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말 좀 짝짝이로 신으면 어떤가

2008. 7. 30.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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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정진영 기자]

백 가지 길을 열어 놓고 산 사람, 훈데르트바써

ⓒ 현암사

한 번쯤 인터뷰를 빙자해 데이트 신청을 하고픈 어른들이 있다. 근사한 인생을 살다간 예술가는 작품의 호불호를 떠나 만나보고 싶은데, 이 책의 주인공 <훈데르트바써>는 그가 지은 '창문권'이 보장된 집이나 뉴질랜드 원시림 한가운데서 만나고 싶은 사람이다. 1928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화가, 건축가, 환경주의자, 평화주의자 등 수식어 여럿을 호위병으로 거느리고 살았던 훈데르트바써. 그는 2000년 어느 날, 뉴질랜드에서 유럽으로 돌아오는 배 갑판에서 죽는 날까지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움을 추구했고, 그러면서도 자기만의 것을 포기하지 않았던 예술가다.

2차 대전 당시 파괴된 도시, 무너진 건물 잔해 사이로 피어오르던 꽃에 반하고, 그림으로 그려두면 꽃이 지닌 찬란한 빛을 사라지지 않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 그는 가난한 집안 형편을 일으킬 '제대로'된 직업을 구하지 않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홀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훈데르트바써에게는 자기만의 머리가 있었다. 그는 화가가 되려고 했고, 어머니는 그것이 제대로 된 직업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화가가 되었다. … 자신을 믿고 자신의 생각을 실현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그는 그런 생각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었고, 그렇게 해보도록 권하고 싶었다. 하지만 대개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 훈데르트바써는 정신이 자유로웠고, 거꾸로 생각해보고 도전하는 사람이었다. -13쪽

자연에는 자로 그은 듯한 직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늘 다른 양말을 신었다는 훈데르트바써

ⓒ 현암사

책은 훈데르트바써의 인생과 생각을 소개하지만, 작은 네모 상자에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이 자주 등장한다. 21쪽에는 자기 이름을 두 장의 종이에 적어보라는 미션이 나온다. 이름을 적은 종이를 겹쳐서 빛에 비춰보면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데, 늘 쓰는 자기 이름을 적어도 정확히 똑같은 글자는 없기 때문이다.

글씨를 쓸 때마다 그 글자는 새롭고 유일무이하다는 메시지를 직접 확인하는 순간, 훈데르트바써가 일생을 관통하며 주장한 '모든 존재는 유일무이한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라는 것에 얌전히 수긍하게 된다. 우리는 모두 다르고, 특별하다! 그러므로 자기만의 삶을 살고자 노력해야 한다.

훈데르트바써는 직선을 좋아하지 않은 것만큼 나선에 매료되었다. 그의 그림에는 언제나 나선이 나타난다. 그는 평생 나선을 그렸다. 나선은 그에게 삶과 자연의 상징이었다. - 23쪽

그의 그림은 눈에 띄지 않고 천천히 자라는 '식물적 회화법'으로 그려졌다. "화가가 자신이 그리는 것에 놀라워하지 않으면 그것은 좋은 그림이 아니다. 나는 내 그림에 놀라고 싶다. 끊임없이 나의 그림을 발견하고 싶다."

"화가라는 것은 뭔가 엄청난 것이다. 그림은 우리에게서 아주아주 멀리 떨어진, 탐구되지 않은 지역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준다." - 35쪽 그의 그림이 독특한 암다채 색감으로 비슷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각각의 그림이 자기만의 느낌을 잃지 않는 이유일 듯하다.

그는 인간에게는 세 가지 피부가 있다고 한다. 첫 번째는 태어나면서 받은 피부. 두 번째는 옷. 마지막 피부는 집과 건물이다. 첫 번째는 선택할 수 없지만, 나머지 둘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피부다. 그는 사람들이 튀어 보일까봐 불안해서 모두 똑같은 모양에 그럭저럭 걸치는 옷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특별한 것, 비범한 것, 유일무이한 것을 소중하게 여겼던 만큼 늘 짝이 다른 양말을 신고 다녔다. 자기가 디자인한 옷을 직접 만들거나 맞춰 입고, 본인이 만든 신발을 신고 다니면서 자기만의 개성을 표현한 이 귀여운 아저씨가 지은 집들에는 '창문권'이 보장된다.

'창문권'이 보장되는 훈데르트바써의 건축물

ⓒ 현암사

모든 가정이 자기 집을 지을 수는 없지만, 남이 설계한 집에 들어가 사는 세입자들도 '한 사람이 창에서 팔을 뻗쳐 닿는 범위는 개인의 공간'이므로 자신이 좋은 대로 만들어도 된다는 게 '창문권'이다. 세입자는 그 공간에 타일을 붙일 수도 있고, 꽃으로 꾸밀 수도 있다. '식물 세입자'와 이웃하며 사는 기쁨

잃어버린 초원은 옥상정원으로 옮겨진 것 뿐!

ⓒ 현암사

환경을 생각해 부식토 화장실을 가는 곳마다 설치했던 건축가는 옥상정원으로 사람과 식물, 두 생명이 사이좋게 지낼 수 있게 했다. 나무 세입자를 위한 공간을 배려한 설계는 발상의 자유로움과 귀여움이 보는 이를 미소 짓게 한다.

'식물 세입자'가 창문권이 보장된 이웃 사이에 산다.

ⓒ 현암사

그림, 건축, 우표와 깃발 디자인, 부식토 화장실, 옷과 신발 제작까지 다양한 영역에 관심을 표현하며 살았던 훈데르트바써는 독특한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라도 틈틈이 세계 구석구석을 여행했다. 서로 다른 사람들과 풍경은 영감의 원천이었다.

뉴질랜드의 숲과 태평양 바다, 유럽의 오래된 골목길과 아시아의 신흥 대도시에서 만난 피부색 다른 친구들은 그의 작품 곳곳에 녹아들었을 테지만,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그저 비온 날의 진해진 세상을 보는 듯한 그림들과 가우디 만큼이나 형태가 제멋대로인 건축물들이다.

옷에 관심이 많은 필자에게 궁금한 건 그의 아틀리에가 아니라 옷장이다. 손수 만들거나 주문제작 해서 입었다는 세로줄 무늬의 수트와 겨울용 신발을 보고 직접 만져보고 싶기 때문이다.

이 책은 부모와 아이, 선생과 학생이 같이 보기에 좋은 책이다. 활달한 소년소녀를 겨냥한 듯한 명랑한 편집 덕에 초등학교 고학년들이 읽기에도 지루하지 않다. 진로를 고민하는 중고등학생, 취업 보다 뭔가 멋진 기획을 준비 중인 대학생이라면 한 번쯤 진지하게 붙잡고 읽어볼 만하다.

독자의 나이가 서른 넷이라면? 남은 인생 '제대로' 자기 멋대로 살아보고 싶은 충동 때문에 세계지도를 펴고 여기저기 쏘다니다 통근버스를 놓칠지도 모르겠다.

단숨에 다 읽은 얇은 92페이지짜리 책 한 권을 두고 '누구에게 선물하면 좋을까?' 즐거운 고민을 하게 만드는 <훈데르트바써>는 바라건대 우리나라 예술대학 입시 필독서로 지정되면 좋겠다.

직업으로서 예술을 선택한 사람들조차 획일적인 생각과 말에 찌들기 쉬운 나라에서 예술을 삶의 방식으로 선택한 용감한 이들 앞에 가만히 놓아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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