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한국은 문맹 퇴치 신화에 도취돼 '기능적 문맹' 겪는 이들 고통엔 눈 감았다"

황경상 기자 2012. 6. 15.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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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속의 문맹자들' 낸 엄훈 교수

중학교 1학년 창우(가명)는 다른 아이들과 달랐다. 학기 초 창우는 교과서에 나오는 폴 빌라드의 < 이해의 선물 > 을 읽었다. 경제관념이 없는 네 살배기 꼬마가 사탕을 사러 와서 돈 대신 버찌씨를 내밀자 되레 '돈이 남는다'며 2센트를 내준 사탕가게 주인 위그든씨의 따뜻한 마음씨를 담은 소설이다. 창우는 이 이야기를 읽고 난 뒤 "왜 위그든씨가 2센트를 돌려주었느냐"는 선생님의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했다. "불쌍해서요." "왜?" "사탕 살 돈도 없으니까요."

겉으로 보면 창우는 비교적 유창하게 글을 읽을 줄 아는 아이였다. 처음에는 건성으로 읽었는가 싶었다. 차분히 읽힌 뒤 장시간 대화를 하며 다시 내용을 물어도 마찬가지였다. 창우는 "해독(解讀)은 되는데 독해(讀解)가 되지 않는" 상태였다. 창우를 가르쳤던 선생님은 교사 생활 3년째에 '글을 읽되 읽지 못하는 아이'가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았다. 곧 창우와 비슷한 아이들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됐다. < 학교 속의 문맹자들 > (우리교육)을 펴낸 엄훈 청주교대 교수(47·사진)의 이야기다.

'학교 속의 문맹자'라는 말은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얘기다. 읽고 쓸 줄 알면 문맹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 학교에 문맹자가 있을 리 없다. 1960년대 조사에서는 '학생은 모두 문해자'라는 규정도 등장한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문맹률을 자랑거리로 삼고 있다. 1980년대 이후에는 더 이상 문맹률 조사가 의미 없다며 하지 않는다고 한다. 유네스코 통계에 따르면 2005년 한국의 15세 이상 문맹률은 1.6%에 불과하다.

엄 교수는 이런 통념에 의문을 던진다. 글자를 알더라도 실제 생활에서 글을 읽고 활용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기능적 문맹'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유네스코는 이미 1950년대에 최소 수준 문해력과 기능적 문해력을 구분했다. 전 세계적으로도 문맹을 가름하는 건 기능적 문해력이다. 엄 교수는 지난 13일 전화인터뷰에서 "미국인의 3분의 1이 문맹자라는 얘기를 듣고 비웃지만 그들의 기준은 기능적 문해력"이라며 "실제 교실에서 텍스트를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아이들이 있는데 우리도 솔직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2002년 한국교육개발원 연구 결과 19세 이상 성인의 24.8%가 생활하면서 읽기·쓰기·셈하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나타났다. 8.4%는 완전 비문해자에 해당했다. 엄 교수는 "한국이 40년 동안 문맹 퇴치 신화에 자족하면서 문맹으로 인한 국민들의 실질적인 고통에 눈을 감고 있었다"고 말한다.

엄 교수는 중학교 교사 시절 3개 학급 아이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면서 20명의 '읽기 부진' 학생들을 발견했다. 이 중 9명의 학생들을 보충학습반에 데려와 가르쳤다. 청주교대로 옮긴 뒤에는 초등학교를 찾아갔다. 중학교 아이들의 읽기 부진은 이미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부터 잉태되고 있었다. 그는 자원 봉사 대학생들과 초등학교의 읽기 부진 아이들을 찾아가 일대일로 함께 책을 읽고 그 내용을 글이나 그림으로 회상하는 훈련을 했다. 창우와 비슷한 아이들은 느리지만 의미 있는 변화를 보였다.

읽기 부진은 대체로 가정에서 자연스럽게 문해력을 발달시킬 수 있는 환경을 갖추지 못한 것이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창우의 사례를 보면 이해가 동반되지 않는 읽기가 반복되면서 단어들 자체의 의미에만 집착해 시야가 점점 좁아지는 '터널 비전' 현상이 심화된다. 이런 아이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아이들과 격차가 벌어진다.

엄 교수는 학교 속의 기능적 문맹 문제가 "한국의 모든 학교에서 발견되는 보편적인 현상이며 한국의 교육 시스템과도 맞물려 있다"고 본다. 읽기 부진 학생들의 실태를 지적하면 선생님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공부 못하는 아이들은 어디든 있을 수밖에 없죠." 모든 것을 시험점수로 판단하는 교육당국에서는 '읽기 부진아'는 없고 '공부 못하는 아이'만이 있을 뿐이다. 문제의 본질은 보이지 않는다. 학교 현장에서는 이 아이들을 우선 "60점을 넘기도록" 만드는 데 진력하며 이것을 '구제'라고 부른다. 그러나 반복 문제풀이를 통해 겨우 '구제'된 아이들은 다음해 또 학력 부진아가 된다.

이렇듯 읽기부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가장 근본적 원인은 교사들의 '무지'다. 엄 교수 자신도 교사 생활 3년이 지나도록 그런 아이가 있는 줄 몰랐다는 것이다. 그가 "학교 속의 문맹자들이란 현상 자체를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인식하고 공유하는 게 가장 시급하다"고 말하는 이유다. "읽기 문제는 인권의 문제입니다. 읽기 능력은 삶의 질을 보장하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으로 마땅히 보장돼야 할 인권임에도 무시당하고 있죠."

엄 교수가 뜻을 같이하는 연구자들과 오는 26일 창립하는 '달팽이의 친구들'은 읽기문제클리닉을 운영해 읽기부진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는 한편 사례연구와 평가방법 개발, 읽기전문가 양성에도 나설 계획이다. "뉴질랜드의 읽기 회복 프로그램이 가장 바람직한 모델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읽기 부진 학생들을 초등 3학년이 되기 전에 발견해 전문교사가 일대일로 집중적으로 도와 정상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제도입니다. 그 모델은 클레이라는 교육학자가 한 학교 단위에서 만들어낸 뒤 몇 년 만에 전국으로 확산됐고 세계적으로도 전파됐어요. 저희도 궁극적으로는 학교 단위의 문제 해결 모델을 만들어내는 것이 목표입니다.

< 황경상 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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