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고 싶은 책] 호시노 유키노부의 '2001 스페이스 판타지아'

유상호기자 2012. 11. 23.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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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 옮김·애니북스 발행·전3권·2만8,500원인문학적 사유 담은 SF만화중력의 속박에 대한 해독제이자 머나먼 로망에 대한 진정제

장자(莊子)가 갈릴레이와 케플러 뒤에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등의 길이가 수 천 리인 붕(鵬)의 날갯짓 대신 수십억 리 반경 행성의 웅혼한 궤적으로 '소요유(逍遙遊)'의 로망이 채워지지 않았을까. 대부분의 사람은 광대무변한 우주의 존재를 인식하지 않고 산다. 하지만 소라 껍질 만한 일상의 갑갑함에 절망할 줄 아는 인간이라면, 세포 속에 각인된 진화의 원심력을 느낄 수 있는 인간이라면, 밤하늘 수십억 광년 저쪽에서 날아오는 별빛에 아연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외경심일까, 아니면 그리움일까.

<2001 스페이스 판타지아>는 1984년부터 1986년까지 일본 후타바샤(雙葉社)의 월간 '슈퍼액션'에 연재됐던 SF만화다. 내가 단행본으로 묶인 이 책을 접한 것은 1990년대 초다. 일본 대중문화가 해금되기 전이어서, 내가 본 건 어둠의 경로로 흘러온 해적판이었다. 야간 자율학습을 '땡땡이' 치고 담배 연기 자욱한 만화방 구석에서 이 책을 폈다. 심(深)우주로 발돋움하는 인류의 장쾌한 드라마가 거기 펼쳐지고 있었는데, 나는 겨우 기말고사 따위나 걱정하는 고등학생이었던 것이어서, 시간이 얼른 흘러가 버렸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던 것 같다.

돌이켜보니 시간은 너무 빨리 흘러가 버렸는데, 나는 지금 게 껍데기 만한 월급쟁이의 삶에 갇혀 있고, 가끔 그 갑갑함이 우주에 대한 그리움으로 동할 때면 이 책을 편다. 말하자면 이 책은 중력의 속박에 대한 해독제, 혹은 채우지 못한 로망에 대한 진정제다. 지금 내 책장에 꽂혀 있는 것은 2009년이 돼서야 정식으로 번역 출간된 세 권짜리 단행본이다.

각설하고, 이 책의 일본어 원 제목은 '2001 야화(2001 夜物語)'다. 영국의 SF 거장 아서 C 클라크의 소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와 아랍의 '천일야화'에서 반씩 따 왔다. 작가 호시노 유키노부(星野之宣)는 구미권 SF 소설을 기초로 대담한 아이디어를 화폭에 담아내는 아티스트다. 정교한 과학 지식을 바탕으로 장대한 스케일의 스토리를 만화의 형식에 담은 작품을 발표해 왔다. <2001 스페이스 판타지아>는 곳곳에 여러 SF 고전에 대한 오마주를 담고 있다. 영장류가 하늘을 나는 새를 보는 시선을 대사 없이 그린 인상적인 도입부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SF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에 대한 오마주.

이 책은 옴니버스 형식으로 돼 있다. 20개의 독립된 에피소드로 이뤄진다. 하지만 각 이야기가 연결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것은 인간의 우주 진출이 시작된 20세기 말부터 약 4세기에 걸친 시간이 연대기 순으로 각 에피소드의 배경을 이루기 때문이다. 달에서 대규모 자원을 발견한 인류는 그것을 발판 삼아 심우주로 나아간다. 그 과정에서 인간은 지구에서의 실수를 무수히 반복하는데, 그것은 기술의 미비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종이 지닌 근원적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책의 진짜 가치는 SF 장르 속에 철학과 종교를 녹여낸 인문학적 깊이에 있다.

예컨대 여덟 번째 에피소드 '악마의 별'은 선과 악의 개념, 혹은 인간의 한계를 우주를 배경으로 그리고 있다. 이 에피소드의 모티프는 밀턴의 <실락원>이다. 명왕성의 궤도 바깥에서 반(反)물질로 이뤄진 행성이 발견되고, 교황청은 이를 신의 경고로 해석해 심우주로 향하는 인간의 눈길을 다시 신에게로 돌리려고 한다. 그러나 반물질 행성에 대한 열강들의 속셈은 제각각이다. 각국에서 파견된 과학자들은 태양계의 끝에서 창세기의 시대부터 계속된 어리석은 반목을 되풀이하고 만다. 광막한 우주 공간에서 마주친 인간의 고독감을 그린 '풍요의 바다', 생명과 번식의 존재론을 담은 '녹색 별의 오디세이' 등의 에피소드들도 SF의 틀에 담긴 잠언록이라 할 만하다.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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