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선한 이들이 고통을 받는가?

2016. 6. 23.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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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박승찬의 다시 보는 중세] 4. 보에티우스의 ‘철학의 위안’

로마 최후 철학자가 쓴 ‘옥중 철학’
신의 섭리-자유의지 관계 규정해

“악한 것 적절히 쓰는 선의 결과
악한 것들도 선한 것이 되는 것”

신의 섭리·자유의지·‘인격’ 정의
400년 뒤 스콜라철학 토론 주제로

철학의 여신과 대화를 나누는 보에티우스, 마티아 프레티, 17세기, 개인소장

‘왜 악한 이들이 승승장구하고 선한 이들은 오히려 고통을 받는가?’

무능하고 부패한 ‘갑’들이 권력과 재력을 배경 삼아 승승장구할 때, ‘을’들의 입에서는 이런 탄식이 흘러 나온다. 그렇지만 누구보다 이런 의문이 뼛속까지 파고드는 사람은 억울하게 모함을 당해 감옥에 갇힌 이들일 것이다. 2016년 1월 타계한 고 신영복 교수도 이런 질문을 수백 번 던지지 않았을까. 그는 자신이 ‘대학’이라 부른 감옥에서 20년 20일 동안 복역하며 깊은 성찰이 담긴 편지를 남겼다. 그것을 모아 출간한 책이 바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다. 이 책은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켜,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깊은 감동을 남기고 이 시대의 고전이 되었다. 나도 이 책을 통해 진정한 성찰의 중요성을 배웠다. 그런데 ‘감옥으로부터 사색’이라는 표현을 들으면 그 원조격인 고전이 함께 떠오른다. 로마 최후의 철학자라고 불리는 보에티우스(Anicius Manlius Torquatus Severinus Boethius, 480??524/5?)의 <철학의 위안>(De consolatione philosophiae)이 그것이다.

보에티우스의 정치적 성공과 몰락

보에티우스는 서로마 제국이 멸망(476년)한 직후, 아니치우스라는 로마의 최고 명문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에서 유학할 기회를 가졌고, 이를 통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모두 배울 수 있었다. 로마로 되돌아 온 보에티우스는 그리스어를 읽지 못하는 대중을 위해 두 철학자의 저작들을 라틴어로 번역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우선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서적 2권과 그 주석서를 라틴어로 옮겼다. 그리고 7개의 ‘자유학예’(artes liberales) 중 산술학, 기하학, 음악학, 천문학을 4학과(quadrivium)로 종합한 후 이에 관한 개론서를 저술했다.

뛰어난 성장배경에 박식함과 훌륭한 인품까지 두루 갖춘 보에티우스에 대한 소문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당시에 로마를 점령한 동고트족의 왕 테오데리쿠스(Theodericus, 454-526)도 이 소문을 듣고 그를 중용했다. 보에티우스는 ‘자유학예’에 관한 지식을 이용해서 동고트왕국 내의 화폐제도와 도량제도를 개혁했다. 그러자 테오데리쿠스는 그에게 더 중요한 과제들을 맡겼다. 보에티우스는 기술적인 문제부터 시작해서 재정 문제, 종교 간 충돌 문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임무를 완벽하게 해결했다. 그 결과 보에티우스는 직책이 점점 높아져, 40대 초반의 나이로 시종무장관(magister officiorum)이라는 가장 높은 관직에까지 올랐다.

보에티우스의 성공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그를 싫어하는 적대자의 수도 늘어났다. 동고트 왕국의 부패한 귀족들은 강직한 보에티우스를 몇 차례나 회유하려다 실패하자,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그를 제거하기로 결론 내렸다. 청렴한 보에티우스에 대한 몇 차례의 모함이 실패로 돌아간 끝에, 적대자들은 마침내 그의 아킬레스건을 찾아냈다.

당시 양분된 로마 제국 중 서로마 제국은 멸망했지만, 콘스탄티노플에 위치한 동로마 제국은 건재했다. 테오데리쿠스는 자신의 로마인 관료들이 같은 핏줄에 속하는 동로마 제국과 내통할까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원로원 의원 알비누스가 동로마 제국과 내통하여 반역을 꾀한 혐의로 고소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것이 모함이라는 사실을 안 보에티우스는 뛰어난 웅변술로 자신의 동료 알비누스를 변호했다. 그러자 적대자들은 이 변론을 이용하여 보에티우스를 반역의 주동자로 몰았다. 반란을 두려워하던 테오데리쿠스는 결국 보에티우스에게서 등을 돌렸다. 보에티우스는 최소한의 변론 권리도 박탈당한 채, 하루아침에 사형수가 되어 파비아의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보에티우스,유스투스 판 겐트, 우르비노, 마르케 국립미술관.

‘철학의 위안’에 나타난 인간 고통의 해명

보에티우스는 사형을 당하기 전 옥중에서 <철학의 위안>을 썼다. 이 책은 보에티우스 자신의 심경을 표현하는 시와 동일 주제에 대한 산문을 번갈아 싣고 있으며, 산문은 그가 철학의 여신과 대화하는 방식을 취한다. 철학의 여신은 우선 “과거의 운명에 대한 미련과 갈망 때문에 스스로를 소진”하고 있다고 보에티우스를 질책한다. 그러고 나서 재물이나 지위, 권세, 명예, 쾌락 등 인간에게 행복을 주는 것으로 보이는 후보들을 나열한 후, 이런 것들은 “약속하는 바의 좋은 것을 줄 수 없으며 (…) 행복으로 인도하지도 못하고, 그 자체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지도 못한다.”(<철학의 위안> III, 산문8)고 충고한다.

이어서 보에티우스는 자신이 겪은 고통을 신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의지 사이의 정확한 관계 규정을 통해 풀어 나간다. 그에 따르면, 전지전능한 신은 자신이 섭리하는 세계에서 어떤 것이라도 우연히 이루어지도록 놓아두는 일이 없다고 한다. “악한 것들을 적절하게 사용함으로써 선의 결과물을 만들어 낼 때, 악한 것들도 선한 것이 되는 것은 오직 신의 힘 안에서만 가능하다.”(<철학의 위안> IV, 산문6) 우리가 의심을 품게 되는 까닭은 우리 자신이 사물의 연관을 꿰뚫어볼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참된 행복을 찾는 인간의 노력은 악덕에 대한 투쟁, 덕에 대한 장려, 우리의 행위를 심판하는 신을 끊임없이 찾는 데에 있다고 결론 내린다.

“모든 것을 예지하는 신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관찰자로 머무르며, 항상 현재하는 그 시선의 영원성은 선인들에게는 상을, 악한 이들에게는 벌을 주면서 우리 행위의 미래의 성질과 함께 가게 된다. (…) 그러니 너희는 악덕을 거부하고 덕을 키워라. 올바른 희망으로 정신을 들어 올리고, 저 높은 곳으로 몸을 낮춰 간청을 드려라. (…) 너희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심판관의 눈앞에서 행동할 때 […] 너희에게는 올바름이라는 커다란 필연성이 부과되어 있느니라.”(<철학의 위안> V, 산문6)

고독한 죽음을 넘어서 기억되는 희망의 연대

선한 사람의 고통에 대한 보에티우스의 해결책이 현대인들이 보기에는 만족스럽지 못할 수 있다. 때로는 무죄한 이들의 학살을 방관한 신을 철저히 거부하는, 무신론적 실존 철학자들의 주장이 더 큰 공감을 얻기도 한다. 그렇지만 보에티우스는 ‘일부 몰지각한 종교인들’처럼 편안한 처지에서 고통받는 이들에게 ‘신의 섭리’ 운운한 것이 아니다. 그에 비하면 소크라테스는 비록 독배를 마시고 죽었지만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으니 ‘행복한’ 죽음을 맞이한 셈이다. 보에티우스에게는 아무도 없는 고독 속에서 또 다른 자신, 즉 철학의 여신과 대화하는 것만 허용되었다. 그는 눈앞에 다가온 죽음을 맞아, 자신이 겪는 불행에 대해 최소한 이해라도 하고 싶었을 따름이다.

보에티우스는 본래 원대하고 야심 찬 3단계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1단계는 고대 인문정신의 총체인 ‘자유학예’에 대한 철저한 탐구, 2단계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서 번역, 마지막 3단계는 이 두 철학자의 사상과 그리스도교 사상의 조화.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거대한 계획은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에 미완으로 끝나고 말았다.

당대에는 동고트족 귀족들이 보에티우스에게 승리한 것처럼 보였지만, 오늘날 그들을 영광스럽게 기억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오히려 그들의 악행을 배경 삼아 <철학의 위안>이 인류의 빛나는 고전이 되었다. <철학의 위안>은 악인들의 성공 앞에서 좌절하기 쉬운 선한 사람들에게 온전히 철학적인 답변을 제시한다. 또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적 희망에서 영감을 받았지만, 신앙에 의존하지 않고도 희망을 찾는 길을 열어 준다. 나아가 그의 사상에 나타나는 신의 섭리와 자유의지, 인격에 대한 정의(定義) 등의 문제는 약 400년 후 스콜라철학의 토론 주제를 매우 풍부하게 만들어 주기도 했다. 보에티우스는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천수를 누린 자들이라 해도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심판관’ 앞에 서야만 하고, 적어도 역사의 엄정한 심판은 피할 수 없다고 알려줌으로써, 오늘날 우리에게 작은 위안을 준다.

박승찬 가톨릭대 철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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