리를 들을 때 눈물을 흘렸어. 감사하다고, 그리고 이왕이면 딸이었으면 좋겠다는 기도도 했어. 아직도 그 아이 심장소리가 생생해…."

마침 다인이는 차안에서 쿨쿨 잠이 든 터였다. 두 사람은 그날 서로의 손을 꼭 잡고 그렇게 가슴속에 쌓인 묵은 때를 벗겨냈다. 여행이 준 선물이었다.

여행은 스위스, 독일, 체코를 거쳐 스페인으로 이어진 후에야 끝이 났다. '생활'이 다시 시작됐다. 모든 것을 그만둔 터라 경제적으로 궁핍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오래전 직장에서 퇴사할 때는 금세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운영하던 회사를 정리했을 때는 당장 밥을 굶을 것 같았다. 1년 정도 온 가족이 해외여행을 하고 나면 완전 백수가 될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런데 여전히 세상은 돌아가고, 가족은 여전히 행복했다. 긴 여행 후 가족의 일상은 더욱 활기가 넘쳤고 꿈과 희망이 가득했다. 지난 7개월간의 여행이 세 사람을 변화시킨 것이었다.

기적 같은 일도 일어났다. 2011년 5월 어느 날 TV를 보고 있을 때였다. EBS < 명의 > 라는 프로그램에서 김씨와 똑같은 증상을 가진 환자를 수술로 완치시킨 내용이 방송됐다. 그동안 포기하고 살았는데, 눈이 번쩍 뜨이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날 당장 의사를 찾아갔다. 그리고 며칠 후 김씨는 수술대에 올랐다.

행복의 뒷전에는 악마의 시샘이 도사리고 있다고 했던가. 완치를 장담하는 주치의의 말에 퇴원을 준비하며 들떠있던 그날, 치질증세를 검사해야겠다는 말을 들었다. 기쁨은 단 하루였다. 이미 간으로 전이가 된 대장암 4기라는 진단이 나왔다. 청천벽력이었다.

심장수술을 받은 지 단 3일 만에 김씨는 또다시 수술대에 올랐다. 대장과 간에 붙은 암세포를 동시에 제거하는 대수술. 오전 9시에 시작된 수술은 오후 6시가 돼서야 끝이 났다.

마취에서 깨어난 김씨는 꿈을 꾸는 듯 여행 중 가장 행복했다는 프랑스 론 강변의 추억을 이야기했다. 도려낸 살갗에 아픔이 느껴질 때면 론 강의 추억들이 맴돌았다고 했다.

"세 사람을 변화시킨 여행 이젠 시베리아 횡단 목표"

"앞에는 강이 흐르고 주위엔 느티나무가 가득했어요. 강 언덕에서 캠핑을 했는데 그때의 고요와 평화로움을 잊을 수가 없어요. 심장부정맥 수술은 부분마취를 하고 했거든요. 의식이 또렷했죠. 그때도 론 강의 평화만 머릿속에 그리며 견뎠어요."

아내가 긴 여행의 추억을 회상하며 대수술의 통증을 이겨내는 동안 기환씨의 머릿속에서는 여행 중 셋이 다짐하고 약속했던 미래의 꿈들이 스쳐 지나갔다.

수술은 끝났지만 전쟁과도 같은 항암치료가 시작됐다. 이제 돈을 벌어야 했다. 하지만 추억만으로는 안되는 것이 돈이었다. 휴업 중이던 회사는 재개업을 꿈꿀 수 없는 상황이었고 남은 것은 아내가 운영하던 조그마한 의류매장뿐이었다. 엄마의 수술 소식에 아들 다인이도 여행 후 떠났던 유학을 포기하고 돌아왔다. 미래의 불안감이 쓰나미처럼 몰려왔지만 이제 희망을 만드는 것은 오로지 기환씨의 몫이었다.

"여행 전엔 술값 펑펑 쓰고 건방을 떨며 나 잘난 맛에 사는 스타일이었어요. 아무것도 아닌 일에 스트레스를 받기 일쑤였죠. 그런데 지금은 남을 의식하고 쓸데없이 경쟁하고 그런 것들을 많이 내려놓았어요. 그 여행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잘해내지 못했을 게 분명해요."

매장에 있으면서 한가한 시간에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누군가와 얘기를 하고 싶어 재미 삼아 시작한 것이었지만 마음이 약해지고 흔들릴 때마다 스스로를 다잡는 반성의 의미도 있었다고 했다. 또 세상에 대한 욕심이 스멀스멀 생길 때마다 들춰보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비워야 채워진다는 말이 있죠? 스스로를 반성하고 돌아보는 글을 올리면 올릴수록 저를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더라고요. 작가도 아닌 제게 선생님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책을 내자는 제안도 오고…."

그렇게 해서 < 슬픈 날의 행복여행 > 을 냈다. 그리고 기환씨는 프리랜서 여행작가로서 제2의 삶을 설계하게 됐다. 아들 다인이도 훌쩍 자랐다.

"다른 사람들이 그래요, 생각이 커졌다고. 제 스스로도 작은 책상머리 대신 세상이라는 큰 교과서로 공부한 느낌이에요. 시야가 넓어진 느낌?"

기환씨가 한마디 거든다.

"자기라고 왜 답답하고 미래가 불안하지 않았겠어요. 어느날 집에 들어오니 혼자 펑펑 울고 있더라고요. 공부와 담쌓고 지냈던 녀석인데 과외를 시켜달라더니 요즘은 아주 열심히 해요."

아내 연희씨도 퇴원했다. 비록 석 달마다 재발여부에 대한 검진을 하고 결과를 들어야 하는 처지지만 그런 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그것마저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것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석 달마다 병원에 다녀와서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친다고 했다.

"여보, 아들~ 나 3개월 또 벌었어!"

세 사람은 요즘 또 다른 궁리를 하고 있다고 했다. 건강이 조금 나아지고 형편이 좋아지면 시베리아 횡단을 떠나겠다는 것이다. 세 사람은 또 자신들은 지금도 여행 중이라고 했다. 인도, 네팔, 터키, 프랑스를 거쳐 한국의 서울에 잠깐 들른 것뿐이란다.

그리고 이렇게 입을 모은다.

"여행은 우리에게 두려움 대신 자유를 주었어요."

난 이제 알았어. 내가 달려온 길이 가정의 행복이 아닌 허세와 욕망이었다는 것을. 누구를 만나고, 어디에 살고, 무엇을 입고, 타고 어떤 일을 하느냐를 신경 썼던 시절은 내 생에 가장 불행한 시절이었다는 것도 알았어. 하지만 당신의 육체적인 고통을 보고서야 알게 되었지. 정말 미안해!





지중해가 보이는 터키 안탈리아 해변.

부탁 하나 하고 싶어. 프로방스 론강에서 속삭이던 우리의 추억들이 항암치료의 아픔을 이기게 했다고 그랬잖아. 그런 것처럼 지금 경제적으로 조금 부족하고 힘이 부치면 그날들을 떠올려주면 좋겠어. 론강에서 야영하던 때 당신이 그랬잖아, 그 어느 특급 호텔에서 자는 것보다 더 행복하고 좋았다고. 앞날의 행복여행을 위해서 슬픈 날의 추억을 잊지 말자.

아들아. 수능시험을 비롯해 네게 관심을 주지 못한 것에 미안한 마음이 가득하다. 학교를 그만두고 아빠, 엄마와 함께한 긴 여행이 네 삶에 상처가 되어 돌이킬 수 없는 후회가 되지 않을까 마음 졸이는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단다. 그것은 네가 세상을 향해 자신 있게 나아갈 때 비로소 떨어져 나갈 듯하다. 걸어 온 길이 다르다고, 빛깔이 다르다고, 너를 멀리하거나 소리 치는 누군가에게 귀를 기울이면 네 삶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해 두렴. 그리고 먼 하늘과 산 그리고 바다라도 바라보고 이런 말을 할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난 그때 엄마와 아빠와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고, 그것은 학교에서, 학원에서 보낸 그 어떤 시간보다 중요한 시간이었다고."

어렵게 자기 색깔을 찾은 만큼 멋진 작가로 성장해나가길 바래.

열정을 가지고 몰입할 때가 가장 매력적이라는 것 당신을 보면서 새삼 느껴. 나이 들어 더욱더 섹시한 당신. 항상 든든한 후원자 아내와 아들이 있다는 것 잊지 말고 행복하게 살자고요. 파이팅!!





네팔 포카라 페와 호수에서의 즐거운 뱃놀이.

그리고 질풍노도의 방황을 끝내고 평상심을 되찾은 아들아! 가끔 마음을 다독이는 어른스러운 말로 엄마를 위로할 때 표현은 안 했지만 항상 고마워하고 있단다 자연과 동물을 사랑할 줄 아는 따뜻한 아들,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해라. 사랑한다.

나를 철들게 했던 여행, 엄마의 힘든 투병, 진로에 대한 고민…. 내가 관심분야를 전공으로 선택하게 되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던 일…. 그러나 헛된 시간은 아니었어요. 지난 1년 동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을 보는 눈이 정말 달라져 있었어요.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것들을 많이 배웠습니다. 만약 학교에서 공부했더라면 결과가 지금보다 안 좋았을 거예요. 세상 구경 일찍 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엄마는 일 너무 많이 하지 말고, 아빠는 담배 좀 끊으세요.

사랑합니다.





이탈리아 트렌토에서 45㎞, 밀라노에서 124㎞ 떨어진 거대한 호수이다. 산 언덕 군데군데는 오솔길로 연결되어있고 길가로는 이국적인 올리브나무가 즐비하다. 언덕 위에 자리한 숙소로 햇살이 가득 들어왔다.

작은 집 다락방에서 아이와 대화를 하고 아내가 달그락거리며 커피를 내오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우리는 올리브나무가 가득한 오솔길을 걸으며 많은 이야기를 했다. 재잘대듯 바람에 흔들리는 올리브 이파리들 아래를 걸으며 우리도 끝없이 속삭였다.





지중해로 흐르는 강을 바라보며 모닥불을 피우고 고기를 구워 먹었다. 커피도 장작불에 데웠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처럼 깔깔거렸다. 타닥타닥…, 마른 나무 타는 냄새가 퍼지는 강가에서 우리는 긴 이야기를 했다. 지중해의 포근한 바람과, 하늘 가득 별이 반짝이는 프로방스의 까만 밤을 잊을 수 없다.

이곳의 추억으로 고통을 잊었다. 아플 때면 론 강의 추억들만이 맴돌았다. 지금도 론 강은 지중해로 흐르고, 내 마음엔 추억이 흐른다.





내가 우겨서 프라하에 갔다. 날이 너무 추웠다. 엄마가 너무 추워하니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엄마도 프라하의 풍경을 보고 기뻐했다.

프라하 시내를 흐르는 블타바강 다리를 걷는 동안 작은 돈 동전 몇 잎에 큰 웃음을 지어주면서 연주하는 악사들을 행복하게 바라봤다.

사람들은 친절했고 배려심이 있어 보였다. 오래된 건물들을 따라 걸을 때는 영화의 장면 속에 우리 가족이 서있는 느낌도 받았다.

< 조진호 기자 ftw@kyunghyang.com >

ⓒ 경향신문 & 경향닷컴(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