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작 뮤지컬 '닥터 지바고' 150분 함께 해보니

태상준 입력 2012. 2. 17. 06:54 수정 2012. 2. 17. 0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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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태상준 기자] 지바고의 적은 지바고였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원작 속 지바고는 혁명과 전쟁ㆍ사랑의 거대한 운명에 맞섰지만, 무대 위 지바고를 괴롭힌 것은 운명이 아닌 원작의 유령이었다. 뭔가에 홀린 듯 공연 내내 이리저리 끌려 다닌 지바고는 결국 공허하게 무대 뒤로 퇴장했다.

20세기 초반 러시아 혁명기를 배경으로 유리 지바고와 라라 안티포바의 파란만장한 삶과 사랑을 담은 대서사극 '닥터 지바고 Doctor Zhibago'가 3주째 잠실 샤롯데씨어터 무대에 오르고 있다. 뮤지컬 '닥터 지바고'는 오디뮤지컬컴퍼니의 신춘수 대표가 미국과 호주의 스태프들과 함께 프로듀서로 참가한 글로벌 프로젝트. 지난해 2월 호주 초연에선 90%에 가까운 좌석 점유율로 또 한 번 걸작 탄생을 알리며, 노벨문학상과 미국 아카데미 5개 부문 수상에 이어 뮤지컬에서의 성취가 시작되려는 것처럼 보였다. 원작의 정수를 그대로 무대에 옮겨보겠다는 의욕은 뮤지컬의 거창한 홍보문구 '소설과 영화의 위대한 감동'에 담겼다.

'그대로'가 문제다. 20여 년에 걸친 원작의 대서사는 물론이고 3시간이 넘는 영화 버전도 2시간 30분짜리 무대에 옮기기엔 녹녹하지 않다. 밀도 높은 이야기인 만큼 어설픈 축약은 독이 된다. 하지만 제작진은 원작을 가급적 그대로 재연하려는 욕심에 기본 줄거리를 각 장면에 빼곡히 채워 넣었다. 부작용은 이내 드러난다. 1막부터 배경 설명이 많아졌고 빠른 장면 전환으로 지루함을 극복하려 했지만 극은 산만하고 가벼워진다. 배우들과 무대장치가 정신없이 등장과 퇴장을 반복하는 동안 몰입은 내내 방해됐고 원작의 느낌은 허무하게 사라진다.

개별 장면들의 완성도는 좋다. 각 인물들 사이의 얽히고설킨 관계, 애증과 원한과 사랑이 각 장면에 자연스럽게 묻어난다. 그러나 이는 뮤지컬 '닥터 지바고'가 이뤄낸 성취가 아니다. 관객이 머릿속에 넣고 온 배경 지식이다. 원작이 러시아 격변기의 인간사를 기나긴 여정에 담아냈다면 뮤지컬 버전은 주요 장면 별로 사실과 감동의 '파편'만 짜깁기한 인상이었다. 한 편의 대서사극을 몇 편의 미니시리즈로 나누어 이어 붙인 느낌까지 들 정도다. 결국 후반부로 갈수록 묵직해져야 하는 인간과 예술에 대한 통찰과 감동은 쌓일 새 없이 증발한다. 제작진은 예술가로서의 유리와 그의 뮤즈인 라라의 사랑을 불륜이 아닌 운명으로 그려내고 싶었겠지만, 헐레벌떡 전개되는 이야기는 쉽게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오히려 '제도를 뛰어넘는 거대한 사랑'은 모든 것을 감내하는 토냐에게 발견된다. 남편의 외도를 알면서도 끝까지 '예술가의 사랑'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몸부림은 자연스레 눈물을 자아낸다.

영화가 유리와 라라의 사랑 이야기를 중심으로 각색된 반면, 뮤지컬에서는 이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던 인물들(유리의 아내 토냐, 라라의 남편 파샤와 코마로프스키)의 비중이 커진다. 대신 존재감이 약해진 '투 톱' 유리와 라라는 원래 속 매력을 상당 부분 잃어버린다. 유리는 십수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유약한 청년처럼 인물들 사이를 오간다. 항상 발산하는 에너지로 마성을 뽐내왔던 홍광호도 이번에는 캐릭터의 한계에 갇혀 힘을 쏟지 못한다. '미친 가창력'으로도 커버될 수준이 아니다. 독립적이고 강했던 여성 라라 역시 마치 유리에 종속된듯한 여성이다. 유리와 라라는 마지막까지도 그들의 사랑을 납득시킬 만한 공감대를 만들지 못한다. 남은 공연 기간 동안 이를 어떻게 수정하느냐가 성패의 관건이다.

4.4도 경사진 무대와 원근법이 적용된 무대 세트도 인상적이지만, 뮤지컬 '닥터 지바고'의 장점은 역시 음악이다. 러시아 혁명과 1차세계대전, 2월 혁명 등 러시아 현대사를 관통하는 낯선 배경에 몰입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브로드웨이 작곡가 루시 사이먼이 만든 아름다운 넘버들이다. 메인 테마곡이라고 할 수 있는 '나우(Now)'를 비롯 '애쉬즈 앤 티어즈(Ashes and Tears)', '온 디 엣지 오브 타임(On the Edge of Time)' 등은 늘어지는 분위기를 순식간에 반전시키는 '강력한 한 방'을 가진다. 딱딱하고 혼란스러운 이야기에서 사이먼의 노래들은 감성적인 선율로 감동 자극의 최전선 역할을 해낸다.

대서사극과 클래시컬한 넘버의 결합은 '레 미제라블'을 연상시킨다. 실제로 '닥터 지바고'는 호주 초연 전부터 '제2의 레 미제라블'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빅토르 위고의 방대한 원작소설을 무대에 옮긴 '레 미제라블'은 사람들의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받았지만 세련된 각색으로 명작의 반열에 올랐다. 묵직한 주제를 절정까지 일관되게 유지하면서도 긴 시간 동안 힘을 잃지 않게 한 것이 각색의 힘, 선택과 집중이다. '닥터 지바고'는 '레 미제라블'과 비슷한 출발점에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다른 곳을 표류하고 있다.

일품은 아니지만 각 재료의 질은 분명히 상급이다. 불완전한 드라마와 캐릭터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울림을 준 것은 역시 홍광호의 노래다. 김지우 역시 '재발견'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캐릭터와 높은 부합도를 보여줬다. 최현주도 두 사람과 수준 높은 하모니를 보여준다. 이제 조승우라는 최고의 재료가 이 요리에 가미됐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재료가 아니라 요리 방식이다. 뮤지컬 '닥터 지바고'의 진정한 맛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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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준호(공연칼럼니스트)·태상준 기자 birdcage@<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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