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씨앗 뿌린 독도문제의 진실

2010. 8. 13.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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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동북아질서 구축과정서 발단

1947년 기점으로 '공세본격화'

미 국립문서고 10여년간 뒤져

미국의 '결정적 구실' 밝혀내

〈독도 1947〉정병준 지음/돌베개·5만원

1951년 8월10일 양유찬 당시 주미 한국대사에게 대일 평화조약(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관한 미국 정부 최종입장이 담긴 딘 러스크 미 국무부 극동담당차관보 명의의 통보문('러스크 서한')이 전달됐다.

"독도, 다른 이름으로는 다케시마 혹은 리앙쿠르암으로 불리는 그 섬에 대한 우리 정보에 따르면, 통상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이 바윗덩어리는 한국의 일부로 취급된 적이 없으며, 1905년 이래 일본 시마네현 오키도사(隱岐島司) 관할하에 놓여져 있었다. 한국은 이전에 이 섬에 대해 (권리를) 주장한 적이 없다."

약 한 달 뒤인 그해 9월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되고 다음해 4월부터 발효됐다. 처음에 대마도(쓰시마) 반환을 요구하다 미국의 거부에 부닥치자 다시 독도와 파랑도(이어도)의 배속을 요구했던 한국의 바람은 러스크 서한이 말해주듯 물거품이 됐다. 일본은 그걸 '다케시마는 일본땅'에 대한 국제적 보증으로 읽었다. 오늘날의'독도문제'가 거기서 시작됐다. 그 4개월 전 존 포스터 덜레스 미 대통령 대일강화조약담당 특사는 한국이 대일 교전국 및 연합국의 일원으로 조약 서명국 지위를 부여받아야 한다는 양유찬 대사의 요구를 거절했다.

러스크 서한 이후 일본의 독도 공세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미국은 조약에서 제주도와 거문도, 울릉도가 일본 영토에서 배제된다는 내용 외에 독도에 대한 어떤 영토규정도 빼버린 채 애매한 중립적 입장을 강조하면서 일본과 한국이 양자회담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라고 넘겨버렸다. 하지만 그때 갓 태어나 지독한 전화를 겪고 있던 분단약소국 한국에 일본과의 양자협의 해결방식은 일본 뜻대로 하라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절대 열세 속에 게도 구럭도 놓친 한국은 해양주권선언(평화선)을 통해 손실을 만회하려 했으나, 미국의 일방적 후원 속에 모든 준비를 갖추고 상대국 전란을 천우신조의 기회로 삼은 일본은 이른바 우익들의 저열한 '망언' 잔치와 함께 한국을 야멸차게 능멸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2차대전의 종결을 의미하는 단순한 전후처리 절차가 아니었다. 소련과 중국도 배제당한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전쟁 당사국들끼리의 전면강화가 아니라 사실상 미국-일본 간 단독강화였으며, 반공·반소 냉전체제를 본격적으로 짜기 시작한 미국의 친미적이고 보수적인 일본 재건 프로그램이었다. 한반도는 독도를 상실할 위기에 몰린 정도가 아니라, 오늘에까지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있는 장기간의 '샌프란시스코 체제', 미국이 주도한 동아시아 질서 재편의 가장 뼈아픈 희생물이 됐다.

<한국전쟁-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 등의 인상적인 연구성과들을 내놓은 뛰어난 한국현대사 연구자 정병준 이화여대 부교수의 <독도 1947>은 독도문제를 "(한-일 간의) 역사적 영유권 문제라기보다는 샌프란시스코 평화회담이 구축해놓은 전후체제, 즉 동북아시아의 기본질서가 된 샌프란시스코체제의 형성과정에서 파생된" 국제정치적 문제로 접근하는, 참신한 시각이 돋보이는 역작이다. 정 교수가 보기에 독도문제는 한-일 간의 문제라기보다는 한-미-일 간의 문제이며, 그중에서도 미국이 판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개입자로 등장하는 문제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독도문제가 바로 미국의 문제일 수 있다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게 될지 모른다.

미국이 1947년 대일 강화조약 초안 만들기 작업을 시작하면서부터 일본 편을 든 건 아니다. 특히 독도 귀속문제에 대해 미국은 1949년 말까지 '독도는 한국땅'이란 태도를 명시적으로 견지했다. 한국도 국가 수립 이전인 1947년부터 독도 등 일본에 빼앗겼던 땅과 권리 찾기 작업을 본격화했다. 일본 역시 그해부터 임박한 강화조약 준비태세에 돌입하면서 1905년 러일전쟁 시기에 한국땅인 줄 뻔히 알면서 책략을 통해 시마네현에 독도를 편입시킨 과거 전략을 전후에도 복제해 '다케시마'(독도)가 원래 일본 고유영토임을 선전하는 허구를 체계적으로 날조해내기 시작한다. 1947년 6월에 일본 외무성이 펴낸 팸플릿 시리즈 <일본의 부속소도(小島)> 제4권에 독도가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딘 러스크 차관보 서한에 응축된, 독도에 대한 심각한 대일 편향, 그리고 1949~1951년 주일 미국 정치고문이자 연합군최고사령부 외교국장을 지내면서 '독도는 한국땅'이란 미국 정부의 기존 시각을 '다케시마는 일본땅'으로 완전히 돌려놓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 윌리엄 시볼드 등 주일 미국 외교관들의 친일행각이 바로 그 팸플릿 시리즈의 계획적인 날조를 토양삼아 번성했다. 이처럼 한, 미, 일에서 전후 독도문제의 분기점이 된 움직임들이 본격화한 해가 1947년이고, 그래서 책 제목도 그렇게 붙였다.

1947년이면,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고 바야흐로 미-소 냉전체제가 굴러가기 시작하는 해이기도 하다. 그리고 2년 뒤 중국이 공산화하고 또 그 1년 뒤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미국은 그때까지의 징벌적 일본재건 구상을 비징벌적이고 관대한 구상 쪽으로 급선회(이른바 '역코스')하면서 냉전 교두보로서의 일본의 전략적 가치를 재평가하고 그 변방인 한국의 독도문제 제기를 오히려 걸림돌로 여기면서 신속한 대일강화, 이를 위한 신속한 독도문제 해결을 꾀했고, 그것은 사실상 일본 손들어주기로 귀착됐다. 하지만 덜레스는 부하들에게 중립 모양새를 갖추도록 요구했다. 그것은 식민지배라는 강자의 횡포에 희생당한 약소국 한국의 비통한 과거에 대한 동정 때문이 아니라 미국 자신이 지탱해주고 있는, 서방적 가치의 우월성을 상징하는 냉전 최일선의 쇼윈도로서의 한국의 현재적 가치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독도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강화조약에 서명한 많은 국가들 중의 하나일 뿐이며, 일본이나 한국의 영토분쟁에 개입하거나 안정시킬 책임을 져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내세웠다. 하지만 그건 제스처였을 뿐이다. 예컨대 독도를 미군기들의 폭격연습장으로 지정하도록 미군을 끌어들인 다음 다시 그 지정을 해제하는 주재자 구실을 맡음으로써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사실상 자국이 갖고 있음을 기정사실화하려던 일본의 책략과 술수를 미국은 알면서도 수용했다.

"이 책이 다룬 자료, 구성, 논리, 접근방법, 그리고 사실들은 기성의 것과는 다른 새로운 경지와 단계를 열어줄 것이다. 성실한 독자들에게는 신천지, 그 이상의 가능성을 보여줄 것이다." 지은이가 이토록 자신하는 데는 접근방식의 차별성 외에 또 한가지 핵심적 요소가 거들고 있다. 1천쪽에 이르는 방대한 이 책의 치밀한 논증을 떠받쳐주는 게 주로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찾아낸 1차 사료들이라는 점이다. 1970년대부터 기밀해제되기 시작한 미국의 한국관련 자료들을 정병준 교수는 직접 현장에서 뒤졌다. 2005년 그가 존 포스터 덜레스 문서철에서 찾아낸, 독도가 한국령으로 선명하게 표시돼 있는 영국 외무부 작성 지도도 거기서 만났다. 그의 활약이 더욱 기대된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 지은이와 함께 / 정병준 교수 인터뷰

"독도, 의문의 여지 없는 한국영토"

<독도 1947>을 읽어 보면, "동북아시아 지역질서와 한-미-일 관계에 대한 새로운 시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정병준 교수는 자신했다.

기밀해제 문서를 보고 나서야 독도 공부를 시작했다는 정 교수는, 미국 문서고의 원자료들은 그전에 많이 보던 송남헌의 <해방 3년사>나 김남식의 <남로당연구 자료집>, 또는 군지와 같은 자료들과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했다. 왜 하필 독도인가? "좀 모욕당한 기분이 들었다. 독도문제라면 굉장히 중요시하는 국가적 의제인데, 연구 수준은 거의 경악할 정도였다. 한국 연구자들 중에 1950년대 초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관련 미국 문서고 보관 자료들을 찾아본 이도 거의 없었다."

2001년 3월에 처음 기밀해제 문서를 보러 미국에 갔고 10개월쯤 파다 돌아왔다. 그 뒤 모두 5번 정도 찾아가 1개월 정도씩 머무르며 문서고를 뒤졌다. "1950년대 초반 자료들을 뒤지는데 뭔가 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밀로 분류돼 해제되지 않은 것도 아직 많고, 미국은 일본에 대해선 굉장히 호의적인데 한국 쪽에겐 비우호적이었다. 왜 그럴까? 그게 궁금해서 2005년에 또 미국에 갔다." 그런 식으로 미국 문서고에 직접 가서 본격적으로 원자료를 찾아내는 작업에 매달린 건 한국인 연구자로선 자신이 아마 처음일 것이라고 했다. 그전에 신복룡 교수 등 미국 기밀문서 연구 1세대라고 할 수 있는 선구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그가 잊고 있는 건 아니다.

특히 중국 고대사 전공자로 1977년에 미국에 건너가서 미국 문서고의 기밀해제 자료들에서 보석 캐듯 하나씩 특종을 터뜨리며 국내 연구진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고 충격에 빠뜨렸던" 재미동포 연구자 방선주(77)씨를 경모하는 마음이 남다르다. 자신의 연구 성과가 다 "방선주 선생님 덕택" 이란다. "미국 문서고에 아무리 많은 자료들이 쌓여 있어도 그 구조와 관련 개인정보나 조직정보를 알아야 필요한 자료들을 찾아낼 수 있다. 그것 모르면 몇년을 거기서 죽치고 있어봤자 아무 성과도 얻어낼 수 없다. 방 선생님은 한국인으로선 처음으로 그런 기밀해제 문서를 수집하고 공개한 분이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간행된 한국현대사 관련 미국 자료들의 80% 이상이 방 박사님 손을 거친 것이다. 특히 북한 노획문서는 거의 100% 방 박사님 노고 덕이다. 한국현대사 미국자료 연구의 가이드요 현역 연구자다." 독도문제를 한-일 관계가 아니라 한-미-일 관계로 파악한 이종원 일본 릿쿄대 교수의 문제의식에서도 그가 얻은 바가 많다.

1947년과 49년에 발표된 미국 지도, 51년에 나온 영국 지도, 그리고 같은 해 나온 일본 외무성 지도 중에 독도가 한국령으로 표기돼 있지 않은 건 하나도 없었다. 예전에 한국 연구자들이 이용한 미국 기밀해제 자료들 중 다수는 일본 연구자가 일본에 유리한 것만 선별해 놓은 것들이란다. 게다가 대일 강화조약 초안을 미국은 이례적으로 일본 쪽에 몇차례나 미리 보여주고 코멘트까지 해줬으며 영국 쪽도 그렇게 해줬으나, 한국 쪽은 그야말로 찬밥신세였단다. 그 고난의 전쟁시기에 과거사 인정도 배상도 할 생각이 없었던 일본이 독도를 자기들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약삭빠르게 처신한 데 대해 한국사람들이 감정적으로 대응한 건 어쩌면 당연한 것 아니겠느냐고 했다. 그리고 "독도가 한국 영토라는 건 의문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라고 그는 말했다.

글 한승동 선임기자, 사진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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