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이야기 그림책은 왜 일본서 출간되지 못했나

정원식 기자 2013. 8. 6.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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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여름 다큐멘터리 감독 권효씨는 제주도에 사는 친척을 통해 그림책 작가 권윤덕씨를 만났다. 권 작가는 당시 제주도에서 평화그림책 < 꽃할머니 > 의 스케치 작업을 하고 있었다. 권 감독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 문제를 다룬 그림책이라는 점에 흥미를 느껴 이때부터 2012년 초까지 권 작가의 작업과 주변 상황을 카메라에 담았다.

< 꽃할머니 > 출간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 그리고 싶은 것 > (권효 감독)이 오는 15일 전국 20여개 상영관에서 개봉한다. 92분 분량의 이 영화는 < 꽃할머니 > 의 일본어판 번역 작업을 둘러싼 사정을 기록함으로써 한·일 양국 간 평화와 연대의 길에 역사적·문화적 차이에서 비롯한 크고 작은 걸림돌이 깔려 있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2005년 일본 작가들의 제안으로 시작한 평화그림책 프로젝트는 한·중·일 세 나라에서 각 4명의 작가가 참여해 평화를 주제로 한 그림책을 만들고 이를 세 나라에서 모두 번역, 출판하는 기획이다. 프로젝트가 완결되면 세 나라에서 각기 4권씩 12권, 번역판을 합하면 모두 36권의 책이 나오도록 돼 있다. 한국에서는 권윤덕·이억배·김환영·정승각씨, 일본에서는 하마다 게이코·다시마 세이조·와카야마 시즈코·다바타 세이이치, 중국에서는 야오홍·저우샹·천롱·차우꼬오가 참여했다. 기획과 출판은 사계절(한국), 도신샤(일본), 이린출판사(중국)가 공동으로 맡았다.

일본 출판사가 수정을 요구한 < 꽃할머니 > 삽화. 작가 권윤덕씨는 일본 출판사의 요구를 받아들여 오른쪽 군인은 빵떡모자에 민간인 복장을 한 사람으로, 왼쪽 군인은 일제강점기 국민복을 입은 사람으로 바꿨다. | 사계절 제공

▲ '꽃할머니' 출간 과정 담은 다큐 '그리고 싶은 것' 곧 개봉한·중·일 공동 기획된 책이 3국 역사인식·문화 차이로번역·출간 정체된 사연 담아

< 꽃할머니 > 는 13세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2010년 사망한 심달연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이다. 스케치에만 2년이 걸린 이 작품은 2010년 출간됐다. 그러나 출간 후 3년이 지나도록 일본어 번역판은 출간되지 않고 있다. 일본 작가 하마다 게이코의 < 평화란 어떤 걸까 > 와 다시마 세이조의 < 내 목소리가 들리나요 > 의 한국어 번역판이 2011년과 2012년에 출간된 것과는 대조적이다.

일본어 번역판의 출간이 지연된 데는 일본의 정치적 지형과 일본 출판사의 내부 사정이 작용했다. 한국어판 출간을 위한 스케치 단계에서부터 문제가 불거졌다. 권 작가는 위안부 문제를 일본 정부가 주도한 행위로 보았지만 일본 출판사는 심달연 할머니의 개인사로 보려 했다. 2009년 가을 일본 출판사는 원래 내용대로라면 < 꽃할머니 > 를 출판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때는 당초 작가가 삽화에 그려넣었던 국화문양(일본 왕실 상징 문양)을 일본 측 요구를 반영해 벚꽃으로 그리는 대신 내용의 큰 틀을 유지하는 선에서 타협해 작업을 진행했다.

2010년 한국어판 출간 이후 다시 문제가 불거졌다. 이번에는 조선인 위안부 강제동원을 입증할 만한 공식기록이 없다는 점이 걸림돌이었다. 일본 측 감수를 맡은 일본 학자 요시미 요시야키는 일본 우익세력이 소송을 제기할 경우에 대비해 < 꽃할머니 > 에서 두 소녀를 강제연행하는 것으로 묘사된 군인을 민간인으로 바꿔야 한다고 조언했다. 작가는 군인 복장을 민간인 복장으로 바꾸는 대신 군복의 색깔만 유지하는 것으로 삽화를 수정했다. 일본 출판사는 이외에도 위안소를 지키는 일본군인이 서 있는 위치가 철망 안이냐, 밖이냐 하는 부분까지 신경쓸 정도로 예민했다.

김장성 평화그림책 기획편집위원은 "일본 출판사는 그동안 일본 우익세력의 협박을 걱정해왔는데 지난해 자민당 정권이 들어선 후 일본 사회가 우경화하면서 더더욱 자신이 없어진 것 같다"며 "그러나 출간 자체를 포기한 상황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영화에는 담기지 않았지만 < 꽃할머니 > 의 중국어판도 아직 출간되지 않았다. 중국어판의 경우 < 꽃할머니 > 삽화에 등장하는 지도에서 중국 국경이 제대로 표시되지 않았다는 점이 문제가 됐다. 중국 정부가 그림책 삽화에 들어간 지도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할 정도로 영토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세부적인 이견 조정 과정에서 장애가 생기긴 했지만, 한·중·일 3국 작가의 협력을 통해 평화를 모색한다는 평화그림책 프로젝트의 취지 자체가 꺾인 것은 아니다. 권 작가는 "서로 이견을 조정하며 신뢰를 쌓아가는 것이 평화그림책 프로젝트의 취지에 부합하는 일"이라면서 "우리가 분노해야 하는 대상은 일본 전체가 아니라 국가권력을 남용해 평화를 해치는 일부 세력이라는 점을 이해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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