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돈세탁, 조세회피..탐욕으로 병든 스위스 '내부 고발'
▲왜 검은 돈은 스위스로 몰리는가장 지글러 지음·양영란 옮김·홍기빈 해제 | 갈라파고스 | 264쪽 1만2800원
저자의 약력부터 살펴보자. 이 책을 쓴 장 지글러(79)는 스위스의 사회학자다. 스위스 제네바 대학과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서 강의했다. 1981년부터 1999년까지 스위스 연방의회의 사회민주당 소속 의원으로 활동했다. 2000년부터 2008년까지 유엔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으로 일했으며, 지금은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그는 냉철한 학자인 동시에 뜨거운 행동가로 평가받는다. 국내에는 <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 (2007)와 < 탐욕의 시대 > (2008)가 번역·출간돼 반향을 일으켰다. 부자들의 탐욕과 가난한 이들의 희생을 적나라할 만큼 사실적으로 전달하는 책들이다. 이런 책은 당연히 사실 확인에만 머물지 않는다. 읽는 이들의 분노와 슬픔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장 지글러는 1%의 관점에서 보자면 '위험하고 선동적인 저자'다.
계좌와 고객에 관한 비밀주의 원칙을 고수하는 스위스 은행의 역사는 150년이 넘었다.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건물에 입주한 비밀은행들은 '전 세계 검은 돈의 네트워크'이자 검은 돈의 요새다. 사진은 은행, 상점, 레스토랑이 밀집한 스위스 제네바 몽블랑 거리(Rue du Mont-blanc)의 1911년 풍경.
< 왜 검은 돈은 스위스로 몰리는가 > 도 그렇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저자는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이 책을 출판하고 나서 내 나라 지도자들로부터 극심한 증오를 한몸에 받았다. 의원 면책특권을 박탈당했고 스위스의 주요 언론으로부터 '조국의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나뿐 아니라 가족까지도 모욕을 당하고 죽여버리겠다는 위협을 받았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나는 눈사태처럼 밀려오는 줄소송에 시달렸다. 각기 다른 다섯 개 나라에서 아홉 건의 소송이 줄을 이었는데, 이는 모두 스위스의 은행들과 각국에 진출한 그들의 패거리가 주동이 되어 나를 상대로 한 소송들이었다. 나는 모든 소송에서 패소했다."
1990년 프랑스 파리에서 처음 출간된 책이다. 지금까지 28개 언어로 번역됐으니, 한국어판 번역 출간이 한참 늦었다고 해야겠다. 책의 머리에는 알베르 카뮈의 경구가 마치 깃발처럼 걸려 있다. "반드시 증언을 하겠다는 끈질김이 없다면, 이런 시기에 어느 누가 가증스러운 범죄의 끈질김에 대항하려 하겠는가?" 이 경구처럼 이 책은 "가증스럽고 끈질긴 범죄"에 대한 '끈질긴 보고서'로 읽힌다. 스위스는 어떤 곳인가. 저자도 말하듯이 그곳은 숨이 멎을 정도로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이 책이 집필되던 1989년에는 680만명의 주민이 살던 나라였다. 그러나 그곳에서 나고 자란 저자는 스위스가 오늘날 "세계적인 비리와 오염의 중심"에 놓였음을 주목한다.
책은 세 개의 장(章)으로 나뉜다. '전 세계 검은 돈의 네트워크'라는 제목의 첫 장은 마약으로 벌어들인 돈을 세탁하고 재투자하는 스위스 은행들의 실태를 낱낱이 고발한다. 저자는 이 검은 돈을 "헬베티아(라틴어로 스위스를 뜻하는 말) 대지를 촉촉하게 적셔주는 가장 큰 물줄기"라고 부른다. 저자는 독자의 선명한 이해를 위해 돈의 색깔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마약이나 무기 밀거래 등으로 범죄조직들이 벌어들인 "일종의 장물 내지 전리품"으로서의 '검은 돈'이 있다. 아울러 스위스 은행의 자산총액을 불려주는 또 다른 물줄기는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스칸디나비아 등지에서 활동하는 지도급 인사들이 자국 정부의 징세를 피하기 위해 도피시킨 자금, 또는 제3세계의 적지 않은 지도자들이 빼돌린 자금"이다. 저자는 이것을 "회색 돈"이라고 명명한다.
'피투성이 정원'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두번째 장은 바로 이 회색 돈에 대한 언급이다. 스위스가 어떻게 "독재자들의 보물섬"이 됐는지를 세세히 서술한다. 책 속에 주요하게 등장하는 사례는 필리핀의 마르코스와 이멜다, 아이티의 독재자 뒤발리에, 자이르의 독재자 조제프 데지레 모부투의 경우다. 하지만 저자는 책 속에 미처 언급하지 못한 엄청난 회색 돈이 "스위스 은행이라는 요새에 피신해 있다"고 강조한다.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등지의 지배계급들이 아끼는 재산들"은 "마약을 팔아 챙겨들인 검은 돈과 동일한 은행에 의해, 동일한 기법으로 세탁되고 재활용된다"는 것이다.
3장에서는 금융가들과 손잡은 정치가들의 입법 방해 행위, 범법을 묵인·방조하는 연방검사, 비판적 지식인을 공공의 적으로 몰아가는 스위스의 현실을 폭로하고 개탄한다.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던 스위스가 "탐욕으로 병든 나라가 됐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그래서 여든을 눈앞에 둔 그가 최종적으로 촉구하는 것은 "민주 시민들의 봉기"다. 그는 제네바에서 보내온 한국어판 서문에서도 전 세계 시민들의 민주적 봉기를 열렬히 주문한다.
책의 해제를 쓴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은 격문과도 같은 저자의 호소를 이렇게 받는다. "우리나라에서도 매주 줄줄이 터져 나오는 버진아일랜드, 쿡아일랜드의 '페이퍼컴퍼니' 주인들의 명단을 보면서 더 이상 돈 가진 이들의 오만한 불법행위를 '선진 금융기법' 따위로 용인해서는 안된다는 분노가 팽배하고 있다. 지글러의 한국어판 서문처럼, 이제 해법은 전 세계 시민들이 민주주의적 봉기를 일으키는 것이다. 무수한 이들이 기아와 실업과 빈곤의 절망으로 스러져가고 있는 지금, 이 불법적 자금 흐름을 용인하는 현재의 금융시스템이 더 이상 용납돼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 "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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