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학자들이 외면해 직접 편역" 박기봉씨

2007. 3. 20.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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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문화사 등이 한글세대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체로 편역됐다. 전문 사학자나 한학자가 아니라 출판인이 직접 편역한 것이어서 이채롭다. 주인공은 최근 '조선상고문화사(외)'(비봉출판사)를 펴낸 박기봉 비봉출판사 대표(59)다.

그가 지난해 '조선상고사'를 편역해낸 지 3개월 만에 내놓은 책에는 조선상고문화사 외에도 독사신론, 조선사연구초, 사론 등이 함께 묶여 있다.

지난 8일 오후 찾아간 서울 합정동 그의 출판사 사무실은 세 벽면이 춘추, 좌전, 자치통감, 전국책 등 각종 중국 사서들과 경서들로 가득 차 있었다. "사실 제가 한 일이라곤 열심히 워드를 친 것 뿐입니다. 이게 그 결과물이죠."

'충무공 이순신 전서' 1~4권과 '을지문덕전' '조선상고사' 그리고 '조선상고문화사(외)'를 내보였다. '워드작업'이라는 겸손한 표현을 썼지만 한글세대가 읽을 만한 변변한 번역본이 없는 현실에서 그가 한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과 경제학과 동기인 그가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를 처음 접한 것은 '잘 나가던' 삼부증권(대우증권 전신) 조사과장 시절인 1976년이다.

"군대 시절 내무반에 고문진보, 도연명의 시를 숨겨놓고 읽고, 대학시절 틈틈이 혼자서 중국 사서들을 공부한 덕에 한문 실력이 평균 이상은 됐습니다. 하지만 단재의 저서들은 그때만 해도 제게는 너무 어려웠습니다. 우리 역사는 재미도 없고, 읽을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고 다시 예전처럼 중국 고전에 심취했습니다."

그가 다시 우리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중국이 동북공정을 본격 추진하는 등 역사 갈등이 불거진 2005년쯤이다.

"은사인 조순 민족문화추진회장이 이순신 전서를 번역해보라는 '숙제'를 내주시더군요. 그래서 이 작업들을 시작하게 됐는데, 결국 단재의 조선상고사에까지 다시 손이 미쳤어요."

그렇게 어려웠던 조선상고사가 그간의 연륜 덕분인지 술술 읽히더라고 전한다. 혹시 그간 나온 번역본이 있나 찾아봤다.

그는 "역사 공부해서 돈 벌어먹는 사람들은 많지만 어째서 이 책을 한 권도 제대로 번역해놓지 않았는지…"라며 혀를 찼다.

그는 이번 책을 내며 한국 사학계를 작심하고 비판했다. "사실 동북공정은 이미 김부식과 이병도가 다 해놓은 것을 지금 와서 저쪽에서 공론화하고 있을 뿐입니다. 국사학계가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그것은 근·현대사 부분에 국한될 뿐 아직 우리 민족의 근본 뿌리에 대한 역사는 일제가 왜곡, 주입해준 그대로 답습하고 있어요."

그가 특히 문제 삼는 것은 '실증사학'이다. "일본인 사학자 이마나시 류와 그의 제자 이병도가 조선사 왜곡을 위해 동원한 실증사학이란 이런 겁니다. 갑(甲)이란 사람이 종가(宗家)에 불이 나서 대대로 전해오던 족보나 선조들의 문집이 모두 불타버리거나 도둑을 맞아 갑에게 자기 조상의 존재를 증명할 문서가 남아 있지 않음을 이유로, 갑에게는 원래 조상들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이죠. 이것은 일본이 조선의 고대사를 삭제하고 왜곡하기 위해 도입한 것입니다."

박 대표의 단재 편역 시리즈는 조만간 나올 '천고(天鼓)'로 막을 내리게 된다. '천고'를 중심으로 단재의 문학과 사상을 '단재의 동아시아론'이라는 시각에서 펴낼 예정이다. 그는 예전에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과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 등 경제학 고전을 주로 펴냈다.

김수행 서울대 교수가 편역한 자본론도 그의 손을 거쳐서 나왔다. 경제학과 역사, 고전을 잇는 끈은 '사람'이다.

"경제도 사람이 하는 겁니다. 경제에서 돈이 가장 중요한 게 아닙니다. 조금 더 이윤을 내느냐, 임금을 더 받느냐 보다 왜 우리가 일 하는지, 우리는 누구인지 그런 가치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인간의 가치, 문화의 가치, 환경의 가치…. 30여년 전 수백명을 모아놓고 주식 강의를 하던 나는 '책'이란 게 그런 가치를 불어넣는 희망이라 생각했고 일찌감치 직장생활을 접고 출판계에 입문했습니다. 직원들 퇴근시키고 혼자 사무실에 남아 불을 밝히며 책과 씨름하는 것이 그 어떤 일보다 좋습니다."

인터뷰 도중 경기도 남양주에서 조선상고사를 읽은 독자가 찾아와 박 대표, 기자 모두가 놀랐다. 대량 주문해 지인들에게 나눠줄 생각이라고 독자는 전했다.

'조선상고사'는 나온 지 3개월 만에 7000부가 팔렸다고 한다. 일반인들의 고대사에 대한 목마름이 어느 정도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는 자리였다.

〈손제민기자 jeje1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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