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전쟁..아직도 귀환 못한 영혼이 있습니다

2010. 7. 9.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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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②

일제에 강제 동원된 큰아버지는젊은 아내와 어린 딸을 두고미군 폭격에 맞아 숨졌습니다.한국전쟁에서 미군에 속한 아버지는처절한 공포를 안은 채 돌아왔고비명의 밤을 보내곤 했습니다.

지난해 칠월 큰아버지의 유해가 65년 만에 일본에서 돌아왔습니다. 유해라고 했지만 사실은 한 주먹의 뼛가루와 몇 올의 머리칼이었습니다. 큰아버지(도해봉, 1919년생)는 1942년 봄 24살의 젊은 나이에 태평양전쟁에 강제동원되어 전쟁터로 끌려갔습니다. 큰아버지가 끌려간 곳은 남태평양 팔라우제도 앙가우르섬이었습니다. 그 섬의 노천광산 등에서 이 년간 강제노역에 시달리다가 1944년 3월 미군의 팔라우제도 1차 공습이 있던 날 비행기 폭격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청원군 북일면 오동리 고향집에는 이십대 초반의 젊은 아내와 어린 딸 하나가 있었습니다. 서운이란 이름의 딸은 제대로 먹지 못해 어린 나이에 죽었고, 남편 죽고 자식마저 잃은 젊은 아내는 스물몇 살에 청상과부가 되었습니다. 큰아들을 잃고 상심한 할아버지는 술을 드시고 죽어버리겠다고 기차 철로 위에 누우실 때가 있었고 가세는 더 기울었습니다.

한일회담을 한다는 이야기가 들리자 큰아버지의 유해라도 찾게 해달라고 관청을 드나들던 아버지는 자주 문전박대를 당했습니다. 몇 년 전에도 일제하 강제동원 피해자 진상규명위원회가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신고를 했습니다. 정부에서는 강제 동원되어 희생되었다는 근거 자료를 가족들이 제출해서 증명하라고 요구했습니다. 60년 이상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남북 간의 전쟁이 있었고, 고향을 떠나왔으며, 도시빈민이 되어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연명하는 동안 자료라는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징병령, 총동원령 같은 명령을 내린 이들은 있었지만, 면서기의 명령에도 허리를 조아려야 했던 사람들은 명령을 내린 이의 이름도 기억할 수 없었고, 죽음을 증언할 수 있는 이들도 세상을 뜬 지 오래였습니다.

국가는 무너지고, 나라 잃은 국민은 전쟁터로 끌려가 죽었는데 국가는 죽은 국민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으려고 하는 세월을 살았습니다. 큰아버지 유골은 일본 도쿄 시내 유텐지라는 사찰에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일제의 남양척식주식회사에서 앙가우르섬으로 끌고 갔다가 죽은 조선인들의 출신지역과 나이와 신분, 사망일자와 사망지역이 정리된 피징용사망자 연명부 문서가 있었습니다.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채 방치된 조선인 유골이 일본 곳곳에 널려 있어도 이 나라는 조상의 유골을 찾아오는 일에 적극적이지 않습니다.

아직도 남태평양 짙푸른 파도 근처를 떠돌거나폐광 뒷산이나 바닷가에 버려진 채돌아오지 못하는 수천 수만의 영혼을내 땅으로 데려오려고 애쓰지 않는 이 조국을아직도 의무만을 강요할 뿐 책임에 대해 몰염치한이 나라를 언제까지 조국이라고 불러야 하는지조국불인정 소송이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졸시 <환국> 중에서

아버지가 큰아버지의 유골함을 안고 오던 날 억수 같은 장대비가 쏟아졌습니다. 저게 통곡의 눈물이 아니라면 저렇게 쏟아질 리가 없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셨습니다. 큰아버지보다 아홉 살 아래인 아버지는 칠남매의 차남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아버지는 청원군 북일면 주중리의 강습소 유리창 너머로 학생들이 공부하는 것을 들여다보며 도막 연필을 주워 혼자서 한글을 익히셨습니다. 그러다가 강습소의 이철원 선생님이란 분의 권고로 주중리 강습소와 개량서당, 청주 대성강습소 등을 옮겨 다니며 글을 배웠으나 때론 농사철이라서, 때론 왜놈들 교육 배운다는 이유로 큰아버지가 책보를 빼앗아 못 가게 하는 바람에 중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학교를 못 가는 대신 큰아버지가 만들어준 지게를 지고 팔결다리 아래 제방 쌓는 곳에서 하루 삼십오 전에서 사십 전씩을 받는 품팔이꾼이 되어 어린 시절부터 막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일을 하다가 남들이 점심을 먹을 때면 남이 보이지 않는 곳에 가 앉아 있다 점심시간이 끝나면 다시 일을 시작하곤 했으며, 저녁이면 짚신을 꼭 한 켤레씩 삼아야 그 이튿날 신고 나가 일할 수 있었다 합니다. 메밀가루를 쑥잎에 무쳐 먹고 아카시아 꽃을 먹고 풀떼기를 쑤어 먹어가면서 일제가 물러갈 때까지 부황난 얼굴로 소년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일제가 물러가고 난 뒤에는 좌우익의 혼란 속에서 정당이 무엇인지 사상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로 마을 청년 전체가 보도연맹 사건으로 죽을 뻔했다가, 인민군 의용군으로 끌려 다니다가, 탈출하여 방위병 감찰이 되었다가, 마침내는 큰아버지를 죽게 했던 미군 군복을 입고 동족상잔의 전쟁터를 누비는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전쟁 기간 동안 수많은 마을 사람들과 친척 형제들이 찢기고 갈리고, 후퇴하던 국군 총에 맞아 죽고, 들이닥친 인민군들에게 악질 반동이라고 몰려 죽고, 살아남기 위해 부상자들을 나르고 일을 거들었다가 밀고 올라오는 국군들에게 인민군 협조자라고 고문당해 죽고, 의용군을 따라갔다가 죽고, 후퇴하던 국군들이 집 근처에 남겨두고 간 로켓포 불발탄을 주워 두드리다 폭파되는 바람에 사촌 한 분과 조카, 조카딸이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는 일도 있었습니다. 몸을 피하였다가 돌아와 보니 집에서 기르던 개가 군인의 시체를 뜯어먹고 있더라는 처절한 전쟁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 전쟁이었습니다.

삼월이었지, 네 에밀 두고 입대한 것이.부산 보충대서 보초를 서며 소금바람 마시다그렇지, 그게 카투사 1기였단다.미 제25사단 14연대 2대대 E중대혹 몰라 남양군도나 오끼나와를 거쳐네 큰아버지와도 싸운 그 군대였는지 몰라미군부대 배속된 벙어리 한국군이 돼참호나 파고 포탄이나 나르고그들은 먼발치에 서서 껌을 씹으며포탄을 날리고 있었다.씨레이션 먹는 법이나 사과 씹는 법을 배우며참말이지 한없이 부끄러웠니라.망초 대궁만 끝없이 널린 춘천 시가를 지나며중동부전선 아마 백마고지 언저리쯤포탄을 날리는 곳 말고 포탄이 떨어지는 곳에 서서산병호를 파며야전삽 끝에 찍혀 나오는 백골을 뽑아내며애빈 구체적인 적에 대해 생각했지.(......)뒤숭숭한 소문은 임진강 따라 흘러내리고애빈 밤마다 척후조장이 되어칼빈 M2를 들고 적을 찾아 다녔다.그 깜깜한 참나무숲 어디선가안전장치를 풀도록 명령을 내리고 있는크고 확실한 적을 찾아 다녔다.- <삼대 4. 산병호> 중에서

제대 후 아버지는 자다 말고 비명에 가까운 큰소리를 지르는 일이 많았습니다. 같이 자던 식구들이 놀라서 깨는 밤이 많았습니다. 스무 살이 넘어서까지 나는 그 소리를 듣고 살았습니다. 잠을 자다가도 만나는 두려움과 공포는 어둠 속에서 갑자기 포탄이 터지고 총소리가 쏟아지고 동료들이 죽어나가던 백마고지, 그 처절한 살육이 끝없이 반복되던 전쟁의 기억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낮에 다시 살기 위해 참호를 파는 동안 동료들의 해골이 야전삽 끝에 찍혀 나오던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오긴 했으나 어둠 속에 잠기기만 하면 되살아나는 공포의 기억에서 비롯된 비명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작은아버지 지병을 치료하려고 전답을 모두 헐값으로 팔아버려 농사지을 땅 한 뙈기 없는 걸 보고 살길을 찾아 청주시 운천동 산직말로 나오셨습니다. 저는 전쟁이 끝난 이듬해 산직말의 이 오막살이집에서 태어났습니다. 방으로 들어가려면 허리를 잔뜩 굽히고 들어가야 하는 작은 초가집이었습니다. 이 동네는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인 직지심체요절을 찍은 흥덕사 터가 있는 동네입니다. 동네사람들이 논에서 불상을 줍기도 했고 아주머니들이 모여서 빨래를 하던 널따란 돌이 신라시대의 비석인 것이 확인되기도 했던 청주시 변두리 동네입니다.

도종환 시인, 그림 이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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